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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페샤와르 바자르 골목에서 만난 어떤 이야기꾼의 노래
파키스탄 페샤와르 바자르 골목에서 만난 어떤 이야기꾼의 노래
  • 교수신문
  • 승인 2015.06.30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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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_ 42.중앙아시아 초원을 넘어 유럽으로: 스토리텔링으로 전해지는 유목민의 역사

▲ 인도 펀잡 지방 이야기꾼의 무대 공연 나칼 샤일리(Naqal Shaili)사진 출처: http://www.punjabheritage.in/event/naqal-shaili/

유목민족 키르기즈에게 전설적 영웅 마나스가 있고, 그의 영웅담을 노래하는 마나스치가 있듯이, 중앙아시아의 다른 민족들에게도 저마다의 이야기를 독특한 방식으로 전하는 이야기꾼이나 음유시인이 있다. 나는 파키스탄 페샤와르 바자르 골목 한 모퉁이에서 자신들의 화려했던 역사와 위대한 왕들의 업적을 열정적으로 칭송하는 이야기꾼과 그를 경청하는 순박한 주민들을 본 적이 있다.


Nessun dorma 아무도 잠들지 말라
Nessun dorma 아무도 잠들지 말라
Tu pure, o, Principessa 당신도, 공주여
nella tua fedda stanza, 당신의 차가운 방에서
guardi le stelle 별을 바라보네.
che fremono 사랑으로 떨고
e di speranza 희망으로 떠네.
Ma il mio mistero e chiuso in me 하지만 나의 비밀은 내게 있으니
il nome mio nessun sapra 아무도 나의 이름을 모르네
No, no sulla tua bocca lo diro 아니, 아니, 내 입으로 당신에게 말하게 되리
quando la luce splendera 빛으로 환해질 때에
Ed il mio bacio sciogliera il silenzio 내 키스는 고요함을 깨뜨리고
che ti fe mia 당신을 내 것으로 만들리
Dilegua, o notte 사라져라, 밤이여
Tramontate, stelle 희미해져라, 별이여
Tramontate, stelle 희미해져라, 별이여
All'alba vincero 새벽이 되면 나는 이기리
vincero, vincero. 이기리, 이기리.


유라시아의 동쪽에서 서쪽으로의 민족 혹은 종족 대이동은 일회적이 아니라 연속해서 이뤄졌다. 돌이켜보면 흉노에 패한 월지의 서천을 시작으로 한 두세기에 한 번 꼴로 연쇄적인 대규모의 종족 이동이 발생했다. 기련산맥을 주 활동무대로 하던 월지의 뒤를 이어 흉노도 내분이 생기면서 질지선우가 이끄는 이른바 서흉노 세력이 몽골초원을 벗어나 중앙아시아 탈라스 평원으로 이주해와 康居 땅 일부를 차지했다. 이들 기마유목민 집단이 훈(Hun) 혹은 훈니(Hunni) 혹은 훈나(Hunna)라는 이름으로 유럽에 알려지면서 판노니아 평원의 주인이 됐다가 5세기 중반 이후 홀연히 모습을 감춘 뒤에도 이동의 물결은 계속해 이어졌다.
돌궐(투르크)에 밀린 유연(柔然)이, 이어서 唐과 설연타(薛延陀)의 연합세력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은 돌궐이,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멸망 후 카라 키타이(Kara Kitai: ‘검은 거란’이란 뜻으로 중국식 국호로는 西遼를 가리킴)가 차례로 중앙아시아로 이동해와 그곳을 새로운 거점으로 삼았다. 이번 글에서는 역사속의 浮沈을 이야기 하는 가운데 인간의 변절과 배신에 대해, 중앙아시아를 주름잡았던 유목민의 독특한 풍습에 관해 거론하고자 한다. 옳고 그름이나 미추의 판단은 전적으로 독자들의 몫이다.


