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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 경상대 남명학관에서 열린 2002 한국철학자대회
학술대회 : 경상대 남명학관에서 열린 2002 한국철학자대회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2.11.2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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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1-27 23:03:48

지난 1일 경상대 남명학관에 하나둘 모여든 한국의 철학자들은 ‘철학은 우리시대 보편윤리를 생산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나’를 화두로 던져놓고 이틀 동안 치열한 지식의 향연을 펼쳤다.

첫날 기조 발표를 맡은 황경식 서울대 교수와 소홍렬 포항공대 교수는 보편윤리가 있기 위한 철학적, 문화적 토대를 점검해 눈길을 끌었다. ‘문화 다원주의와 보편 윤리의 양립 가능성’이란 글에서 황 교수는 존 롤즈의 입을 빌려 진리란 더 이상 보편의 옷을 입을 수 없고, 우리 시대의 보편이란 정치적 실천의 영역에 국한돼야 한다고 말했다. 보편적인 것은 윤리와 가치의 최소주의를 전제로 한 상호간의 정치적 합의를 통해 도출된다고 주장한 것.

정치적 실천과 문화적 공공영역

한편 소 교수는 ‘보편 윤리의 문화적 조건’에서 계층의 시각을 뛰어넘는 문화적 주체가, 현실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면서 ‘붉은 악마’ 같은 퍼포먼스를 연출할 때 비로소 문화적 보편주의가 가능하다고 성찰했다. 만약 이 둘이 서로의 입장에 동의한다면, 오늘날 보편윤리란 정치 실천에서 문화적 공공영역이 형성될 때 가능하다는 말로 요약할 수도 있을 듯하다.

이튿날 이어진 분과별 발표에서 이정은 연세대 철학연구소 전문연구원은 ‘헤겔 『법철학』에서 시민사회와 국가의 매개체’에서 “법철학의 완성은 ‘국가’이지만, 동시에 헤겔은 ‘시민사회’의 근대적 의미를 강조하고, 국가에 버금가는 중요성을 시민사회에 부여했다”며 오늘날 시민단체의 철학적 근거를 헤겔 철학에서 끌어내고자 했다.

시민사회를 이끌어갈 보편적 윤리에 대한 논의는 환경철학회에서도 뜨거운 도마에 올랐다. 김명식 고려대 철학연구소 특별연구원은 ‘민주주의와 환경’에서 철학·사회학에서 논의돼온 시민민주주의의 합의 도출 방식을 환경 문제에 적용시키고 있다. 환경 현안에서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의견이 상충될 때 “권위주의 체제와 민주주의 의사결정의 상호보완 체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양선이 서울대 외래교수의 ‘성품과 도덕운’이란 논문 속에서는 흄 윤리학이 형식주의 윤리학의 ‘대부’ 칸트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우발적인 것’도 도덕의 차원에서 논할 수 있다는 게 주장의 핵심.

이날 학술대회의 대미는 다산기념철학강좌의 5번째 강연자로 한국을 방문한 테일러 교수가 장식했다. ‘다원주의와 현대종교’를 주제로 테일러 교수는 서구사회의 세속화 과정을 바라보는 기존의 관점인 ‘교회와 국가의 분리’가 핵심을 지적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대신에 1960년대 이후 표현적 개인주의의 등장을 그 원인으로 끄집어냈다.

테일러 교수, 중첩적 합의 강조

성령파 운동, 뉴에이지 운동이나 기독교와 불교를 뒤섞어 놓는 것 등 이 때부터 과거의 종교적 추구가 갖는 국가귀속적 의미가 심각하게 약화됐다고 테일러는 주장했다. 현대사회는 예전의 교파적 분리와 대립되는, 차원이 다른 근본적 영적 파편화 현상을 겪고 있고, 이것은 현대사회에서 국가적 연합이나 사회적 통합을 불가능케 하는 결정적 토대로 자리잡고 있다는 설명이다.

테일러 교수는 이 시점에서 개인간, 사회간 최소한의 합의를 끌어내기 위한 기본 자세로 존 롤즈의 중첩적 합의(Overlapping Consensus)개념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토론이 시작되자 주광순 부산대 교수(철학)는 “표현적 개인주의와 자유 민주주의는 서로 상반된 관계에 있는 것 아니냐”며 “오늘날 자기 표현이란 것들이 소비와 풍요 속에서 자아를 상실하면서 일반화된 현상은 아닌지, 전통적 의미의 자유를 원자화시킨 것은 아닌지” 질문을 던졌다.

테일러 교수는 “자유라는 단어를 나는 넓게 사용했는데, 오늘날 개별화 현상을 자유라는 단어로 설명하는 것이 전적으로 옳지는 않다”며 “자유로 개인주의를 포착하기보다는 ‘나의 욕구와 나의 궁금증’이라는 의미에서의 진정성 추구로 바라봐야 할 것”이라고 답변했다. “가치 다원주의를 말하는 자유주의자와 공동선에 어긋나는 가치를 배제하는 공동체주의자 사이의 골을 어떻게 메울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그는 “모든 가치에서 중립성을 지키는 것은 너무 경직된 것, 개인적으로 강단에서 그렇게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를 구분하는 것에 대해 분개한다”라고 다소 격앙되게 말했다.

한편 소홍렬 교수는 “오늘날 서구 개인주의의 위기는 경제적 부가 서구에 집중되면서 생겨난 것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고 “그런 위기의식을 보편화시키는 것도 문제”라고 지적했지만, 테일러 교수는 “모더니티는 복수적인 과정이라 문화나 사회에 따라 다양하게 일어났으며, 개별화가 덜 진행된 상태로 있는 사회의 존재를 인정해야 할 것”이라고 보편화를 부정했다. 테일러 교수와 허심탄회하게 지적 대결을 펼친 이날의 풍경은 철학자들에게 더욱 활발한 지적 탐구를 자극하는 적절한 계기가 됐을 것으로 생각된다.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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