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0 10:45 (토)
“‘지고한 순간’과 ‘공허한 순간’의 중재 없다면 현대 인간의 비극은 계속된다”
“‘지고한 순간’과 ‘공허한 순간’의 중재 없다면 현대 인간의 비극은 계속된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06.02 15: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화의 안과 밖 시즌2 고전읽기_ 18강. 김수용 연세대 명예교수의 ‘괴테 『파우스트』와 현대성의 기획

오월의 마지막 토요일은 뜨거웠다. 지난달 30일(토), 이 무더위 속에서 ‘문화의 안과 밖 시즌2 고전읽기’ 강연도 함께 뜨거웠다. 괴테의 문제작 『파우스트』, 영원한 인간성의 심저를 건드린 고전 작품 때문이었다. 파우스트는 신과 악마의 내기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을 대변한다. 악마와 계약을 맺는 파우스트는 독일 전설 속의 인물이다. 마술사이자 연금술사였던 게오르크 파우스트에 바탕한 것으로 보는 설도 있는데, 이 때문인지 크리스토퍼 말로, 요한 볼프강 괴테, 클라우스 만, 토마스 만, 오스카 와일드 등 많은 서구 작가들이 이 전설을 바탕으로 자신의 출세작을 창작하기도 했다.
특히 이 가운데 괴테의 『파우스트』는 희곡과 장시가 합작된 형태의 ‘서사적 서재극’으로 독일 고전 문학의 기독교적 도덕을 심화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작품의 심오함 때문에 좀처럼 해석의 오솔길을 쉽게 내주지 않았던 고전으로도 꼽힌다. 그렇다면 연세대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이자, 『괴테, 파우스트, 휴머니즘: 신이 떠난 자리에 인간이 서다』(2004)의 저자인 원로 독문학자 김수용 교수는 이 작품을 어떻게 읽어냈을까.
“괴테는 파우스트의 미래 비전을 일면으로는 인류의 역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가치가 있는 목적으로 묘사하면서 또 다른 면으로는 이 비전에 내재된 모든 불확실성과 비현실성을 강조한다”라고 읽어낸 김 교수는 파우스트적 ‘지고한 순간’과 메피스토적 ‘공허한 순간’의 중재 가능성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파우스트의 비극, 또는 파우스트로 대변되는 현대 인간의 비극은 지양되지 않으며, 그러한 상황이 지속되는 한 괴테의 『파우스트』는 ‘한 편의 비극’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수용 교수는 서울대를 졸업한 뒤, 독일의 본대와 셀도르프대에서 하인리히 하이네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1년부터 연세대 독어독문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저서로는 『독일 계몽주의』(2010), 『예술의 자율성과 부정의 미학』(1998), 등이 있다.
다음은 이날 김수용 교수의 주요 강연 내용이다.

자료제공=네이버문화재단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 -렘브란트의 ‘파우스트’로 잘 알려진 작품. 「A Scholar in his Study」, etching, drypoint and burin on eastern paper, 16cm×20.8cm,1650-1654,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유럽의 역사에서 낡은 집 파괴와 새집 짓기가 가장 대규모로 벌어진 때는 앙시앵 레짐에서 근(현)대로의 변환이 이뤄진 시기다. ‘신본주의’라 불리던 낡은 집은 허물어뜨려졌고, ‘인본주의’라 불리는 새집 짓기가 시작됐다. 정신적으로는 계몽주의, 정치 사회적으로는 프랑스 혁명으로 대변되며, 인간의 이성으로 새로운 정신적, 사회적 질서를 창조하려는 이 새집 짓기의 기획을 우리는 흔히 ‘현(근)대성의 기획’으로 부른다. 괴테의 『파우스트』는 바로 이 ‘현대성의 기획’을 주제로 한 비극이다.


『파우스트』에서 이 역사적 변혁이 가장 명시적으로 나타난 곳은 「천상의 서곡」이다. 메피스토가 신의 세계 창조, 무엇보다도 인간의 창조를 실패작으로 규정하고 그 예로 그 무엇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파우스트의 고통을 들자 신은 비록 그가 ‘지금은’ 불완전하나 이 불완전함은 ‘곧’ 극복될 것이라는 확신을 표명한다. 악마와 신의 이러한 상이한 견해는, 메피스토가 철저하게 현재 상황을 근거로 판단하는 반면 신은 미래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말하자면 악마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이고 신은 이상주의자다.


