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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일상의 폭력
[문화비평] 일상의 폭력
  • 김진호 목사
  • 승인 2002.11.27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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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1-27 22:56:10

김진호
목사·당대비평 편집위원

그녀는 뺨을 맞았다고 했다. ‘소개팅’ 나갔던 걸 그가 알게 된 탓이다. 그를 좋아했지만 미덥지 않았기에 갈등했고 그러던 중 친구의 소개로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됐던 것이다. 한 눈에 맘에 들 정도는 아니었지만, 똑똑했고 장래가 유망한 사람 같아 보였다.
좀더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얼마 못 가서 그가 알게 되었다. 그는 격하게 다그쳤고, 그녀는 격앙된 감정에 그만 만나자고 소리쳤다. 그러자 그의 오른손이 뺨을 강타했다. 그런데 나는 다음 대목에서 적지 아니 놀랐다. 그녀는 다시 그와 사귀게 되었단다. 그러면서 그녀가 댄 이유는 이렇다. 얼마나 나를 사랑하면 이렇게까지 했을까요,라고.
대학교수인 한 남자. 그에겐 중학생 딸이 하나 있었다. 최근 그 아이는 아빠에게 뺨을 맞았다고 했다. 귀에 구멍을 뚫은 것을 들켰기 때문이란다. 그 아이는 그때 기억을 되새기면서 내게 말했다. 맞을 짓을 했으니 맞은 것이라고. 아빠의 친구를 의식한 말 같지는 않았다.
오래 전 어느 외화에서 본 장면이 떠올랐다. 남자끼리 밤새도록 서로 치고 받으며 격하게 싸우다 새벽녘에 녹초가 된 둘은 나란히 누워서 서로의 우정을 확인한다. 마치 사나이간의 우정은 이런 것이라고 말하려는 듯.
영화/드라마 속에서 미화됐던 폭력은 현실 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들은 이 얘기들을 들려줬을 때 적어도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이와 비슷한 자기 경험을 얘기했다. 나 또한 오래 전의 기억을 간신히 떠올렸다.
대학교 1학년이나 2학년 때 나는 교회학교 선생이었다. 그때 무척이나 말썽쟁이였던, 아마도 초등학교 1학년쯤인 아이가 있었다. 어느 날 나의 손바닥은 그 아이의 얼굴을 향해 사정없이 날아갔다. 부지불식간의 일이었다. 아이는 대성통곡을 했고, 주위는 찬물을 끼얹은 듯 일시에 조용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늦은 상황이었다. 한데 뜻밖에도 나의 폭력은 다른 어른들과 아이들에 의해 정당화됐다. 못된 짓을 했으니 당연히 맞았다는 것이다. 나도 스스로를 정당화했던 것을 기억한다. 얼마나 니네들을 위해 기도했는데, 얼마나 니네들을 위해 노력했는데, 얼마나 니네들을 위해 내 기회를 포기했는데 등등.
그런데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가 이것을 겨우 기억해낸 것처럼, 폭력에서 가해의 기억들은 사람들에게서 대체로 희미했다. 반면 피해의 기억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생생했고, 때론 깊은 상처로 남아있었다. 또 피해의 상흔들은 여자에게서 더 많았다.
나는 이 기억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했다. 너무 부끄러웠던 탓이다. 지금쯤 거의 서른이 다 된 숙녀가 되었을 그 아이에게 혹 그 날이 깊은 상처로 남아있으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내게 두통을 몰고 왔다. 아무튼 폭력은 생각보다 우리 일상에 훨씬 가까이 와 있었다. 그것은 결코 드라마적 호객 장치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최근 국가 폭력과 가정 폭력에 대한 책들을 몇 권 읽었다. 그것들은 거의 예외 없이 우리가 일상 속에서 체험할 수 없는 곳에서 벌어진다. 희생양은 어두운 곳에서 발생하며, 그네들의 절규 소리는 은폐되어 있다. 최근 검찰 조사 과정에서 가혹행위로 죽었다는 사람 이야기처럼 간혹 그런 것이 드러났을 땐, 종종 그것을 정당화하는 논리가 애써 제기된다. 이른바 국가/사회의 안보 논리는 이러한 정당화로 꽤나 효능이 있는 고안물에 속한다. 그런데 위의 몇 건의 사례들처럼, 일상 속의 폭력은 도리어 공개적이다. 그것은 가해자의 변명에 불과한 정당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면 사회는 그 정당성에 어느 정도의 합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무수히 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또 가해자가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가해의 기억보다 피해의 기억에 더욱 민감하다.
일본의 한 연구자는 일본인이 전후 자신들이 당한 피해에 대한 기억을 지나치게 되새기면서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야만성의 희생자에 대한 기억을 스스로에게 은폐하는 집단 무의식을 갖게 되었다고 자성하였다. 내가 보기엔 그것은 일본만의 현상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 사회에 만연한 현상이다. 우리 사회는 일상화된 폭력 속에 있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에서 합의된, 정당한 폭력이다. 그래서 그 폭력은 일상화된 폭력, 몸의 일부가 된 폭력이다. 한데 문제는 그 폭력의 흔적은 우리 속에 상처로 남아 있다는 데 있다.
우리의 상흔은 어딘가에서 표출되게 마련이다. 그런데 우리 몸이 폭력성에 익숙해 있는 한, 우리의 상흔은 종종 제3자에 대한 폭력적 가해로 드러나며, 제도 속에 은폐된 희생양의 절규의 소리는 우리의 귓가에서 사라져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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