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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표절’ 파파라치 활개 … 학계가 나서라
‘논문표절’ 파파라치 활개 … 학계가 나서라
  • 최성욱 기자
  • 승인 2015.07.07 1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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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 논문표절 사냥꾼에 포위된 아카데미

10년쯤 전의 일이다. 싸이월드를 비롯한 인터넷 개인커뮤니티가 활성화 되기 시작할 무렵, 이미지 무단도용에 따른 지적재산권 문제가 불거졌다. 흥미로운 사실은 원저작자가 문제를 제기한 게 아니라 지적재산권 소송을 담당하던 개인변호사들이 직접 나섰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커뮤니티를 꾸미고, 글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이미지를 가져다 썼다. 비영리행위였다고 해도, 현행법상 명백한 불법행위였던 것이다.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일부 변호사들은 수임이 줄어들자 자구책의 일환으로 지적재산권 침해사례를 찾아나섰다. 이 과정에서 합의금의 ‘시장가격’도 매겨졌다. 미성년자일 경우 합의금 할인혜택(?)을 부여하는 등 온갖 촌극이 빚어졌다. 당시 인터넷 유저들은 ‘지적재산권 사냥꾼’에 걸려들지 않으려고 사진을 비공개로 전환하거나 계정 자체를 폐쇄하기도 했다.

인터넷 시대를 맞아 ‘지적재산권 침해’논란이 불거졌고 한쪽에선 카피레프트운동(지적재산권 공유)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당시 사냥꾼들의 눈엔 대다수의 인터넷 유저들이 그저 무분별하게 지적재산권을 침해하는 ‘범법자’ 즉 먹잇감일 뿐이었다. 이들은 인터넷 유저들이 법의 경계를 넘었느냐, 넘지 않았느냐만 보일 뿐 ‘인터넷상 지적재산권 분쟁’과 같은 딜레마에는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10여년 후, 인터넷 커뮤니티가 시들한 틈에 SNS 시대가 도래했다. 이제 SNS의 파급력은 웬만한 언론사의 영향력보다 커졌다. 개인의 부정이나 치부를 슬쩍 던져놓기만 해도 사람들이 물어뜯으니, 누군가를 음해하려는 도구로 얼마나 간편한가. 사냥꾼들이 먹잇감을 두고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이제 이런 신종 사냥꾼들은 SNS 유저들을 사냥개로 활용하는 전략을 펴고 있다.

사냥꾼들은 대학가에도 발을 들였다. 스스로 ‘국내 유일의 연구부정행위 검증전문기관’이라는 간판을 내건 ‘연구진실성검증센터’(이하센터)다. 이 센터는 개그맨 김미화씨, 조국 서울대 교수, 이재명 성남시장 등 야권 성향의 이슈메이커들을 솎아내 학위논문 표절심사를 자체적으로 해왔다.

야권 성향의 유명인사가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 앞뒤 맥락없이 논문표절검색기를 돌려서 다른 논문과 일치하는 단어와 문장을 찾아냈다. 여기에 인용표시가 없으면 단박에 표절이라고 단정지었다. 이와 관련한 보도자료는 곧바로 한 인터넷 매체로 보내졌다. 이 매체는 초창기 센터에서 운영진으로 함께 이름을 올렸던 ㅂ씨가 운영하는 곳이다. 매체는 논문표절 외에도 당사자들의 사회적 발언, 대외활동까지 거론하며 당사자의 비윤리성을 극대화하는 기사를 만들어냈다.

센터는 이런 방식으로 지난달 23일 서울대 연구진실성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이준구 서울대 명예교수의 프린스턴대 박사학위 논문도 걸고 넘어졌다. 센터로부터 관련 내용을 메일로 받은 이 교수는 “박사논문의 도입부에 해당하는 기존연구의 리뷰, 리터러처 서베이(literature survey) 부분이 시비의 대상이 됐다”며 “A라는 사람이 어떤 연구결과를 냈고, B라는 사람이 어땠는지 설명하는 도입부에서 인용표시(따옴표)를 하지 않았다는 게 어떻게 표절인가”라고 반박했다. 이 교수는 “이와 비슷한, 사소한 인용사례 7개를 찾아놓고 무슨 큰 일이라도 난 것처럼 소란을 떤다. 무언가 악의가 느껴졌다”라고 전했다.