왜 창조의 현재 상황은 악이 비집고 들어올 틈이 있을 만큼 불완전해야 하는가? 이러한 물음은 오래전부터 신학과 철학의 커다란 화두였다. 「천상의 서곡」에서 신과 악마가 파우스트의 영혼을 두고 한 내기는 궁극적으로는 창조의 본성이 과연 ‘되어감’인지 아닌지에 대한 내기이다. 이러한 사실은 지상에서의 인간과 악마의 관계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는 신의 선언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파우스트와 그가 대변하는 인간은 이제 신의 후견에서 벗어나 ‘성숙한’ 존재가 돼야 한다. ‘신의 죽음’을 선언한 니체적 관점으로 본다면 「천상의 서곡」은 중세적 신본주의의 종말을 고하는 더할 수 없이 극명한 현대적 인본주의의 선언이다.


파우스트가 그 어떤 이뤄진 것으로도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바라며, 이를 위해 행동하는 인물이라면 메피스토는 그 어떤 이뤄진 것도 결국은 소멸될 것이고, 그러니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따라서 그 어떤 것을 이루려는 노력 역시 무의미한 것이라는 ‘절망의 원칙’을 존재의 기반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악마의 확신은 그가 자신의 원칙을 철저하게 물리적, 경험적 세계에서 도출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모든 열광에 대해 그는 차가운 조소로, 이른바 모든 ‘진리’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으로 맞선다. 파우스트와 메피스토 사이의 내기는 궁극적으로는 희망과 절망이라는 이 두 원칙 중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에 대한 내기다. 두 사람은 누가 옳은지를 판별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가기로 한다.


「마녀의 부엌」에서 메피스토의 도움으로 젊음을 되찾은 파우스트가 악마와 함께 지상 세계에서 본격적인 편력을 시작한 후 첫 번째로 맞닥뜨린 것은 그레첸이라는 순박한 처녀와 그녀로 대변되는 소시민적 牧歌의 세계다. 처음 보자마자 그녀의 천진함과 젊음에 매료된 파우스트는 그레첸에게 접근하고, 두 사람 사이에는 곧 열정적인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다. 끝없이 더 나은 것을 추구하기에 결코 안주할 수 없는 파우스트는 그의 말대로 ‘영원한 방랑자’이자 ‘집 없는 자’다. 그리고 정처 없이 떠돌며, 삶의 불안정에 지친 모든 방랑자와 마찬가지로 파우스트 역시 ‘집’과 ‘안정’을 동경할 수밖에 없다. 파우스트가 한때나마 그레첸을 진심으로 사랑한 것은 사실이나 그는 이 사랑에 얽매일 수 없었다. 이 사랑은 비극적 파탄으로 종결된다. 『파우스트』 2부의 헬레네 비극 역시 목가적 세계가 파우스트의 안식처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헬레네는 절대적 아름다움의 상징이다. 이러한 헬레네의 결합이 파국으로 끝났다는 것은 헬레네로 상징되는 아름다움의 세계 역시 파우스트의 역동성 본성을 포용할 수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파우스트는 죽기 직전 그가 꿈꾸던 이상적 세계의 환영을 보고는 “머물러다오, 너는 너무나 아름답구나”라는, 그가 메피스토와의 내기에서 조건으로 내걸었던 말을 한다. 이는 그가 비록 환영 속에서나마 안주할, 더 이상의 행동이 필요 없는 절대적 휴식처를 찾은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파우스트의 ‘희망의 원칙’은 더 이상의 ‘희망’을 찾을 수 없기에 궁극적 진리로서의 존재 의미를 상실한 것일까. 그는 메피스토와의 내기에서 지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이 환상 속의 세계는 어떠한 본성을 가지고 있기에 파우스트에게 궁극적인 휴식처가 될 수 있는가.


신의 퇴장, 달리 말하면 유럽이라는 세계의 질서를 이루는 구심점이었던 기독교의 몰락은 필연적으로 이 세계의 총체적 개편을 불러왔다. 기독교 교회의 세계해석이 절대적 진리로서의 권위를 상실했기에 이제 인간은 새로운 진리를 찾아서 이 진리에 의거한 세계를 다시 형성해야 한다. 반란 때문에 궁지에 처한 황제를 메피스토의 도움을 받아 구해준 파우스트는 그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바닷가의 습지를 봉토로 요구한다. 그는 이 습지를 개간해 그 위에 전혀 새로운 이상적 사회를 건설하려 한다. 죽음 직전의 모놀로그에서 그는 이 개간지 위에 세워질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는 ‘자유로운 사람들’과 함께 하는 꿈을 꾼다. 다시 말해서 이 공동체의 유토피아적 완전성은 주어진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만들어나가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완전한 공동체를 창조하려는 노력이 ‘행동’의 개념으로 나타난다.


