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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원칙은 헌법의 근저에 흐르는 원칙
충실한 ‘이해’에 주력했다”
“정의의 원칙은 헌법의 근저에 흐르는 원칙
충실한 ‘이해’에 주력했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06.30 11: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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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정의란 무엇인가』로 ‘정치철학 4부작’ 완성한 이종은 국민대 교수

2010년에 출간한 『정치와 윤리』로 한국정치학회 인재저술상을 수상했다. 내년 2월 정년퇴임이니 올해 64세. 정릉 뒤편 풍광이 한 눈에 들어오는 국민대 북악관 14층에 그의 연구실이 있다.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켄트주립대에서 「플라톤, 홉스 그리고 롤스에 있어서 정치적인 의무라는 개념과 그 개념의 상대성」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종은 국민대 교수다.


그런 이종은 교수가 최근 850쪽 분량의 『사회정의란 무엇인가』(책세상 刊)을 내놨다. 이 책은 그의 저술로 볼 때, 일종의 계보학적 작업이다. 『정치와 윤리: 정치 권력의 도덕적 정당성에 대한 탐구』(2010), 『평등, 자유, 권리』(2011), 『정의에 대하여』(2014)을 출간했으니, 가히 ‘정치철학 4부작’의 완성이라 부를 만하다. 이들 책들은 각각 출판됐지만, 원고뭉치들은 크게 두 덩어리로 일찌감치 준비를 마쳤다. 『정치와 윤리』, 『평등, 자유, 권리』가 하나로, 『정의에 대하여』와 『사회정의란 무엇인가』가 다른 하나로 샴쌍둥이처럼 집필 완료된 것으로, 시기만 바꿔 출간됐다. 책의 성격도 그렇게 맞물려 있다. 햇수로 6년, 그의 이 ‘4부작’은 전체 책 분량으로 2천800쪽, 200자원고지로 셈하면 어림잡아 1만3천장쯤 된다.


2009년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가 국내에 번역되면서, 잠시 열풍이 불었다. 이 교수가 잇달아 책을 낸 것도 이즈음이다. 그러니 그의 출판을 뒤고 ‘샌델의 뒷북 아닌가?’라는 눈총이 붙을 만하지만, 그는 “이미 정의를 주제로 오랫동안 강의를 해왔고, 단행본 출판도 준비하고 있었던 터라, ‘뒷북’은 전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 말이 순수하게 성립하려면 그의 저작들을 훑어보면 된다. 그는 왜 ‘사회정의’ 저술에 이렇게 매달렸을까.


거창한 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14층 연구실에 만난 그가 들려준 대답은 의외였다. 이 교수는 교양교육 문제를 불쑥 꺼냈다. 존 롤스의 정의론을 공부했던 그는 롤스만큼 서양사상사의 주요 배경들에 익숙하지 않다고 고백했다. 근래 한국 대학들이 ‘교양교육’을 강화하는 것을 두고서도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다행이다. 그러나 교양교육은 대학에서 단기로 형성될 수 없다. 중·고등학교에서부터 일찍 교양교육을 시작해야 한다. 대학에서 배운 얕은 교양지식을 품고 유학길에 올라 서구의 것을 공부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라고 말했다. 귀가 솔깃해졌다. “사실 이번 책을 두고서 나만의 고유한 아이디어가 있냐고 묻는다면, 솔직하게 없다고 말할 것이다. 롤스의 정의론이 비록 분량은 많지 않지만, 그 내용은 서양사상의 오랜 축적 속에서 배태된 것이다. 롤스를 정확하게 이해했다고 단언하긴 어렵지만, 최대한 롤스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정리했다고 보면 좋겠다. 롤스 정치사상의 이해와, 그것의 한국적 적용 문제를 조심스럽게 언급한 것이다.”


그는 거듭, 이번 4부작 마침표가 되는 책에 ‘저자의 고유한 목소리’는 없다고 강조했다. “여기저기서 롤스를 인용하지만, 도대체 롤스가 말한 ‘정의’가 뭐며, 나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를 정리해냈다는 설명이다.” 롤스의 폭넓은 사상적 기반을 따라가기 벅찼다고 고백하는 그의 말에는 거품이 없어 보였다. 정의가 시대와 장소, 사람에 따라 변화한다고 정리한 그에게 정년이후 계획을 물었더니 한국의 정치, 권력 문제를 탐구하고 싶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한국정치학’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란 말과 함께.

