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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의 새영역 혹은 자본주의의 최전선?
경제학의 새영역 혹은 자본주의의 최전선?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08.12 11: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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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_ ‘행복’을 보는 두 가지 시선, 『행복, 경제학의 혁명』·『행복산업』

십 여일 간격으로 나온 두 권의 책이 서로 상충하는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면 이를 어떻게 읽어내야 할까. 특히 이 책들은 ‘행복’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하나는 ‘개인의 행복감 측정’을 경제학의 주요 화두로 삼아야 한다고 제안하는 쪽과, 자본과 정부가 국민들에게 ‘행복’을 팔아왔으며 이것이 마침내 ‘산업’으로 확장돼 자본주의의 새로운 최전선이 됐다고 비판하는 쪽으로 나눠지기까지 한다. 앞의 책은 『행복, 경제학의 혁명』(브루노 S. 프라이 지음, 유정식·홍훈·박종현 옮김, 부키, 376쪽, 18,000원)이며, 뒤의 책은 『행복산업』(윌리엄 데이비스 지음, 황성원 옮김, 동녘, 344쪽, 16,800원)이다.

‘행복 연구가 21세기 경제학의 지평을 바꾼다’라는 부제를 단 『행복, 경제학의 혁명』은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한 뒤 미국의 리처드 이스털린, 영국의 리처드 레이야드, 이탈리아의 루이지노 브루니와 함께 ‘행복경제학’의 흐름을 주도한 브루노 S. 프라이 스위스 취리히대 교수다. 경제학의 정교한 분석 기법과 심리학 및 사회학의 새로운 연구 성과를 결합해 행복에 관한 이론적, 실천적 연구 지평을 넓혔다고 평가받고 있다.

저자는 기존의 전통적 경제이론, 표준 경제학의 시각에서 벗어나 있다. 전통적 경제이론에서는 사람들의 경제적 행동을 추동하는 주된 요인으로 ‘효용’ 개념을 적용한다. 경제생활의 궁극적 목적은 소득과 소비를 통해 만족감을 얻는 것이라고 보고, 이를 효용으로 설명한 것이다. 그러나 표준 경제학에서는 생각이 다르다. 효용을 측정할 수도, 측정할 필요도 없으며, 사람들이 선택한 현시선호에 따라 효용을 추론할 수 있을 뿐이라고 봤다. 즉, 객관적으로 관찰 가능한 것은 사람들이 드러내는 행동양식이므로 이를 통해 효용을 유추한 뒤, 이에 따라 다시 사람들의 선택을 설명해야 한다는 논리다. 그렇다면 저자는 어떻게 접근했을까.

‘행복경제학’의 세계적 흐름을 주도한 그는 ‘행복’과 ‘삶의 만족’이라는 개념을 통해 사람들이 느끼는 효용감이나 삶에 대한 행복감을 충분히 측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주관적 안녕감(subjective well-being)’이라는 심리학계의 도구를 활용했다. 이를 통해 다양한 사회 현상을 분석하고, 기존 경제학에서는 설명하기 어려웠던 경제적 행동들을 규명한 것이다. 물론, 저자가 말한 ‘행복 연구’는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있을까’를 탐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왜 행복감을 느끼는가에 방점을 치고 있다. 개인이 행복을 느낀다면, 그리고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전체적으로 높은 행복감을 보인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밝히는 것이 과학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이다.

“만일 행복 연구가 경제학(과 다른 사회과학)에 혁명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말할 수 있다면, 현재의 지식 상태는 첫걸음에 불과하다. 우리가 더 알아야 하는 또 다른 문제는 더욱 장기적으로 행복이 어떻게 증진되는지에 있다”라고 말하는 저자는 ‘행복경제학’이 “아직 열려 있고, 혁명은 이제 막 시작됐다. 그리고 그것이 학자들에게는 도전거리가 될 것이다. 특히, 젊은 경제학자들이 이 분야에 몰려들어야 할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사회학자이자 정치경제학자인 윌리엄 데이비는 런던대 골드스미스대학 정치학부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뉴 레프트 리뷰> 등에 기고하고 있고, 그리고 책이 일관되게 취하고 있는 ‘행복 이데올로기 비판’ 태도로 본다면, 그는 확실히 앞의 저자와 대비된다. 경제학의 정치적 유용성, 경제심리학의 성장에 관심을 갖고 연구하는 그는 『신자유주의 한계』 등의 저서를 내기도 했다.

