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12:50 (금)
깊이읽기 : 알랭 리피에즈의 『녹색 희망』(허남혁 외 옮김, 이후 刊)
깊이읽기 : 알랭 리피에즈의 『녹색 희망』(허남혁 외 옮김, 이후 刊)
  • 김균 고려대
  • 승인 2002.11.27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비현실적 측면 있지만 도덕적 정당성 인정돼

김균 / 고려대·경제학

교수신문의 서평 부탁에 선뜻 응한 것은 책의 저자가 리피에츠였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 후반 이른바 사회구성체논쟁이 한창일 때, 프랑스 조절학파의 이론들을 처음 접하게 됐고 그 당시 아글리에타, 브와예와 함께 이 학파의 삼인방을 이루던 경제학자가 바로 리피에츠였다.

그의 참신한 직관력과 발상법들이 늘 수학적 명쾌함처럼 날렵하고 시원했기에 그의 이론과 글 스타일을 같이 좋아했고, 그래서인지 그의 책을 하나 번역하기도 하였다. 1990년대 중반 무렵 그가 경제학을 그만두고 녹색당 정치인으로 나섰을 때, 나는 좌파경제학에서 생태주의로, 또 학자에서 정치인으로 이중의 변신을 한 그에 대한 흥미를 스스로 놓아 버렸다. 그후 그는 프랑스 녹색당 소속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하기도 했고 극히 최근에는 녹색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복잡한 정치논쟁에 휘말려 불명예 사퇴를 했다고 건네 들었다.

옛 친구는 간 곳 없고 정치인 리피에츠만 있어

오랜만에 만난 옛 친구를 대하듯 알랑 리피에츠의 ‘녹색희망’을 반갑게 읽으면서 어쩌면 자신의 변신에 대한 논리적 계기나 개인사적 차원의 불가피성 같은 것을 찾아낼지도 모른다는 작은 기대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 책은 그가 생태주의 정치인으로 탈바꿈할 무렵이나 그 직후에 분명한 정치적 효과를 의도하면서 쓴 정치평론적 성격의 글들을 모은 것이며 따라서 기본적으로 학자가 아닌 정치인 리피에츠가 쓴 책이었다.

 
그의 정치적 입장인 정치적 생태주의에 대한 구상과 선전이 이 책의 주된 내용임을 알아채고 나서 나는 다소 당황했다. 우선 나의 생태주의 문헌 독서가 대단히 빈약했고, 또 무엇보다 생태주의나 환경문제가 사회적 가치 내지는 윤리의 문제로만 간헐적으로 제기돼오다가 이제 겨우 시민운동 차원의 걸음마를 시작한 우리의 소박한 현실에 비춰볼 때, 유럽에서 벌어지는 녹색정치의 노선다툼은 매우 생경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굳이 리피에츠의 이 책을 상식의 수준에서나마 정리해보자면, 그가 좌파에서 녹색의 길로 들어서게 되는 이유, 즉 생태주의가 맑스주의를 부정하는 까닭은 맑스 철학에 내재한 인간의 자연지배 관념, 그리고 현실사회주의의 생산지상주의 때문이다. 동일한 후자의 기준에 따라 생태주의는 극단적 시장주의와 패권주의적 미국의 신자유주의 세계화 역시 비판한다. 생태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맑스주의와 신자유주의는 모두 자연파괴의 엔진을 장착한 사회발전모델인 것이다.

생태주의자 리피에츠의 입장인 정치적 생태주의는 “우리가 자연과 맺고있는 관계방식이 잘못되었다. 이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이미 잘못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기본인식에서 출발한다. 그러니까 맑스주의나 시장자유주의가 인간에 의한 자연환경의 종속을 전제로 하는 생산력발전을 통해 인간사회의 각종모순을 해결하는 기획이므로, 그 탈출은 이 기획이 결과한 기존의 사회적 관계와 가치의 근본적 재구성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생태주의는 당연히 자연과 인간 관계에 대한 새로운 윤리적 기반을 요구하게 된다.

비현실적 측면 있지만 도덕적 정당성 인정돼

리피에츠는 “우리는 만물과 만인에게, 그리고 특히 나 자신에게 책임이 있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에 동양적 만물 개념을 대입해 이를 ‘21세기의 대승적 윤리’로 제시한다. 또 이 윤리의 실천을 위한 생태주의적 가치로 연대성, 자율성, 생태적 책임성, 민주주의를 들고 있다. 정치적 생태주의는 현실정치의 진행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이런 생태주의자의 가치를 실현하려는 정치적 입장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입장은 생태주의를 단순히 개인의 윤리적 각성 문제로 환원시키지 않으며 동시에 무조건적으로 기존 사회질서를 거부하지도 않는다. 리피에츠가 생산지상주의에 대한 구체적 대안으로 ‘지속가능한 발전’을 구상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라고 짐작된다.

리피에츠의 정치적 생태주의를 엄격하게 평가할 능력이 내게는 없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와 먼 미래에 태어날 세대에 대한 개인의 책임성을 주장하고, 아프리카 오지 주민에게까지 확장되는 지구적 차원의 연대를 요구하며 또 이 세계화의 시대에 대면적 참여민주주의를 꿈꾸는 생태주의적 가치를 정치적으로 실천한다는 것은 비현실적 메아리인 듯도 싶고, 그리고 그런 비현실성을 현실로 만들고자 한다면 냉혹한 현실정치의 추잡하고 복잡한 곡예를 하지 않을 수 없을 텐데 과연 현실정치라는 개미잡이가 판 개미지옥을 피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이런 의심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의 도덕적 정당성만큼은 승인하지 않을 수 없다. 또 그가 선택한 변신은 어쩌면 대단히 논리적이고 순수한 사고의 결론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을 듯도 하다. 그러나, 경제학자 리피에츠가 이제는 과거형으로만 남아있게 된 것이 못내 아쉬운 것도 사실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