△ 2010년부터 2015년까지 4권의 묵직한 주제의 책을 냈다. 2010년도 한국정치학회 ‘인재저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연구와 강의에도 바쁠텐데, 어떻게 출판 스케줄을 관리할 수 있었나? 또, 논문중심업적평가제가 이런 저술을 가로막고 있는데, 선생님께는 장애물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 어떤 비결이 있었나?

“1983년의 박사학위 논문의 일부가 존 롤스에 대한 것이었으며 94년에 『정치철학』(까치)을 출간한 이후로 줄곧 정의라는 개념을 주제로 서양사상을 개관하는 책 쓰는 것을 염두에 뒀다.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2001년부터다. 2010년에 『정치와 윤리』라는 책을 출판사 책세상에서 출간했다. 2011년에는 『평등, 자유, 권리』라는 책을 내놨다. 이 책은 2012년에 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어떻게 하다가 보니 정의에 대한 책이 두 권이 돼서 2014년에 『정의에 대하여』라는 책, 그리고 2015년에 『사회정의란 무엇인가』를 발표했다. 모두 같은 출판사에서 출판했다. 이렇게 해서 결국 4부작이 완성됐다.
사실 책 쓰는데 몰두하다보니 업적평가의 중심이 논문이라는 것도 그 와중에 늦게 알게 됐다. 이제 단기적인 업적을 내놔야 연구자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시절이 됐다. 이 제도가 장점도 있겠지만 단점도 없지 않아 있다. 결국 연구자들이 단기적 업적과 장기적 업적을 연결시키는 방법을 스스로 모색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 2010년부터 책을 냈는데, ‘정의로운 사회를 위한 합리적 원칙’을 이토록 끈질기게 모색한 이유가 궁금하다. 2009년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의 책이 번역되면서 ‘정의’ 붐이 일었지만, 이후 우리 사회의 흐름을 보면 정의와는 정반대의 현상들이 속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1980년 5공화국 슬로건이 ‘정의 사회 구현’ 아니었나. 1980년대부터 정의사회 구현하겠다고 했는데, 이게 안됐다는 이야기 아닌가? ‘사회정의’를 강조하는 이유가 뭔가?


“세상이 정의로워서 정의에 대해 생각할 필요조차 없다면, 왜 학자들이 정의에 대한 글을 쓰고 사람들이 ‘사회에 정의가 없다’는 등의 말을 하겠나? 원래 문화가 별로 없는 나라에서 문화를 들먹이고 정의가 별로 실현되지 않은 나라에서 정의실현을 외치게 돼 있다. 정의가 완벽하게 구현된 세상은 있을 수가 없다. 각자에게 마땅한 것을 주는 것이 정의에 대한 개념이라면, 문제는 세상이 바뀌게 됨으로써 마땅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견해가 달라져서 정의에 대한 관념도 바꿔지게 된 거다. 그러므로 이전의 관념으로 정의가 완벽하게 구현됐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관념의 정의가 치고 일어나서 반발하게 마련이다. 그래서 정의라는 것이 항상 문제가 될 수밖에 없다.”

△ 지난해 출간한 『정의에 대하여』에서 선생님은 ‘정의의 관점은 시대, 장소, 사람에 따라서 계속 바뀌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이번 『사회정의란 무엇인가』 책 제목처럼, 우리 사회에서 ‘사회정의’를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은 정의에 대한 관념이 달라진다는 의미다. 원래 정의는 ‘눈 하나에는 눈 하나로’라는 말에서 나타나듯이 개인 간에 적절하게 보복하는 것을 의미했다. 사회 정의라는 것은 산업혁명 이후로 분업에 의해 생산량이 증가했는데, 이 과정에서 어느 누가 굶주리는 경우에 생겨난 정의에 대한 관념이다. 말하자면, 개인 간에는 눈 하나에 눈 하나로 정확하게 기여한 바와 책임 소재를 따질 수가 있지만, 산업 사회에서는 기여한 바와 책임 소재를 정확하게 따질 수가 없게 돼 나타난 관념이랄 수 있다. 그래서 사회 정의란 개인 간이 아니라 사회 전체 구성원들의 협업에 의한 부담과 혜택을 사회 전체의 맥락에서 따지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한국 사회에서의 사회 정의는 참으로 논하기가 어렵다. 오늘날 우리가 사회라는 말도 흔히 쓰고 사회 정의라는 말도 외치고 있지만, 원래 사회라는 말 자체가 동양에서는 없었다. 일본인들이 번역한 말이다. 말하자면, 평등한 자들이 협업하는 인간의 모임이라는 의미의 사회는 동아시아에서는 그 실체가 희박했다. 공동체는 있었다고 하더라도 사회라는 개념은 희박했다고 볼 수 있다.
원래 사회라는 말은 다음과 같이 시작됐다. ‘뽕나무는 神木으로서 社木이 되므로 桑林 속에 토신인 壇인 社를 조성해 사목인 뽕나무를 심었다. 삼월 삼짇날엔 社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 곳에서 모임(會)을 열었다. 社會라는 말이 여기에서 시작된다.’ 이렇게 보면, 서양 의미의 사회와는 관계가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사회라는 실체가 한국인의 의식과 행동에 굳어져 있지 않는데 어떠한 관념의 정의이든 정의를 구현하기란 어렵지 않겠나? 한국 사회에서 지연이나 혈연의 병폐를 논하는데 이 두 용어는 모두 공동체와 연관된다. 더 나아가서 지역주의라는 말은 이 맥락에서 보면 비슷하다. 한국 사회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지연, 혈연 그리고 지역주의라는 말은 결국 정의나 공동선을 구현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 정의나 공동선을 구현하기 어렵다고 해도, ‘사회정의’의 실현을 지향하는 게 사회 아닌가. 어떤 접근이 필요할까?

