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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된 삶의 치열성 … 누가 시대를 고민했는가?
소외된 삶의 치열성 … 누가 시대를 고민했는가?
  • 교수신문
  • 승인 2015.06.10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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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조선후기 영남 남인 연구』 우인수 지음|경인문화사|530쪽|40,000원

조선후기는 치열한 당쟁의 시기였다. 남인은 조선 선조대에 사류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된 이후 동인이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눠졌을 때의 남인 붕당을 가리킨다. 남인은 잔존한 북인의 일부를 흡수하면서 오랫동안 정파로서의 존재감을 가지고 서인에 맞서는 붕당으로서 조선조말까지 존속했다.

영남은 조선조 행정구역상 경상도지역을 가리키는 별칭이었다. 곧 소백산맥의 조령과 죽령 등 큰 고개의 남쪽 지방이라는 의미였다. 영남이란 별칭은 고려말부터 사용됐지만 하나의 역사적인 용어로 일반화된 것은 조선후기부터였다.
조선후기는 치열한 당쟁의 시기였다. 남인은 조선 선조대에 사류들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당된 이후 동인이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눠졌을 때의 남인 붕당을 가리킨다. 이때 남인은 주로 학통상 퇴계 이황학파였고, 이에 비해 북인은 학통이나 연원이 좀 더 복잡한 가운데 주류는 남명 조식학파였다. 분당의 계기가 된 것은 정여립 역모 사건으로 촉발된 이른바 기축옥사의 만연이었다. 이후 옥사를 만연시킨 서인에 대한 대응 자세를 두고 온건론과 강경론으로 나눠진 점도 남·북인 분당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그 뒤 북인은 세부적인 분열을 거듭하면서도 광해군대 정국을 주도했으나 인조반정으로 완전히 몰락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이에 비해 남인은 잔존한 북인의 일부를 흡수하면서 오랫동안 정파로서의 존재감을 가지고 서인(나중에는 노론과 소론)에 맞서는 붕당으로서 조선조 말까지 존속했다.


남인은 영남 지역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또 영남의 모든 사람이 남인인 것은 더욱 아니었다. 필자는 남인의 주류가 지역적으로 결집된 경향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영남지역의 남인이라는 의미에서 ‘영남 남인’이라 표현했다. 학파와 당색을 전제로 기호지방과 서인에 대칭되는 퇴계학파와 남인의 중심지란 의미로 영남을 사용했다. 영남지역의 남인은 짧은 기간의 정권 참여기를 제외하면 거의 전 시기를 재야에서 보냈다. 근기 남인이 집권한 시기에도 영남 남인은 그다지 득세하지 못했다.

영남의 남인은 무엇을 지향했나
이 책은 긴 세월을 재야 세력으로 존재한 남인의 모습을 다룬 것이다. 주로 정치사회적 측면에 초점을 맞춰 국정운영과 관련된 참여나 개혁론의 제시, 현실에 대한 인식과 대응, 학자적인 소양에 기초한 교육활동 등에 유의했다. 결국 정치적으로 失勢한 영남지역의 남인이 무엇을 지향하면서 어떻게 살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것이다.
필자가 영남 남인에 대해 학자로서의 흥미를 품고 접근하기 시작한 것은 십 수 년 전의 일이었다. 우연한 기회에 동료 교수로부터 자신의 선조인 정만양의 문집을 한 질 받은 것으로부터 시작됐다.

영조대의 영남 남인 학자로 한평
이 남인학자의 흥미로운 개혁안을 다룬 글을 발표한 후 영남 남인의 경세론에 대한 관심은 이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기도 했고, 그 이후시기로 내려가기도 하면서 폭이 확장돼 갔다.
아울러 영남 남인의 현실에 대한 인식과 대응에 대해서도 자연히 관심을 가지게 됐다. 왜냐하면 필자가 소속된 대학이 위치한 지역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거니와 지역 사회에서 요구하고 부탁하던 일을 마냥 외면한 채 지내기도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영남 지역과 관계되는 글을 쓰게 되는 경우가 늘어갔다. 이 책은 십 수 년에 걸친 그러한 연구의 결과물이다.


