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肉筆 시집을 묶으면서
肉筆 시집을 묶으면서
  • 교수신문
  • 승인 2015.07.13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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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류근조 중앙대 명예교수·국어국문학

"오랜 기간 잊힌 채 시집 속에 갇혀 있던 시들 중에 더러 마음에 와 닿는 작품들을 꺼내어 수시로 서툰 글씨일망정 심혈을 기울여 써 오는 동안, 감히 나 자신 觀照의 경지에까지 다다를 수 있었노라고 말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제법 마음의 평정과 평상심을 되찾을 수 있게 된 점만은 부인할 수 없노라고 고백해야겠다."

▲ 류근조 중앙대 명예교수

요즘 인간의 수명이 길어져 흔히들 백세시대 운운하며 눈부신 디지털시대에 살고 있음을 언뜻 자랑스럽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를 마냥 기뻐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인간의 수명 연장이 꼭 디지털의 발달 자체에서 기인한 게 아니고 그간 오랜 시간에 걸친 과학의 일방적 亢進이 가져온 積弊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과학의 이 일방항진 외에도 시적 삶이 있음을 안다면, 우리의 삶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故박용철 시인이 생전에 어떤 글에서 말했던 것처럼 書道의 대예술가가 그 생의 절정에 이르렀을 때에 한 번 붓을 들어서 쓸 수 있다는 괴석같이 뭉치고 범같이 쭈그린 한 字에도 깃들인다는 깊은 秘意의 그런 서도에 대해선 까맣게 모른다. 그렇지만 가끔은 묵향이 좋아 화선지 위에 붓을 들어 무언가 써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그것은 내게 무슨 특별히 타고난 예의 선비적 풍도가 있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自選 육필시편들이란 것도 처음에는 무료를 달래기 위해 시도해 본 것으로 사실 어디에다 내놓을 만한 것엔 미치지 못 하는 것인 줄은 내 자신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잊힌 채 시집 속에 갇혀 있던 시들 중에 더러 마음에 와 닿는 작품들을 꺼내어 수시로 서툰 글씨일망정 심혈을 기울여 써 오는 동안, 감히 나 자신 觀照의 경지에까지 다다를 수 있었노라고 말할 수 없을지는 몰라도 제법 마음의 평정과 평상심을 되찾을 수 있게 된 점만은 부인할 수 없노라고 고백해야겠다.

운명론적 차원에서도 미흡한 본연의 모습 그대로 여기한 데 모아 묶어 본, 어찌 생각하면 내 혈육과 같은 이 자선 육필시편들은 아직까지 내 안에 살아남아 오랜 세월 세상의 험한 풍랑 속을 자맥질하며 나와 함께 내 운명을 살아낸 분신들이라 할 수도 있는 바, 누가 뭐라 해도 나의 정체성인 抒情的自我임엔 틀림없으리라.

이 서정적 자아란 반드시 개인적 체험이 모티브로 작용한 리리시즘(lyricism)적 작품들만이 아니라, 대사회적 체험이 전제된 세태 풍자적이며 문명 비평적인 작품을 비롯해서 명상적인 체험은 물론, 에코토피아(eco-topia)를 지향하는 생태학적 작품에 이르기까지 지금껏 나만의 시의 花園에서 한 사람의 원예사로서 가꿔온 갖기 다른 색깔과 향기 그리고 다른 형태의 꽃 모두를 아우른 그 총칭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하지만 나 또한 목숨을 지닌 가변적 생명체로서 그때 그때 살아 온 시대환경으로서의 시공까지를 초월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들 시편들을 각기 다른 기상조건 속에서 스스로 애써 가꿔 온, 여러 가지 빛깔과 형상을 지닌 파란 꽃, 빨간 꽃, 흰 꽃 혹시는 험상궂게 생긴 毒栮에 굳이 비유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언어로서의 서정적 형상화면에서 문학적 완성도가 전제된 경우라면 동일 작품이라 해도 모든 문학작품은 본질적으로 유기체적 動的構造를 지닌 살아 있는 의미체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시대에 따라 그 의미는 다르게 파악되고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인데, 과연 非문학인이나 획일적인 사고 패턴을 가진 사람들에게까지 아주 중요한 관건으로서 이 말이 이해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어떤 시대나 어떤 경우에도 우리가 거시적이고 대국적인 성찰적 차원에서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 앞으로 인공지능이 우수한 사이보그나 로봇이 발명된다 해도 인간적인, 바로 이 인간적인, 이를테면 有限者로서의 인간만이 지닌 생명체의 기능을 이들이 모두 대신할 수 없다는, 이 명약관화하면서 명징하기 이를 데 없는 엄연한 사실과 진실 그 자체다.

내년 등단 50주년을 맞아 새삼 필자는 그 시도 자체가 엉뚱하다고 할 수 있는, 이런 非活字的이라고 할까 복고적인 졸시집 출간을 계획해 출간 직전의 편집 완료 상태에 있는데 이 같은 작업이 과연 얼마나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지 궁금한 것 또한 솔직한 심정이다.

류근조 중앙대 명예교수·국어국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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