이 모놀로그의 종결부에서 파우스트는 비록 환상 속이지만 “자유로운 땅에서 자유로운 사람들과” 삶을 같이하는 지고의 성취를 체험한다. 그렇기에 파우스트는 이 순간을 향해 “머물러라, 너 그렇게 아름답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지고한 이념과 이 이념을 실천하려는 현실적인 행동 사이에는 극복할 수 없는 모순이 존재한다. 파우스트는 이 이상적 미래 사회의 토대를 닦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쳐’ 간척 사업을 추진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는 초기 자본주의 시대에 등장하는 사업주의 전형적인 비인간적 작태를 보인다. 이는 무엇보다도 간척 사업에 동원된 노동자를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와 노동자들 사이에는 ‘우리’라는 공동체적 의식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주인’과 ‘머슴’의 관계만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주인과 종의 상호관계는 파우스트의 미래 비전에 나타나는 ‘자유로운 땅’의 ‘자유로운 사람들’, 공동의 위험에 모두 자발적으로 같이 대처하며, 공동체를 같이 지켜나가는 ‘자유로운 사람들’ 간의 상호 관계와는 전혀 다른 양태를 보인다.


우스트가 추구하는 지고의 인본주의적 목적과 그가 이 목적의 실현을 위해 사용하는 수단의 비인간적 폭력성 사이의 모순은 맹목적 이상주의자들이 빠지기 마련인 자가당착의 전형적인 실례다. 눈먼 이상주의자들처럼 파우스트 역시 ‘미래의 자유로운 사람들’을 위해 현재의 노동자들을 가혹하게 착취하면서도 일말의 가책도 느끼지 않는다. 그 또한 눈이 먼 것이다. 파우스트의 마지막 모놀로그에 나타난 미래 사회의 모습은 분명히 바람직하고 이상적이며, ‘희망’의 대상으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희망의 실현과정은 올바르게 진행된다면 분명히 역사 발전의 지향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상적 공동체는 멀고 먼 미래의 불확실한 일이다.


이 공동체의 불확실성, 즉 비현실성은 두 개의 문학적 기법을 통해 강조되고 있다. 첫째는 눈이 먼 파우스트가 자신의 무덤을 파는 삽질 소리를 인부들의 수로 작업 소리로 착각하고, 이 이상적 사회의 모습을 떠올린다는 사실이다. 이는 괴테적 아이러니의 극치인바, 이를 통해 괴테는 파우스트의 미래의 소망이 죽어가는 눈먼 노인의 망상에 가까운 비현실적 환영임을 암시하고 있다. 두 번째는 ‘비현실 화법’이다. 파우스트의 모놀로그는 중요한 부분에서 문장들이 접속법 2식의 동사를 가지고 있는바, 이 형태의 동사는 독일어에서는 가정적 상황이나 비현실적 소망을 표현하는 데 쓰인다. 이러한 기법을 통해서 파우스트가 “그렇게 아름답구나”라고 경탄한 미래 사회의 모습은 단지 환상이며, 그가 향유하는 ‘지고의 순간’은 ‘현실’이 아니라 그저 ‘예감’에 바탕을 두고 있음이 암시된다.


괴테는 파우스트의 미래 비전을 일면으로는 인류의 역사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가치가 있는 목적으로 묘사하면서 또 다른 면으로는 이 비전에 내재된 모든 불확실성과 비현실성을 강조한다. 파우스트의 미래의 공동체에 내재된 불확실성과 비현실성은 이 공동체를 향한 희망이 절대화되지 못하게 막는 일종의 장애물로 기능한다. 말하자면 이 부정적 성격들은 이 공동체의 완전성과 상호 대치되고 상호 해체되는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상호 해체는, 역설적 표현이지만 상호 보완으로 진행될 수 있다. 비록 그 내용이 아무리 이상적이고 완전한 희망이라 해도 그것이 한갓 비현실적 환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비판적 의식은, 그래서 ‘지고한 순간’이 언제라도 ‘공허한 순간’이 될 수 있다는 의식은 이 희망이 교조적 이데올로기로 굳어지는 것을 저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파우스트적 ‘지고한 순간’과 메피스토적 ‘공허한 순간’이 중재돼야 한다. 이 중재의 가능성이 찾아지지 않는 한, 파우스트의 비극, 또는 파우스트로 대변되는 현대 인간의 비극은 지양되지 않으며, 그러한 상황이 지속되는 한 괴테의 『파우스트』는 ‘한 편의 비극’으로 남을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