4세기 중반(360년경) 볼가江 하류를 건넌 정체불명의 아시아계 유목민족은 곧 이어 발람베르(Balamber of the Huns, King of the Huns, 345~378년)의 지휘 아래 돈江을 건너 그 서안에 모습을 드러냈다.
발람베르에게는 투란비카(Turanbika: ‘Tur의 땅’ 즉 중앙아시아 Turan 출신의 Bika)와 고트족 출신의 와다메르카(Wadamerca)라는 두 명의 왕후가 있었다. Turan이라는 말이 친숙한 것은 아리아 「네쑨 도르마(Nessun Dorma, 아무도 잠들지 말라)」로 유명한 푸치니의 미완성 오페라 「투란도트(Turandot)」와 무려 280여 편의 긴 이야기 모음집 『千一夜話(The Arabian Nights; One Thousand and One Nights)』 중 ‘세 가지 수수께끼’편에 나오는 타타르(Tatar) 공주의 이름 Turandot 때문이다. 성인이 돼 다시 읽을 책으로 『아라비안나이트』가 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의 관점에서 아주 바람직하다. 오리엔탈리즘과 관련해서는 오페라 「투란도트」와 「나비 부인」이 적합하다.


기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오래 전 읽어 기억을 떠올리기 쉽지 않지만 『천일야화』의 여주인공에 대해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자랑 김연아가 림스키 코르사코프의 1888년 교향곡 「세헤라자데」의 선율에 맞춰 환상적인 스케이팅 연기를 선보였을 때 전 국민은 물론 전 세계가 그녀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었다. 「세헤라자데」는 『천일야화』에 기반한 오케스트라 곡으로 유려하고 색채감이 풍부한 오케스트레이션과 니콜라이(림스키 코르사코프)의 동양에 대한 지극한 관심이 결합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때는 알렉산더 보로딘이 1887년 겨울 미완성 유작 「이고르 공」을 완성해 나가던 시점이다.


세헤라자데는 누구인가. 아랍어로는 샤흐라자드(shahrzâd), 터키어로는 셰흐라자트(şehrazat), 영미권에선 셔헤러자-드(Scheherazade, /ʃəˌherəˈzɑːd/), 한국에서는 셰헤라자드로 알려져 있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스토리텔러가 그녀다. 『천일야화』는 『아라비안나이트』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원조는 6세기 무렵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만들어진 『헤자르 아프산(Hazār Afsān. 천 가지 이야기)』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책이 8세기에 아랍어로 번역됐고, 그 후 압바시드 왕조 이슬람 제국의 새로운 수도 바그다드와 카이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추가되고 다듬어진 결과 『천일야화』가 탄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원본에 충실하자면 『아라비안나이트』보다는 『페르시안 나이트』 라고 해야 옳다.


잘 알려져 있듯 줄거리는 이렇다. 사산왕조의 왕 샤흐리야르(Shahryar)는 자신의 왕비가 흑인 노예와 통정하고 있는 현장을 목격한다. 배신감에 치를 떤 왕은 매일 새로운 처녀를 왕비로 맞아 동침하고 다음날 아침이면 죽이기를 반복한다. 그러던 어느 날 대신의 용감한 딸 세헤라자데가 자청해 왕의 침소에 들고는 왕이 솔깃해 할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음이 궁금한 왕은 그녀를 살려두고 계속해 이야기를 듣다보니 1천하고도 1일 밤이 지난다. 그동안 그녀가 왕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무려 280여 편. 그녀 덕택에 수많은 처녀들이 죽음을 모면하고 왕도 구원받게 된 셈이다.


스토리텔링의 역사는 이렇듯 길다. 페르시아에서 ‘아리안족의 나라’라는 의미의 ‘이란(Iran)’으로 이름을 바꾼 이 나라에서는 ‘나깔리(na’aqali)’라 불리는 스토리텔링이 예술의 한 장르로 여겨진다. 그리고 바자르(전통시장) 등 사람 왕래가 많은 곳 어디선가 이야기꾼이 자신의 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독특한 이야기 방식으로 전승하고 있다. 페르시아의 귀중한 언어 유산이자 대표적 영웅 서사시인 『샤흐나메(Shahnameh or Shahnama. 帝王의 書)』에 고르다파리드(Gordafarid)라는 여걸이 등장한다. 투란의 장군 소흐랍(Sohrab)과 맞서 싸운 장본인이다. 그녀는 이란 여성들에게 지혜와 용기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오늘날 그녀를 이야기하는 여성 이야기꾼이 있다. 이란에서 고르다파리드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파티마 하비비자드((Fā.timah Habibizad)가 바로 그 사람으로, 그녀는 가히 21세기의 세헤라자데라 할 수 있다.

