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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 잡’ 뛰는 철학교수 “나는 교수일까? 직장인일까?”
‘투 잡’ 뛰는 철학교수 “나는 교수일까? 직장인일까?”
  • 반성택 서경대 교수·철학
  • 승인 2015.07.20 08: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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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교수의 방학 ⑤ 인문계 교수의 여름나기

구조조정이라는 말이 참 무서운 세상이다. 그러고 보면 이 말은 90년대 말 외환위기 때부터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조조정이라는 처방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가 이 사회에 지금까지 분명히 체험돼 왔다. 위기에 처한 기업이 강구하는 구조조정이란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산이라는 것을 우리는 곳곳에서 지켜보고 있다.

대학에도 구조조정의 조류가 밀어닥쳤다. 대학구조조정은 처음에는 취업이, 그것도 정규직 취업이 강조되며 많은 대학에서의 학과 통폐합 등으로 나타났다. 최근에는 취업문제와 더불어 학령인구의 감소라는 인구통계를 놓고 진행되고 있다.

구조조정을 위한 대학평가 자료에는 빠짐없이 학령인구감소가 구조조정의 근거로 언급된다. 그 자료는 내가 보기에도 맞다. 인구통계는 맞을 것이다. 이 근거 자료를 대하면서 동시에 학령인구 증가 시기에 대학과 당국은 무엇을 했는가가 떠오른다. 80~90년대 호시절에는 저러한 추세가 예상이 안 됐던 것일까.

그 시절 대학 운영은 최고의 사업 영역으로 등장했다. 그러면서 고교 졸업생을 넘어서는 정도로 정원을 확대해 놓고는 이제와 줄이려 한다. 힘들고 아프다. 사실 이는 정부가 자초한 것이다. 현재 이 나라의 모두는 바쁘다. 학생은 원래 바쁘고, 공무원도 옆에서 보면 허덕인다. 그리고 구조조정 시기의 대학 교수들도 분주하다. 가끔 골프 치는 교수들도 있긴 있다.

인문계 교수는 그 잘 산출되지 않는 논문을 억지로라도 때에 맞추어 써야 하고 강의시간은 최근 더욱 늘어나 그냥 직장인 느낌이 물씬 난다. 중요한 고문헌을 읽어낼 시간이 없다. 그래도 마음을 다잡고 책을 쓰고 번역을 하려고 계획하면 또 논문을 써야하는 때가 도래하고 방학도 가버린다.

언제부턴가 나 자신을 투잡스(two jobs)로 운영하기로 했다. 제도적으로 요구되는 것을 어느 정도 충족시키면서, 한 명의 철학 교수에게 요구되는 본질적인 일을 별도의 프로그램으로 하기로 말이다. 여기에는 책도 쓰고 번역도 하고 나아가 논문다운 논문을 쓰는 것도 포함되고 또한 이른바 사회에 발언하는 글쓰기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힘에 부친다. 남들이 보기에는 시간이 많아 보이지만 연구다운 연구를 하기 위해 나는 솔직히 가벼운 저녁약속도 두렵다.

투잡스로 진행되는 나의 교수 생활은 앞으로도 오래 지속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돌아가는 세상을 보면 말이다. 구조조정의 또 다른 동력인 취업 문제 때문이다. 역사상 가장 열심히 공부하는 세대가 지금의 학생들이다. 이들은 유치원부터 영어를 배우기 시작해서 20년 가까이공부하고 있다. 대학은 마땅히 이들의 취업에 책임이 있다. 그 높은 등록금과 대학 진학에 따른 기회비용을 생각해서라도 취업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출생 이후 공부만 주로 해온 이시대의 젊은이들을 지금의 사회는 일자리를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나누어 놓고 기다린다. 자료마다 다소 편차는 있지만 현재 한국은 2천만 개 정도의 일자리 가운데 정규직과비정규직이 반반이다. 이는 90년대 말 외환위기 이전까지는 없던 현상이다.

오늘날 세상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두 개의 지표가 있다. 하나는 주가지수고 다른 하나는 영화 관객 동원 수치다. 코스피 지수는 현재 대략 2천을 넘어서 있다. 이 지수는 외환위기 직후 5백 근처였다. 대략 보면 우리는 몇 배는 발전했다. 이 대목에서 묻고 싶다. 5백에서 2천으로 나아갈때, 이에 걸맞은 일자리를 이 사회가 만들어 왔는가. 이러한 발전에 어울리는 일자리를 이 사회가 준비한 다음, 젊은이들을 교육해온 교육기관에 구조조정을 말하는 게 온당치 않을까.

위기에 빠진 기업을 살리기 위해 비정규직이라는 처방을 하고, 이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나 성장했다면 이 사회는 후속세대에게 예의와 공정함을 이들의 앞날에 준비해줘야 한다. 그렇지 않은 사회에 나서는 제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하다. 나는 오늘도 이들을 응원하기 위해 학자로서 써야할 시간을 줄인다.

반성택 서경대 교수·철학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부퍼탈대에서 철학박사를 받았다. 저서로 『아고라에서 광화문까지』, 『 현대철학의 모험』 등이 있으며, 현재 인문학총연합회 사무총장과 한국현상학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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