저자는 처음 사림의 대표격인 산림의 존재를 밝히는 작업으로 연구자 생활을 시작했다. 서인-노론이 정계를 주도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산림 역시 그 쪽 당 출신들이 많은 것은 당연했으며, 지역적으로는 충청도 지역을 필두로 한 기호지역이 성한 편이었다. 그로 인해 서인-노론에 대해서도 약간의 소견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남인에 대해서도 객관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학자적 안목을 지녔다고 스스로 말할 수 있을 정도는 됐다. 영남 남인이라는 부분적인 문제를 탐구함에 있어 전체와의 유기적 연관성 속에서 살피는 균형 잡힌 시각을 유지코자 노력했다.
이 책은 크게 네 부분으로 편성됐으며, 네 편 아래 각각 수 개의 장을 배치해 개별 논문 형태로 상론하는 형식을 취했다. 제1편은 ‘영남 남인의 형성과 정치적 부침’으로, 정국의 추이 속에서 영남 남인이 형성되는 과정을 류성룡을 중심에 두고 정리했으며, 이후 다른 붕당과의 갈등 속에서 정치적으로 부침하는 모습을 살폈다. 조선후기 정치사 속에서 영남 남인의 처지를 개략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했다.


제2편은 ‘영남 남인의 정치사상과 개혁론’을 살폈다. 영남 남인의 정치사상을 몇 개의 요목으로 나눠 드러내면서 특히 근기 남인과의 대비에도 유의했다. 그리고 영남 남인 중에서 비교적 체계적인 개혁안을 제시한 이현일 형제, 홍여하, 정만양 형제, 이진상의 경우는 별도의 장으로 독립시켜 상론했다.
그들의 개혁론은 원리를 중시하는 이황 이래의 학풍에서 비롯됐으며, 재야세력으로 오랜 기간 존재하면서 집권세력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유지할 수 있었다. 대체로 근기 남인에 비해서는 점진적이고도 온건한 방식의 개혁을 추구했음을 밝혔다.

외롭고 힘없는 남인출신 관료들
제3편은 ‘영남 남인의 현실인식과 대응’이다. 영남 남인 7명 즉 장현광·정경세·이민환·이상정·정종로·류주목·장복추의 행적을 각각 살폈다. 자신이 위치한 각 시기별 상황 속에서 그들이 취한 현실에 대한 인식과 고뇌, 그리고 대응에 대해 검토했다. 그 중 이민환의 경우는 북인정권 하에서 주요 관직에서는 철저히 소외됐지만 생사를 가늠할 수 없는 원정군의 명단에는 이름이 올랐다. 후금을 공격하려는 명을 돕기 위해 조선이 파병한 1만3천명 군대의 최고사령관 강홍립의 참모로 참전했던 것이다. 표면상으로는 무재를 겸비한 유능한 문신이라는 점이 내세워졌지만 내면은 먼 지방의 외롭고 힘없는 남인 출신 관료였기 때문이었다. 만주의 사르후 전투에서 대패한 뒤 후금의 포로가 돼 고초를 겪었고, 귀국 후에는 항복한 전력으로 인해 고통 받았다. 하지만 그는 참전과 포로생활에 대한 기록을 일기 형태로 남겼을 뿐 아니라 후금 사회의 모습에 대한 자세한 견문록을 남겨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을 다했다.


제4편은 ‘영남 남인의 삶과 생활’로, 일상 속에서 또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그들이 보여준 모습을 살펴보고자 했다. 조호익·박의장·장흥효·류진의 삶의 궤적을 추적했다. 그 중 조호익의 경우는 17년 동안 인생의 황금기에 유배생활을 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그에게 군적 정리를 맡기려던 관리의 미움을 사 토호로 지목돼 평안도 강동현으로 가족 모두 강제 이주되는 형벌을 받았다. 그는 외로움과 그리움, 그리고 불편함의 연속인 유배생활을 지식인답게 학문을 닦는 계기로 삼았으며, 나아가 주변 지역의 학생들을 가르치는 기회로 활용했다. 마침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많은 문도들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켰다. 역경을 학문 도야와 제자 양성의 기회로 승화시켰으니 도학자다운 삶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영남 남인에 대한 조망이라는 당쟁사적 의미 외에 인물에 대한 좀 더 깊은 성찰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

 

우인수 경북대·역사교육과
경북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조선 후기 정치사와 생활사 그리고 지역사에 관심을 갖고 있다. 주요 저서로 『조선후기 산림세력 연구』, 『부북일기(역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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