“그래서 우리보다 일찍 산업사회에 진입한 서양에는 정의에 대한 여러 가지 관념이 있다는 것을 소개하고 그것이 우리 사회의 맥락에서 예를 들면 ‘교육 평준화’라든가 ‘종합부동산세제’를 보면 어떠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밝히려고 했다. 그런데 어떠한 의미의 사회 정의를 실현할지는 국민들이 결정할 문제다. 정의의 원칙이라는 것은 따지고 보면 헌법 근저에 흐르는 원칙이기 때문이다.”

△ 진영논리가 강고한 한국사회에서 공동선의 추구는 쉽지 않아 보인다. 책의 3부는 ‘공동선’ 문제를 탐색하는 데 할애했다. 정의를 통해 공동선을 이룰 수 있단 말인가?

“정의롭지 않고서는 사회가 존속할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공동선을 추구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진영 논리가 강하기 때문에 자신이 표방하는 정의만이 정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여러 가지 정의이론을 소개할 필요가 있었다. 이번 책은 그런 의미로 읽어주면 좋겠다.”

△ 이번 책의 말미가 독특하다. 정의 이론의 쓰임새를 정치체제가 지향해야 할 가치의 문제로 제시한 점에서 그렇다. 선생님께서 지적한 ‘정의로운 정치질서’란 어떤 것인가? 추상에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그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말한 바와 같이 정의에 대한 원칙은 헌법의 원칙이 될 수 있다. 헌법이란 국가가 지향해야 할 가치를 담지 않을 수 없다. 정의로운 정지질서가 과연 무엇인지를 독자들에게 생각해보라고 권유했다. 실천 여부는 독자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책의 서문에도 그렇게 밝혔다.”

△ 미국에서 박사를 하셨다. 보편적 정치이론의 차원에서 정의론을 탐색하는 게 이해된다. 그런데, 한국 전통시대에서 ‘정의론’의 모형을 찾아내는 작업은 어려운지 여쭙고 싶다. 예컨대 정약용은 『흠흠신서』(1819~1822)에서 독특한 ‘복수론’을 거론하면서 ‘정의로운 폭력’ 문제를 환기한 바 있다.

“기자가 말한 그 대목은 확인해보지 못했다. 유교에서는 아버지와 이웃집 아저씨를 외형적인 법으로 똑같이 대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 한국에서 말하는 義가 서양의 正義라는 말과 상통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정의의 기저에 있는 것은 평등인데, 공동체적인 속성이 더 강한 한국 사회에서 평등을 일률적으로 적용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공동체의 속성을 감안한 정의이론도 소개했다.”

△ 젊은 교수들이 사회과학의 갱신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높다. 세계 지식시장에 진출해 ‘세계적 논문 주제’로 경쟁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고, 한국 엘리트 교수들의 미국 종속성 극복을 주문한 지적도 있다.

“학문의 종속성이라는 문제는 서양의 개념도식이나 방법론을 그대로 가져와 한국 사회를 분석하고 연구하는 데서 폐단이 생기기 때문에 발생했다고 본다. 앞에서 말했듯, 한국 사회에는 사회라는 말조차 예전에 없었는데 어떻게 서양의 방법론을 그대로 따를 수가 있겠는가? 서양의 학자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저자의 고유한 목소리를 기대하실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런 것보다 먼저 ‘이해’에 최선을 다하고자 했다.”

글·사진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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