한편 타지예(Taziyeh)라고도 하는 이란의 독특한 스토리텔링 유형이 있다. ‘위안(comfort)’이라는 의미의 이 명칭은 ‘애도(mourning)’라는 뜻을 갖는 aza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지역과 시간, 종교 등에 따라 타지예는 서로 다른 문화적 의미와 관습을 드러낸다. 이란의 시아파 무슬림들에게 타지예는 핫산(Hassan)과 동생 후세인(Hussein)의 비극적 운명을 전하는 열정의 연극과도 같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하마드의 사촌이자 딸 파티마와 결혼해 사위가 된 알리(Ali)가 장인이자 사촌인 무하마드 사후 최초의 이맘(Imam)이라고 여기는 것이 이슬람 시아파다. 한편 순니파는 알리를 4번째이자 마지막 라쉬둔(Rashidun, 정통 칼리프)으로 간주한다. 이런 이견이 무슬림 공동체인 움마(Ummah)를 순니(Sunni)와 시아(Shi'i)의 두 파로 분열시켰다. 3대 칼리프 우스만(Uthman)이 살해된 후 그를 계승해 4대 칼리프가 된 무하마드의 사위 알리는 이라크에 있는 쿠파(Kufa) 대사원에서 기도를 드리던 중 아부드 알 라흐만 이븐 물리잠(Abd-al-Rahman ibn Mulijam)을 필두로 한 하리짓(kharijites. 아랍어로는 khawarij)의 급습을 받고 며칠 후 사망한다. ‘떠나간 사람들’이라는 뜻을 지닌 ‘하리짓’이라는 명칭은 ‘폭동(revolt)’ 혹은 ‘반란(insurrection)’을 뜻하는 아랍어 ‘후루지(khuruj)’에서 비롯됐는데, 원래 알리의 권위를 지지하다가 나중에 그의 리더십에 반발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요즘의 극단적 이슬람 테러리스트 집단 IS와 흡사한 조직이다.

 

▲ 키르기즈 민족 영웅 마나스의 영웅적 삶을 칭송하는 마나스치들의 모습

결국 알리도 비극적 죽임을 당하고, 그의 아들 핫산이 시아파 2대 이맘이자 순니파 5대 칼리프가 된다. 하지만 그는 6~7개월 후 퇴위하고 그 자리는 무아위야(Muawiyah)가 이어받아 우마이야 왕조 최초의 칼리프로 등극한다. 마지못해 이슬람 최고의 자리에서 물러난 핫산은 마흔다섯 살이 된 670년 봄 메디나에서 세상을 하직한다. 아무리 믿을 사람 없기로서니 설마 그럴 일은 없을 줄 알았을 것이다. 둘이 무슨 사이인지는 모르나 그의 아내 자다(Ja'da)가 칼리프가 된 무아위야의 사주를 받고 남편을 독살한 것이다. 시아파 무슬림들에게는 원통한 일이다. 그래서 그와 그의 동생 후세인을 기리는 ‘아슈라(Ashura) 축제’는 애도의 場이며, 축제 기간 동안 그의 영웅적 행위와 고매한 인품이 비장한 스토리텔링으로 대중들에게 전해진다.
유목민족 키르기즈에게 전설적 영웅 마나스가 있고, 그의 영웅담을 노래하는 마나스치가 있듯이, 중앙아시아의 다른 민족들에게도 저마다의 이야기를 독특한 방식으로 전하는 이야기꾼이나 음유시인이 있다. 나는 파키스탄 페샤와르 바자르 골목 한 모퉁이에서 자신들의 화려했던 역사와 위대한 왕들의 업적을 열정적으로 칭송하는 이야기꾼과 그를 경청하는 순박한 주민들을 본 적이 있다.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아프가니스탄은 물론 중동의 시리아, 이집트, 터키, 요르단, 레바논 같은 나라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인도 펀잡과 우타르 프라데시 주에서는 나칼 샤일리(Naqal Shaili)라고 하는 상당 부분 아랍의 영향을 연극 형식의 스토리텔링을 접할 수 있다.


