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3-29 19:25 (금)
국역 전문가 양성이 절실하다
국역 전문가 양성이 절실하다
  • 이종민 전북대·영어영문학과
  • 승인 2015.05.27 11: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이종민 전북대·영어영문학과

영국의 유명한 시인 키츠는 호머를 처음 만난 감격을 새로운 행성을 발견한 천문학자의 환희, 혹은 이른바‘신대륙의 발견’시 처음으로 태평양을 맞대하게 된 어느 군인의 흥분에 비유한 바 있다. 그리스어를 잘 모르던 그가 『일리어드』나『오딧세이』를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채프먼이라는 번역자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통해 영시사상 한 이정표를 긋는 불멸의 소네트 한 편을 남기게 된다.

문화의 핵심에는 글이 있다. 글을 통하지 않고는 문화고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고 제대로 계승 전수될 수 없다. 유럽의 문예부흥기에 각 나라마다 앞다퉈 그리스 로마의 고전들을‘자국어(vemacular)’로 번역한 것도 이러한 인식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요즘‘문화의 세기’를 앞세우며 국민소득 3만불 시대를 운위하면서도 정작 우리 고전에 대한 번역사업을 동한시 하는 것은 분명‘반문화적’책임방기라 아니할 수 없다. 핑계야 왜 없겠는가. 우리 문화와 전통을 왜곡·압살하려 했던 식민통치, 그 이후의 미군정, 곧이어 안방을 차지한 서구식 대학 중심의 교육제도와 입시제도, 그리고‘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세!’의 구호 등. 온 나라가 힘을 모아 우리 고전을 비하하고 우리 전통을 끌어내리는 데 열심이었다. 그 뒤를 이은 영어 광풍이라니!

그 결과 우리 전통 고전은 골방 신세가 되고 전문가들도 변방으로 밀려나 대학이나 전문연구기관의 언저리에도 끼지 못하게 됐다. 그러니 그 후속 세대들을 양성하는 일은 어찌 됐겠는가.

덕분에 우리는 말로는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한 세기도 넘지 못해 캄캄 절벽과 부딪치게 된다. 미국의 천박한 역사를 조롱하지만 정작 그들 독립 시기에 우리 선조들이 무슨 생각을 하며 살아갔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게 됐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판소리의 역사도 사실은 미국독립전쟁 이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지 못한다.

이제 달라져야 한다. 전통문화의 지평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 중심에 한문으로 된 우리 고전 번역작업이 있다. 선조들의 사상과 예지, 文香을 담고 있는 그것을 자랑스런 전통으로 안아야만 반만년의 역사가 조금이나마 되살아날 수 있다. 왜 그 좋은 훈민정음을 두고 남의 문자를 썼느냐고 탓할 겨를이 없다. 그렇게 한문고전을 괄호로 묶는 한 우리 역사는 일제강점기를 넘어서기도 쉽지 않다. 스스로 식민시혜론에 갇힐 수밖에 없게 된다.“ 전통은 아무리 더러운 전통이라도 좋다”는 김수영 시인의 절규가 단순한 修辭가 아닌 것이다.

돈만 아는 이도 먹고살 만해지면 산소를 돌보고 족보를 챙긴다. 나라도 어느 정도 몸매를 갖추면 그 정체성을 문화적으로 증명하려 애를 쓰게 된다. 로마에는『이니드(Aeneid)』가 있고 조선에는『용비어천가』가 있다. 19세기 말 영국은‘영국학’의 붐을 통해 제국주의의 완성을 꾀했다. 그 언저리에“셰익스피어를 인도와 바꾸지 않겠다”는 망발이 나온다. 20세기 들어 세계 열강으로 급부상한 미국은‘미국학’연구소를 한반도의 지방대학에까지 세우기에 이른다.

이제 우리도 스스로를 챙길 때가 됐다. 그런데 챙기려해도 챙길 것이 없다. 우리 선조들의 얼이 배어 있는 고전이 번역돼 있지 않기 때문이다. 꽃이 필요한데 씨앗을 미처 뿌려 놓지 않은 것이다.

그래도 늦지 않았다. 지금이 중요하다. 그렇게 믿고 싶다. 한국고전번역원에서 현재 진행하고 있는‘한국문집총간’을 번역하는 데만도 현재 인력으로는 수십 년이 걸린단다. 지방 곳곳의 향촌에 묻혀 있는 문집 등을 포괄하자면 현재의 수백 배가 넘는 국역 전문가가 필요한 것이다.

서울을 제외하고 필자가 있는 전주와 밀양에 국역연수원이 있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그러나 그것을 제대로 키워내지 못하면 예향에 부끄러움만 덧칠하는 꼴이 될 것이다. 연수원이 제자리를 잡아가고 지원생이 급격하게 늘어나 한 영문학자의 열변이, 그야말로‘영문 모르는’객담으로 치부될 수 있는 날이 하루속히 왔으면 좋겠다.

□ 이 글은 이종민 교수의『미치거나 즐기거나: 이종민의 秋水客談』(이지출판, 2015.5)에 실린 것으로, 2007년 회인서당 개원때 축사한 글을 2010년 <전북일보>에 수정해 발표한 칼럼입니다. 한 영문학자의‘객담’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판단에서, 일부 표현은 현재에 맞게 표기해 재수록합니다.

 

이종민 전북대·영어영문학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