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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와 ‘교양’
‘캠퍼스’와 ‘교양’
  • 박홍규/편집위원
  • 승인 2002.1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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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최근 서울대 총장이 몇 년 전의 우조교 사건을 들먹여 말썽이 일었다. 그 직전에 번역된 슈바니츠의 소설 ‘캠퍼스’는 몇 년 전 독일에서 나온 것으로, 55세의 대학교수가 자신이 근무하는 대학을 실명으로 사용해 그곳 교수와 제자의 성관계를 교수들이 제멋대로 각색해 암투를 버리는 것을 폭로해 베스트셀러가 됐다. 그러나 성관계 묘사는 전혀 없으니, ‘즐거운 사라’와는 판연히 다르다.

독일에서 그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된 이유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대학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좌파 교수들에 대한 엄청난 비판도 그 이유 중 하나였으리라. 반면 좌파가 거의 없는, 특히 여성 좌파가 거의 없는 우리 대학에서 그 소설이 번역된 지 열흘 정도만에 2쇄를 찍을 정도였다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혹여 우리 독자들도 저 박홍 전 총장 식의 대학관에 젖어 우리 대학도 슈바니츠가 보는 독일 대학처럼 좌파 교수들이 망치고 있다고 생각한 탓일까. 3만 명이 넘는다는 교수들 중에 교수노조원은 1천명도 안 돼 그 조직률이 세계 최저인 3% 미만인데도 말이다. 물론 나머지 97% 교수가 모두 박홍 총장이 바라는 교수는 아니었기에 박홍씨는 그렇게도 개탄했겠지만.

어쩌면 슈바니츠가 지난 해에 쌓은 교양인이나 남자로서의 명성도 ‘캠퍼스’를 베스트셀러로 만든 이유의 하나인지 모른다. 번역된 지 8개월만에 그의 ‘교양’이란 책이 33쇄나 찍었고, 최근에 나온 ‘남자’도 이미 베스트셀러다. 독자의 대부분이 논술시험을 준비하는 고교생들이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인류의 교양을 97% 이상으로 바겐세일한 그런 책들이 학생들이나 교수들의 빈약한 서재에서도 유일한 교양서로 군림하게 했다.
어쩌면 우리 대학의 교양교육도 슈바니츠가 바겐세일한 지극히 보수적인 독일식 교양을 모방한 것이어서 그럴까. 현실과 무관한 인문학 중심의 독일식 교양주의란 것이 나치스를 낳았다는 역사의 교훈을 무시하고 다시 그것을 강조하며 좌파를 비난하는 슈바니츠의 태도는 대단히 위험한 것인데도, 그 책의 해설이나 추천사에는 그런 이야기가 하나도 없어서 유감이다.

슈바니츠의 ‘교양’에서 유일하게 흥미로운 부분은 10쪽에 걸친 ‘사람이 알아서는 안 되는 것’으로 설명된 TV, 잡지, 축구였다. 따라서 슈바니츠에 의하면 TV나 잡지에 나오는 경우는 물론이고, 지난 번 월드컵에서 온갖 지적 입방아를 찧은 교수니 작가니 하는 이들은 교양인은 커녕 사람도 아니다. 물론 슈바니츠는 축구만이 아니라 스포츠 전부를 말했으리라. TV, 잡지, 스포츠에 젖은 학생이나 교수가 베스트셀러 ‘교양’이라도 사서 서재에 꽂아두는 것만도 고맙다고 해야할까.

박홍규/편집위원·영남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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