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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마키아벨리’를 제대로 읽어내려면…
‘악한 마키아벨리’를 제대로 읽어내려면…
  •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서양고전문헌학
  • 승인 2015.06.09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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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서양고전문헌학

랜 만에 눈길을 끄는 책이 나왔다. 『군주론: 군주국에 대하여』(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곽차섭 옮김, 도서출판 길)다. 두 가지 이유에서다.

하나는, 책이『군주론』의 이탈리아어 원문을 병기한 비판 정본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이탈리아 원문을 손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해 준 편집자 곽차섭 교수의 노고와 도서출판 길의 노력에 감사드린다.

이 책이 칭찬받아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책이 『군주론』을 전하는 19개의 필사본들의 계보와 2개의 초판본들(editiones principes)을 소개하고 번역 底本으로 삼은 판본이 무엇인지를 밝혔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탈리아의 정부 후원으로 수행된 마리오 마르텔리(Mario Martelli)의 ‘국가판(Edizione Nationale delle Opere)’이다. 국가가 인문학을 지원하거나 후원할 때, 어떤 종류의 연구사업을 우선으로 삼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아무튼, 우리가 읽는 한국어 번역의 출처가 무엇인지를 밝힌다는 점에서 이 책은 주목받을 가치가 있다. 이런 정본이 지속적으로 많이 나오길 희망한다.

또 다른 이유는 비판 정본을 바탕으로 편집자 곽차섭이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번역자는 그동안 ‘실력’(최숙형, 1958)으로 번역해 온 virtu를 ‘덕’으로 옮겨야 한다고 일갈한다. 해서, 제일 궁금한 대목부터 짚어보자. 도대체 번역자가 virtu를 덕으로 옮겨야 한다고 강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거기에는 이런 사정이 배경에 깔려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마키아벨리에게는 착한 얼굴과 악한 얼굴이 있는데, 사람들은 착한 마키아벨리보다는 악한 마키아벨리에 더 큰 관심을 갖는다. 어쩌면, 마키아벨리의 연구에 있어서 국내에서 독보적인 연구자로 인정받는 곽차섭은 이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을 것이고, 이것이 그로 하여금 이른바 ‘마키아벨리 일병’을 구하도록 나서게 만든 이유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과연 ‘마키아벨리 일병’구하기는 성공할 수 있을까.

번역자가 제시하는 근거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리스의 아레테(arete) 개념이고 다른 하나는 한자 ‘德’이다. 내 생각은 이렇다. 기본적으로 ‘덕’으로의 번역은 문제 제기 차원에서는 의미 있다. 하지만 표준 역어로 사용하자는 제안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유는 세 가지다.

그럼에도 사족을 다는 이유는 ‘마키아벨리 일병의 구하기’가 오히려 ‘덕’으로부터 멀리 떨어질 때 가능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principatus(통치체)’ 혹은 ‘membrum politicum(정치체)’의 순수 운동 원리와 그 자체의 작동 방식에 대한 고찰을 담은 텍스트로『군주론』을 보게 되면, 이른바‘나쁜 얼굴의 마키아벨리’를 두려워해야 하거나 걱정해야 할 이유가 소멸해 버리기 때문이다.

우선 그리스어 아레테와 한자 덕은 방증에 불과하다. virtu를 현대 한국어 의미장에서 통용되는 의미의 ‘덕’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군주론』텍스트의 내적 전거들을 제시해야 한다. 또한 현대 한국어의 용례도 함께 검토해야 한다. 어원적인 사정에 관계없이 현대 한국말의 ‘덕’의 용례 대부분은, ‘덕분에’ 혹은 ‘덕택에’ 등의 일부 부사적인 표현을 제외하면, 학술적인 담론에서는 정치적인 능력과 물리적인 힘이 아니라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개념으로 사용된다.

다음으로, virtu를 ‘덕’으로 이해한 이들은 정치사상적으로 마키아벨리에 대립각에 서 있던 브루니(Leonardo Bruni)나 살루타티(Coluccio Salutati)였다. 따라서 마키아벨리가 활동하던 당대의 지성사에서 virtu 개념이 의미장 좌표의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에 대한 문헌 전거도 요청된다. 이도 또한 저 ‘혁신적인 역어’(서문, XCIV 쪽)가 설득력을 얻기 힘든 이유다. 아쉽게도, 책에는 이에 대한 해명이 전혀 없다. 참고로 브루니와 살루타티는 키케로의 virtus 개념에 입각해서 로마 공화주의의 부활을 시도했던 사상가들이었다. 이와 관련해서, 번역자는 포콕(J. G. A. Pocock, The Machiavellian Moment: Florentine Political Thought and the Atlantic Republican Traditi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75:『 마키아벨리언 모멘트: 피렌체 정치사상과 대서양의 공화주의 전통』, 곽차섭 옮김, 나남, 2011)의 입장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포콕 식의 ‘마키아벨리 구명’ 노력이 아직도 유효한 지는 잘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마키아벨리의 virtu개념은 ‘덕’보다는 ‘힘(power)’에 더 가깝다.

