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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평가의 책임
대학평가의 책임
  • 최성욱 기자
  • 승인 2015.07.20 17: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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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

벌써 십수년 전이다. 한 언론사가 수익사업이 필요했는지 난데없이 대학을 평가하겠다고 나섰다. 이 언론사는 재학생과 수험생·학부모들에게 대학의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겠다는 취지를 앞세웠다. 몇 년 후 또다른 언론사가 해외의 대학평가 대행기관과 제휴를 맺고 시장에 뛰어들었다.

▲ 최성욱 기자

고등교육에 눈이 밝지 않았던 이 언론사들은 대학순위를 가리겠다며 교수들의 논문 개수를 세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국제화’가 중요하다며 교환학생·외국인 유학생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또 언제는 학생 만족도를 추가해야겠다며 무작위로 인터뷰를 해댔고, 이도 모자랐는지 대형강의 개수, 시간강사 숫자따위를 세어갔다. 놀랍게도 이런 식으로 만든 ‘대학랭킹’에 사람들은 흥분했다.

이를 지켜보던 정부(교육부)가 대학평가를 낚아챘다. 평가기준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교수들의 논문 편수를 세고, 외국인 유학생, 대형강의, 시간강사 비율 등을 체크했다. 그나마 한걸음 나아간 건 총장 면담을 하거나 평가 발표 직전에 이의를 제기할 기회를 준다는 것이다.

한 언론사 홍보팀장의 말을 빌리면 “언론사 대학평가에서 ‘이의 신청’이란 ‘광고 신청’과 같다”고 하니 교육부의 대학평가는 그나마 낫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잘만 하면 돈까지 주니 말이다.

이처럼 언론사 대학평가가 기세등등할 때의 일이다. 서울의 한 사립대가 몇 년 동안 순위가 좀 내려간 모양이다. 좀처럼 올라갈 기미를 보이지 않자 교수들과 학생들이 총장 사퇴를 요구했다. 책임을 지라는 말이었다. 그런데 사퇴 요구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따져보아, 교수들 논문 편수로 순위를 가렸으니 책임을 질 쪽은 교수들이었고, 취업률로 당락이 나뉘었으니 책임질 쪽은 졸업생들이었다.

총장만 바꾸면 교수들이 세계적인 논문을 쓰고 학생들이 대거 취업하는가. 그때그때 입맛따라 평가지표를 넣었다뺐다하는 평가기관이 내놓은 결과를 곧이곧대로 믿겠다는 것인가. 그러나 이제는 대학평가 결과로 총장과 보직교수들에게 책임을 묻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그만큼 우리는 대학 줄 세우기에 익숙해졌고, 평가를 어떻게 하든 결과를 받아들이겠다는 정서가 형성됐다.

지난달 정부가 2016년도 대학구조개혁 2차 평가대상 대학에 비밀리에 공문을 보냈다. 이들 30여개 대학은 예비 하위그룹이다. 내년도 정부 재정지원이 끊길 위기에 처했다. 강원도의 한 대규모 국립대가 이 그룹에 속했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지자, ‘총장과 보직자 전원 사퇴하라’는 성명과 언론보도자료가 2주째 날아들었다. 그러던 어느날 ‘보직자, 전원사퇴한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언론사에서 정부로 바통을 이어간 대학평가, 무려 20여년이 흘렀다. 전국 200여 개 대학은 지금, 사이즈만 다를 뿐 모두 같은 모양, 같은 색상의 옷을 입고 있다. 대학평가는 아직도 논문을 ‘빠르게 많이’ 쓸 줄 아는 교수를 뽑을 것과 취업에 능한 인재를 배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대학평가 결과로 총장과 보직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구성원들은 평가기준에 더 부합하는 철학과 정책을 가진 총장과 보직자들을 원하는 건지 묻고 싶다. 

가정만큼 아둔한 건 없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대학총장들이 일찌감치 대학평가하는 언론사·정부를 상대로 명예훼손과 업무방해로 고소했어야 했다. 그런 제지와 비판이 없다보니 ‘수요자 중심의 교육’이라는 언뜻 선량해 보이는 논리가 대학평가를 지탱시켜 주었다. 그리고 이 대학평가는 아카데미를 몽땅 집어삼키고 말았다.

최성욱 기자 cheetah@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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