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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 일본문학
한국문학 일본문학
  • 방민호 편집기획위원/ 서울대·국어국문학과
  • 승인 2015.07.06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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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방민호 편집기획위원/ 서울대·국어국문학과

▲ 방민호 편집기획위원
일본 도쿄 역에서 북쪽 출입구 쪽으로 나가면 마루젠 빌딩이 보인다. 멋진 공간이다. 일본의 책 문화를 전부는 아니어도 상당부분 반영하는 곳이다.

1층부터 4층까지였던가? 기억이 분명찮은데, 아무튼 여러 층에 걸쳐 책들이 무수히 꽂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수험생들 책부터 2층으로 가면 각종 문예서들이 꽂혀 있는데, 그 양이 실로 방대하다.

일본은 화폐에 근대 문학인 한 사람은 꼭 넣어 준다고 하고 지금도 여성작가 히구치 이치요의 얼굴이 지폐에 들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만큼 문예·문학을 존중해 주는 것인데, 이는 일본의 오랜 전통이자 지금도 나날이 새롭게 갱신되고 있는 전통이기도 하다.

나쓰메 소세키부터 요즘 신경숙 씨 표절로 부각된 미시마 유키오, 1990년 전후 한국 소설 시장에 군림해 온 무라카미 하루키, 그리고 재일 한국인 2세 작가 유미리 등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게는 작가다운 연마와 신념, 또는 자기 길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을 가리켜 작가의 자기 사상이라고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란 바로 그 자기 사상의 담지자다. 패전후에 타락론과 소설 백치를 써서 일약 당대 유행 작가가 된 사카구치 안고도, 신조사에서 나온 작가 앨범을 보니, 자기 사상을 확립하기까지 꽤 긴 수련의 시간을 거쳤으며, 가와바타 야스나리, 다니자키 준이치로, 오에 겐자부로 같은 작가들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런 일본 근대문학 풍경을 슬쩍 넘겨보다 보면 우리 문학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한편으로는 작가나 비평가 숫자도 적지만 그 치열성에서 뭔가 부족하지 않나 생각될 때가 있다. 크면 큰대로 작으면 작은 대로 그 자신만이 쌓을 수 있는 '에고'의 성채를 구축하는데 어딘가 철저성이 부족한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런 것을 이 동시대의 문학에서도 절감할 수 있다.  워낙 서양 사상 수입이 활발하고 모방과 적용에 능하다 보니 지금도 일본에서는 수없이 많은 서양 번역과 변용들이 이루어진다. 도쿄역 앞의 마루젠이나 간다의 삼성당, 이와나미 같은 곳에 가면 숨돌릴 사이 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수입과 번역과 적용, 재창조의 현장을 목도할 수 있다.

문제는 우리다. 일본에서 적당히 번역, 변용시킨 것들을 우리 학자들은 너무나 허술하게, 이렇다 할 성찰이나 자각없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자기 것인 양 하는 것을 한두번 보게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일본판 포스트콜로니얼리즘의 '복사'는 어떠한가. 일본에서 그들이 포스트콜로니얼리즘적 연구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 실상은 자신들의 지배를 받았던 사회들에서 이루어진 일본어문학이나 체제협력 문학의 의미나 가치를 따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에게 들어와서도 그대로 통용되곤 한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포스트 식민주의가 아니라 '계속' 식민주의 또는 제국주의 시각의 내면화에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고 무엇일까.

여기에는 그야말로 자기라는 게 없다. 있다 해도 가난하고 불쌍한 자기일 뿐이다. 이른바 사상의 값싼 수입은 모방 또는 표절에 그치지 않고, 자기 망실을 낳고야 마는 것을 지난 십 년 이상의 일본 문학이론 수입사는 입증하고도 남는다.

신경숙 씨의 미시마 유키오 표절 문제는 그러니까 지식인계, 국문학계에서 광범위하게 이루어져 온 사상 모방과 '표절'의 작가판, 문단판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미시마 유키오의 소설 『우국』이 그의 문학적 행로의 어느 대목에, 어떤 위상을 지니며 존재하는가를 알았다면 그와 같은 표절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미학적으로 포장되었다 해도 사상의 국수주의나 극우적 발상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것을 가져다 써야 했다면 패러디나, 거기까지 못 미쳐도 번안 의식 정도는 작용하는 행위가 되지 않을 수 없을 텐데, 그렇지 않은 수용을 우리 독자 시장이 허용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경숙 씨는 『우국』이 어떤 작품인지, 그런 행위가 한국문학과 일본문학의 관계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게 되는지 알고 있었던 것 같지 않다. 겉핥기 모방이나 표절이라는 비난을 들어도 감수할 수밖에 없을 괴로운 장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가 보기에 지금 문제는 이와 같은 자기 상실이 어느 한 사람에 국한되지 않는다. 누군가 남몰래 수입하는 동안에 누군가는 공공연히 들여오기도 하고, 그러는 사이에 한국문학은 자기가 뭔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모르는 좌표 상실에 빠져버리고 있다. 작가는 장사도 해야 하지만 장삿꾼 이전에 자기사상을 가진 이어야 하는데 지금 한국문단에 그런 기대주는 극히 드물다.

가뜩이나 한일 관계가 심각한 때다. 한류는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일본에서는 지금 세월호 참사에 메르스 문제까지 겹쳐 한국이 별 것 아니라는 시각이 확산되는 중이다. 여기에 외신으로 전해진 신경숙 씨 표절 문제는 한국을 비웃음의 대상으로 치부하려는 이들에게 좋은 땔감을 제공하고 있는 모양이다.

당분간 일본에서 신경숙 씨 소설은 물론이고 다른 작가들의 소설도 번역 소개되기는 어려울 것이라 한다. 하지만 이것은 눈에 보이는 타격이고 손해라면 손해다. 사태가 명백하므로 오히려 이를 우리 문학과 문학연구 체질의 변화의 계기로 삼을 필요가 있다.

일제시대 같이 힘겨운 시대에도 우리 작가들, 비평가들은 자기를 잃어버리지 않고 새롭게 창조하려 애쓴 역사를 보여주었다. 이 과거를, 전통을 잊거나 잃어버리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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