흥미롭게도 번역자도 “키케로를 비롯한 앞서의 수많은 사람들이 정직과 같은 도덕적 품성을 비르투-이때는 차라리 미덕이라 불러야 하겠지만-의 주요 요소로 본 반면, 마키아벨리는 오직 필요성과 유용성에만 강조점을 두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통상적 의미의 도덕이 아니라 필요성의 윤리였다”(뒷표지면)라고 밝히고 있다. 만약 마키아벨리의‘필요성과 유용성’이 키케로의 그것이 아니라면, 카이사르(Caesar)의 virtus(군사적 힘과 용기)개념에 가까울 것이다. 그렇다면, virtu는 덕이 아니라 힘으로 번역해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fortuna와 virtus는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진 하나의 짝패 관계이고, 이는 이미 헬레니즘 시대에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전거로 마키아벨리가 좋아했던 리비우스의 『로마건국기(Ab urbe condita)』에서 언급되는 virtus와 fortuna를 소개하겠다.

“전쟁의 성패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군사의 수와 용기(virtus)와 장군들의 능력들과 인간사에서 가장 중요한 특히 전쟁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행운(fortuna)이다.”(『로마건국기』제9권 17장)

인용은 당장『군주론』제1장 “이(획득된 영지)는 타인의 군대 혹은 자신의 군대에 의해, 운이나 혹은 덕을 통해서 획득된다”(13쪽)는 구문을 환기시킨다. 특히 “운이나 혹은 덕을 통해서(o per fortuna oper virtu)”의 구문은 의심할 여지없이 리비우스의 ‘fortuna(행운)와 virtus(용기)’ 짝패의 창조적 재활용이다. 이런 이유에서 virtu는 덕보다는 힘으로 옮기는 것이 안전할 것이다. ‘영지’의 획득 방식도 기본적으로는 전쟁이기 때문이다. 전쟁에서의 ‘필요성’도 윤리적 판단을 요청하지 않는다. 대략 여기까지가 virtu를 덕으로 옮기기 힘든 이유들이다. 물론 곽차섭의 ‘마키아벨리 일병’구하기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참고로, 리비우스의 『로마건국기』는 vis(힘)가 정치의 조직화와 체계화를 통해서 어떻게 극대화되는지, 즉 vis(힘)가 정치-군사-물리적인 실체(virtus)로 제도화되는 과정을 고찰한 문건이다. 다시 말해, 사적 용기가 공적 권력으로 확장-변신하는 과정을 살핀 작품이다. 내 생각에, 마키아벨리의 『군주론』도 리비우스의 사유 궤도를 기본적으로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virtu의 순수 운동 방식에 대한 고찰을 담은 책으로『군주론』을 읽을 수 있다는 소리다.

그렇다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리비우스의 『로마건국기』의 2부작 정도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엄밀한 논구가 요청된다. 그럼에도, 사족을 다는 이유는 ‘마키아벨리 일병의 구하기’가 오히려 ‘덕’으로부터 멀리 떨어질 때 가능할 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principatus(통치체)’ 혹은 ‘membrum politicum(정치체)’의 순수 운동 원리와 그 자체의 작동 방식에 대한 고찰을 담은 텍스트로 『군주론』을 보게 되면, 이른바 ‘나쁜 얼굴의 마키아벨리’를 두려워해야 하거나 걱정해야 할 이유가 소멸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군주론』은 ‘정치체’의 활동 원리이자 양식인 virtu에 대한 일반 고찰이자 순수 관찰 보고로 읽자고 제안한다. 그 때에 『군주론』의 숨은 진면목이 어쩌면 드러날지도 모를 일이기에. 이와 관련해서, 번역자는「해제」 서문(XXX-XLI)에서 마키아벨리가 루크레티우스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고 주장한다. 그 영향 가운데에 하나가 실은, 그러니까 마키아벨리가 루크레티우스에게서 배운 것이 사물의 운동에 대한 순수 관찰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군주론』과 『로마사 논고』사이에 있는 오랜 그리고 불편한 모순도 이를 통해서 해소될 수도 있기에 사족을 길게 덧붙였다. 독자 여러분의 의견을 구한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서양고전문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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