이 교수 건보다 앞선 지난달 17일, 이 센터는 충주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김영호 한국교통대 총장의 박사학위 논문이 표절이란 것이다. 김 총장의 논문 111쪽 중 45%에 달하는 50쪽이 다른 논문을 베껴썼다는 것이다. 이 같은 내용을 접한 김 총장은 연합뉴스와 인터뷰에서 “학교 구조조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불만을 가진 일부 구성원들에 의해 이뤄진 것”이라고 또다른 의혹으로 맞받아쳤다. 김 총장은 행정안전부 차관 출신으로 지난해 2월 부임했다.

마구잡이식 표절 검증·언론플레이…의도적으로 놓은 ‘덫’

분야마다 논문작성 기준이 다른 것을 전혀 감안하지 않고 기계적으로(실제로 기계로) 평가해 표절혐의를 뒤집어 씌운 것이다. 논문표절 문제를 이처럼 마구잡이식으로 접근한다면 이 교수의 말마따나 노벨상 수상자를 비롯해 국내외 경제학자들 중 (표절의혹에서) 살아남을 사람이 거의 없을지도 모른다. 또한 센터의 기준을 보수성향 중진학자들에게 적용했을 때, 그들은 과연 떳떳할 수 있을까.

학계의 검증을 무시한 채 표절검색기에 의존한 논문표절검증을 문제삼지 않는다고 해도, 특정인을 음해하려는 정치적 목적으로 이뤄지는 시도는 지양돼야한다. 게다가 이들은 이런 방식으로 특정인들의 논문표절 의혹을 툭툭 던지고 상대가 소송을 걸어주길 기다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본인들이 유리한 쪽으로 논의를 끌고 가려는 것이다. 이 같은 정황은 실제로 이번 이준구 교수 건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 연구진실성검증센터는 트위터를 통해 "이준구 교수가 표절 혐의를 정면부정하며 소송을 걸어오면 승패 관계없이 3심만 가줘도 2천만원 공탁 형식으로 지급하기로 했다"거나 "외신을 통해 프린스턴대에 제보하고 보도도 나가게 하는 방안을 강구해보겠다"는 내용을 공개적으로 올리고 있다.
지난달 26일 센터는 트위터에서 “외신을 통해 프린스턴대에 제보하고 보도도 나가게 하는 방안을 강구해 보겠습니다. 세계 10위권 국가대표 대학의 연구진실성위원장 논문 표절 문제니 관심가질 외신이 있겠죠”라는 글을 버젓이 올려두었다.

이것도 모자라 “이 교수가 허위성을 해명하는 것도 기사 가치가 있어요”라는 말도 덧붙였다. 외신을 이용해 ‘언론플레이’를 하겠다는 입장을 대외적으로 공표한 셈이다. 이 교수를 자극해 소송으로 유인하는 수법이다.

실제로 같은 날 센터는 트위터에 “이준구 교수가 빨리 소송을 걸어줘야 매우 좋지만 역대 경험상 공갈포로 끝날 공산이 커서 그냥 이쪽에서 더 선도적으로 드라이브를 걸어 문제를 명확하게 결판짓는 게 좋을 것 같다”며 가감없이 속내를 드러냈다.

다음날인 27일 이 교수는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센터를 상대로 법적 절차(허위사실 유포에 따른 명예훼손)를 밟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처럼 학계 바깥에서 온 ‘사냥꾼’에게 단순히 논문표절검색기 하나로 포박당하는 상황이 반복되는 덴 학계의 책임이 크다. 논문표절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부상할 때마다 소극적으로 대응해 왔을 뿐 근본적인 문제를 풀려는 노력이 뒤따르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씁쓸한 일이지만, 논문 인용방식 등과 관련, 전후 대학 1·2세대의 일부 원로교수들은 취재과정에서 상당부분 표절혐의를 인정할 때가 있었다. 한 원로교수는 “서툴렀던 탓이지만, 초창기엔 인용 위주의 논문쓰기가 당대의 연구방식이었다”고 말했다. 연구윤리가 강화된 지금의 표절기준을 기계적으로 적용하면 국내 학자들의 상당수 선행연구가 표절 의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란 말이다.

지적재산권 사냥꾼들이 활개를 칠 때, 인터넷 유저들은 스스로 출처를 달거나 게시물을 삭제하는 등 즉각 대응했다. 학계는 일부교수에게 닥친 해프닝이라고 뒷짐지고 있을 게 아니라 논문표절 사냥꾼에 대응할 방안을 적극적으로 모색해야할 때다. 수십년을 공들여 연구한 논문이 표절검색기 하나로 손쉽게 사냥꾼의 먹잇감이 되고 있다.

최성욱 기자 cheetah@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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