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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이사-바보들의 행진
학이사-바보들의 행진
  • 한석지 제주대
  • 승인 2002.11.2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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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1-27 23:02:06

한석지
제주대·정치학

늦가을, 가출한 늙은 소년이 되어 한라산 중산간을 쏘다니게 된다. 빈 들판을 돌다보면 억센 땅 손아귀에 잡힌 억새풀들의 몸부림, 거친 바람뿐인 여기에 누워있다는 동지의 무덤이 있다. 치열하게 앎을 행하다 죽어간 한 지성인의 무덤 앞에 고개 숙이고 나를 돌아본다.
이 나라의 암흑기였던 유신독재 시절, 영문학을 접고 정치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인간학’에서 출발 ‘정의론’으로 끝나는 실천학문이라는 그 말이 나를 유혹했다.
‘살며 살게 한다(live and let live)’는 로크의 민주정치 사상을 ‘배우며 실천하겠다’는 다짐을 일기장에 남겨 놓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나의 뒷모습은 이론과 실천 사이 그 먼 거리를 왔다갔다하며 긴 세월을 허비해버린 바보임에 틀림이 없다.
흐릿해진 지난날들을 손톱으로 긁으면 선명하게 남아있는 핏자국이 보인다. 상처뿐 무엇 하나 이룬 것 없는 교수 생활 20년이 부끄러울 뿐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후회할 수는 없다. 이성의 작용으로 획득된 내용을 인식이라 한다면, 인간의 인식을 발전시킨 추진력은 결국 현실에 대한 인간의 행동, 즉 실천일 것이다. 실천이 인식을 발전시키는 추진력이라는 것은 실천의 과정에서 성립된 인식이 바깥 세계의 올바른 반영인가 아닌가에 있다. 그것은 즉 진리인가 아닌가 하는 것을 판정하는 기준이 바로 실천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아름답게 보이는 독버섯을 잘못 알고 먹으면 그 독에 중독되고 만다. 우리들이 각종 버섯 중에서 독버섯과 식용버섯을 구별할 수 있는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은 긴 세월에 걸친 버섯에 대한 구체적인 행동의 성과이다. 정치학을 비롯한 모든 사회과학적 지식도 이러한 실천의 검증을 통과해야 한다.
정치학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론을 도입했던 라스웰도 정치학의 경험적 소재는 행동임을 지적한다. 이론과 실천과의 관련성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프래그머티즘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현상을 과정과 진화 및 변화 속에서 파악하고, 개념과 지식 및 이론에 관해서도 인간의 정신이 외적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고 그 본질은 인간의 행동 실천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대학에서 탐구한다는 진리도 객관적인 대상을 올바르게 반영한 인식 내용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는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성격을 가진다. 객관적인 현실의 올바른 반영이기 때문에 진리는 현실과의 관계에서 유효성을 발휘한다.
설령 일시적으로 소수의 지지밖에 얻지 못한다해도 언젠가 훗날 다수의 승인을 받기에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를 밝히는 역사의 법정에는 시효가 없다.
민주주의도 이미 인간에게 갖추어져 있던 것이 아니라 역사적 실천과 투쟁의 산물이고, 과학적 연구와 함께 더욱 확대돼 가는 것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서 독재주의가 물러섰다고 말은 하지만 도처에서 그 잔영은 우리를 비웃고 있다. 대학에서도 독버섯처럼 예쁘게 화장한 권력의 얼굴로 대학의 자율을 은밀하게 농락하고 있다.
이제는 채찍 대신 당근을 들고 대학을 경마장으로, 교수들을 경주마로 바꾸려 하고 있다. 대학 자율성의 보장은 대학사회의 암적 요소를 제거하는 대전제가 된다. 그러나 지시와 간섭에만 능숙한 행정관료들은 이 사실을 알 까닭이 없다. 까닭은 그들이 대학을 병들게 한 장본인들이기 때문이다.
바보란 교육을 못 받은 사람이거나 사회적으로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다. 엉뚱한 일을 하면 바보들에 속한다. 이 나라엔 고급관료, 의사, 법률가, 정치가, 언론인, 교수 등 지식인 중에 바보들이 많다. 문제의식이 약하고 문제해결능력이 모자라며 자신이 바보임을 정직하게 시인하지 않는 것이 바보들의 본질적 특성이다.
하지만 그들이 바보임은 위기에 처하면 선명하게 드러난다. 존재할 뿐 기능하지 못하면 그게 바보다. 그들이 함께 가면 바보들의 행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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