실제로 한국사회에서는 2000년대 이후 ‘행복경제학’, ‘행복과학’, ‘긍정심리학’ 등이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됐다. 이들은 행복지수를 산출하고, 우리의 뇌가 어떨 때 행복을 느끼는지를 측정하며,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긍정적이고 활기차게 만들 수 있는지를 설파한다. 사례는 많다. 2014년 다보스 포럼에서 심신의 행복을 주제로 하는 세션은 무려 25개나 됐다. 전 세계의 수많은 공식적인 통계기관들은 국가의 행복 수준, 국민들의 행복지수에 대한 정기보고서를 발간하고 있다. 신경과학자들은 행복과 불행이 뇌에 어떻게 물리적으로 각인돼 있는지를 규명하고, 인간의 표정을 분석해 감정을 파악하는 컴퓨터 기술의 출현, ‘기분 추적’을 행하는 스마트폰 앱, 트랙 유어 해피니스·매피니스(각각 하버드대와  런던정경대에서 개발한 기분 추적 스마트폰 앱)까지 등장했다.

저자의 질문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행복이 21세기 최대의 화두로 떠올랐다면, 그것이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 그렇게 됐는지를 질문해야 하는데, 그런 질문이 결핍돼 있다는 것이다. 즉, 저자는 감정은 어떻게 측정과 통제의 대상이 됐으며, 자본주의의 새로운 최전선에 서게 됐는가를 따져야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오늘날의 행복과학은 마음과 세상 간의 관계를 수학적으로 탐구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꾸준한 프로젝트의 최신판일 뿐이라면 어떨까. 프랑스혁명 시절부터 현재까지 특정한 과학적 유토피아가 판매됐다. 바로 인간의 감정을 다루는 적절한 과학이 있으면 도덕성과 정치의 핵심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는 행복, 감정을 조장하고 부추기고 그렇게 살 것을 주문하고 강요하는 일체를 ‘행복산업’으로 명명한다.

특히 저자는 행복, 감정이 ‘과학적’ 측정을 통해 눈으로 볼 수 있는 숫자나 지표라는 데이터로 환산되고, 이것이 행복경제학과 긍정심리학으로 이전되는 지점에 주목했다. 200여 년 전 벤담의 공리주의적 아이디어(최대다수의 행복을 구현하기 위한 객관적 지표의 개발)는 이제 심리 측정을 위한 설문지, 미묘한 표정(가령 쾰라아라는 회사는 컴퓨터를 통해 진짜 미소와 가짜 미소를 분석해 이를 가치로 환산하는 시도를 하고 있다), 맥박, 화폐, 설문지 등을 통해 우리의 주관적 경험을 비교 가능하게 만드는 방법들로 진화했다. 하지만 행복과학이 도덕적으로 의미 있는 ‘행복’이라는 것을 이렇게 ‘측정’하는 것에 저자는 의문을 제기한다. “행복과학은 뭔가 의미 있는 것을 포착하고자 하지만, 그 의미를 적절하게 붙들기에는 너무 차가운 도구와 척도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측정 가능한 행복과 쾌락이라는 게 대체 누구에게 봉사하는 것이냐고 그는 따진다.

흥미로운 대목은 이것이다. 행복의 측정, 특히 인간의 감정을 뇌의 반응으로 환원하고 정량화된 숫자로 바라보는 정신의학과 심리학은 시카고경제학파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적 사고와 결탁해 무한경제 시대의 이론을 완성한다고 짚어낸 부분 말이다. 저자는 이렇게 지적한다.

“시카고학파와 세인트루이스 정신의학파는 우리는 약자에 대해 각별한 정치적 혹은 도덕적 책임을 지니며, 이 때문에 강자에게 어떤 제약을 가해야 할 수도 있다는 논리를 박살내 버렸다. 이제 권위는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은 채 강자와 약자를 측정하고 등급을 매기며 비교하고 대조하는 행위에만 존재한다.”

저자의 결론은 이렇다. 행복을 조금 포기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행복의 극대화를 비판해야 한다! 지금의 ‘행복산업’의 모습이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라는 것을 이해한다면, 끊임없이 우리 개인의 불행이 각자의 잘못이라고 몰아가면서 우리의 감정, 뇌, 행동에 비판의 날을 겨냥할 것이 아니라 밖을 향해 벼릴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이다.

이 두 책을 서로를 향해 치달리는 기차로 읽는다면, ‘접점’을 모색하는 일은 아득해질 것 같다. ‘행복’과 ‘행복산업’ ‘행복이데올로기’의 간극을 읽어내는 지혜가 이 아득한 거리를 메워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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