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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빨리 출판해준다 ‘미끼’ … ‘약탈출판 위협’ 대처 필요
논문 빨리 출판해준다 ‘미끼’ … ‘약탈출판 위협’ 대처 필요
  • 이상욱 한양대 교수·철학
  • 승인 2015.07.14 17: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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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부쩍 낯선 외국 학술지로부터 메일을 받는 일이 잦아졌다. 내가 훌륭한 연구를 한 학자라고 추겨 세우면서 자기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하라고 권하기도 하고, 아예 편집위원으로 초청하거나 특집호를 편집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  

▲ 이상욱 한양대 교수·철학(한국과학학술지 편집인협의회 대외협력위원장

처음에는 내가 인정받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기도 했지만 금세 무언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메일 내용에 ‘빠른 출판’을 보장한다고 유난히 강조하는데, 학술지가 다루는 주제가 너무 광범위하고 출판 목표가 모호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이런 메일을 받은 연구자가 우리나라에 이미 많다는 사실은 약탈출판(predatory publishing)의 위협이 우리에게도 현실화됐다는 뜻이다. 

약탈출판이란 학술출판이 비정상적으로, 즉 바람직하지 않은 방식으로 이뤄진 형태 중 하나다. 그러므로 우선 정상적으로 이뤄진 바람직한 학술출판이 무엇인지부터 따져보자.

바람직한 학술출판이란 당연히 논문 투고 및 심사절차가 공정하고 투명하게 이뤄지며, 저개발국 학자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출판비용도 적절해야 한다. 여기에 더해 높은 학술적 기준을 유지한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국내에서 통용되는 연구재단 등재지 목록이나 SCI/SSCI/A&HCI 시스템, SCOPUS 목록 등은 나름대로의 기준에 따라 이런 바람직한 학술출판의 조건을 갖춘 학술지의 명단을 제공한다.

비정상 출판으로서 약탈출판은 이런 좋은 학술출판이 갖춰야 할 조건을 모두 무시하거나 거의 준수하지 않는다. 논문을 투고하면 심사가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거나 아예 이뤄지지 않는다.

유명한 사례로 2009년 당시 코넬대 대학원생이었던 필 데이비스의 실험이 있다. 그는 지속적으로 논문 투고를 요청하는 스팸성 메일을 보내는 <벤담과학>이라는 공개접근(open access) 학술지에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낸, 문법적으로는 정확하지만 아무런 의미

없는 문장으로 구성된 논문을 보내 금방 출판 허가를 얻었다. 원래 목적이 이 학술지의 심사과정을 평가하기 위해서였기에 데이비스는 자신의 논문을 바로 철회했고 그 다음 이 과정을 학계에 널리 알려 비정상적 온라인 출판의 위험성에 대한 경종을 울렸다.

이처럼 약탈출판 심사 과정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이유는 이들 출판사가 학문적 기여가 아니라 돈벌이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약탈출판사들은 온라인상으로 운영되는데 출판사나 출판지역 등 좀 더 자세한 내용을 알아보려 해도정확한 정보를 찾을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출판 비용을 투고 전에 절대 공개하지 않고, 오직 출판승인을 내 준 다음에야 적게는 수백 달러에서 수천 달러씩 요구하곤 한다.

전부는 아니지만 약탈출판의 대부분이 현재 공개접근 학술지로 운영되고 있다. 공개접근 출판이 비용은 아끼고 이익은 극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약탈출판 학술지는 본인의 동의를 얻지도 않고 편집위원회에 위촉하기도 하고, ISSN 번호나 인용지수 등을 허위로 발표하는 경우도 많다. 마지막으로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학술지 명칭이‘짝퉁’이어서 잘 알려진 다른 학술지와 헷갈리기 쉽다.

이런 비정상적 출판에 ‘약탈’출판이란 명칭이 붙게 된 이유는 이런 출판의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고발한 콜로라도 대학 도서관 사서인 제프리 비얼의 개인적 견해 때문이다. 그는 2010년부터 매년 약탈출판 학술지와 출판사 리스트를 발표해 오고 있는데, 그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이런 비정상적 출판은 정상적인 공개접근 출판의 결과라는 것이다. 즉, 약탈출판은 학술적 연구 결과를 무료로 배포하여 보다 많은 연구자에게 이익을 주겠다는 공개접근 학술지의 정신과 그에 호의적인 연구자들을 ‘약탈’하는 방식으로 이익을 취한다고 보는 것이다. 비얼은 이런 이유로 공개접근 출판은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약탈출판 등에 의해 오염될 수밖에 없는 실패한 출판 모형이라 주장한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특히, 약탈출판에서 문제가 되는 비정상적 논문 검토 시스템을 보완하기 위해 논문을 웹상에 올린 후 누구나 이에 대해 코멘트하고 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이를 종합하여 출판 여부를 결정하는 공개심사(open review)나 논문이 일단 출판된 이후에도 검증 작업을 계속하는 출판후 검증 시스템을 적절히 활용한다면 좋은 공개접근 학술지가 약탈출판에도 불구하고 온라인 출판 환경에서 충분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비얼의 비관적 견해가 옳은지 여부는 좀 더 지켜보아야 할 문제지만, 이와 무관하게 우리나라 학자들도 약탈출판의 위협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물론 약탈출판에 이용당하거나 편승하는 일이 없어야겠지만, 보다 선제적으로 우리 학술지 출판문화를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렇게 되면 우리나라 연구자들이 약탈출판의 유혹에 직면할 때, 누구나 이는 ‘잘못된 출판’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과학학술지편집인협의회처럼 이런 노력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단체를 활용하 는 것도 좋은 방안이 될 수 있다.

이상욱 한양대 교수·철학 editor@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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