다시 볼가강과 돈강을 건너 유럽으로 들어온 동방의 유목민족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들이 돈강 서안에 출현한 시점으로부터 약 100년에 걸쳐 이들 기마 유목민은 유럽을 종횡무진 누비며 고대 문명을 거의 폐허로 만들었다. 이들은 누구며 어디에 터전을 잡았는가. 바로 훈족이다. 그리고 이들은 오늘날 러시아 남부 북 코카서스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이들이 내습하기 전 여기 쿠반江(the Kuban)과 테렉江(the Terek) 유역에는 이미 알란족(the Alans)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알란족은 흉노에 패해 일리초원으로 이주해 갔던 월지를 다시 몰아낸 오손인의 후예로 알려진 종족이다.
다시 말해 후일 흉노에게 공격당한 오손인 일부가 서쪽으로 도망쳐 일부는 쿠반강과 테렉강 유역에 정착했는데 이들이 바로 알란족의 조상이다. 고향 떠나 유랑길에 오른 오손인 즉 알란인 일부는 게르만족이 사는 땅 유럽으로 들어갔다. 이들은 훗날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이라는 큰 물살에 휩쓸려 406년 반달족(the Vandals), 수에비족(the Suebi)과 함께 라인강을 건너 오를레앙과 발렌체에 터전을 마련했다가 다시 409년 유럽 서남쪽으로 이동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오늘날의 이베리아 반도 북동부에 당도했다. 그리고 서로마제국 붕괴 이후 이곳에 먼저 와 자리 잡고 있던 비시고트(the Visigoths) 즉 서고트족과 융합 훗날의 카탈로니아인(Catalonians)이 됐다. 중세의 비잔틴 연대기 작가들은 Catalania(즉 Catalonia)는 Goths와 Alans의 혼성어로 처음에는 Goth-Alania였다고 한다.


알란족 중에는 또 다시 반달족과 더불어 바다를 건너, 정확히는 지브롤터 해협(the Strait of Gibraltar)을 건너 북아프리카에 정착한 집단도 있었다. 한편 훈족의 지배하에 남아있던 코카서스의 오손인인 알란족은 오늘날의 오세티안(Ossetians)의 조상이 됐다. 오세티안(Ossetians)과 오세티아(Ossetia)라는 말은 그루지아인들이 사용하던 명칭 Osi와 Oseti(the land of Osi)에서 파생됐다. 오손인이었던 알란족의 자칭은 As였다. 烏孫의 음차가 As였던 것이다.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사람들은 유랑길에 오른다. 오손족의 일부도 그러했을 것이다. 알타이 산맥 以西 천산산맥 북쪽의 일리 초원과 이식쿨 호수 일대를 주무대로 유목생활을 하던 오손인들 간에도 권력투쟁이나 알력 같은 게 있었을 것이다. 연연(蠕蠕), 흉노 등 외부의 침략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패자는 떠나야 하는 법. 이들의 이동 과정을 짐작케 하는 역사 기록이 있다. 『魏書』 「西域傳」 第90 烏孫國條에 그런 내용이 실려 있다.


“(烏孫國 王의) 거처는 적곡성이며 구자의 서북쪽에 있다. 代와는 1만800리 떨어져 있다. 그 나라는 여러 차례 연연의 침입을 받아 서쪽으로 총령의 산 속으로 이주했다. 성곽이 없고 가축을 몰고 물과 풀을 따라다닌다. 태연 3년(437)에 사신 동완 등을 그 나라에 보냈고 그 후로 매번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쳤다.”
몽골 초원을 중심으로 하서회랑과 타림분지 일대 서역 諸國의 맹주 역할을 하던 흉노의 일부 세력도 사정에 따라 서쪽으로 피신을 해야 했다. 『魏書』 「西域傳」 第90 悅般國條는 그런 딱한 사연을 바탕으로 이국땅에 세워진 열반국에 대해 말하고 있다.


“(열반국은) 오손의 서북쪽에 있으며 代와는 1만930리 떨어져 있다. 그 조상은 흉노 북선우의 부락민이었다. 1세기 말 한나라 거기장군(車騎將軍) 두헌(竇憲)에게 쫓겨나 북선우가 金微山(알타이산맥)을 넘어 서쪽에 강거로 도주했을 때, 그 가운데 약해서 가지 못한 사람들이 구자의 북쪽에 남은 것이다. 그 나라는 방이 수 천리에 이르고 무리는 가히 20여 만 명이다. 양주 사람들은 여전히 그 [임금]를 가리켜 ‘선우왕(單于王)’이라고 부른다.”
떠난 사람들에 대한 기사는 또 있다. 『魏書』 「西域傳」 第90 粟特國條가 바로 그것이다. 중앙아시아를 소그디아나(Sogdiana)라고 하는데 속특이 바로 소그드(Sogd)의 음차어다. 도대체 무슨 말일까.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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