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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민주주의의 지적 모색 … 제자가 묻고 스승이 답하다
자유민주주의의 지적 모색 … 제자가 묻고 스승이 답하다
  • 최영진 중앙대·정치국제학과
  • 승인 2015.05.19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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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 읽기_ 『정치학적 대화』 노재봉·김영호·서명구·조성환 지음|성신여대출판부|319쪽|17,000원

어떤 점에서 대단히 보수적으로 보일 수 있는 주장들이 펼쳐져 있지만, ‘진보’가 근본적(radical)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면 이들이 전개한 질문과 대답도 진보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체제의 본령인 자유민주주의의 근본적 의미와 가치를 천착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학문의 출발점은 질문이다. 제자의 질문에 스승이 답하면서 학문은 시작됐다. 동서양 학문의 원조격인 공자의 『논어』와 플라톤의 『국가』 역시 이들 간의 대화를 묶은 것이다. 그들은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고 답했다. 이를 통해 인류문명을 빛낸 위대한 古典이 탄생했다. 질문과 대답이야말로 스승이 왜 존재하는지, 위대한 학문이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말해 준다.
그런 점에서 최근 발간된 『정치학적 대화』는 사제지간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작은 사건이라 생각한다. 이미 은퇴한 스승과 현직에 있는 제자들이 지난 2년 동안 매주 월요일마다 모여 지적인 대화를 나눴다. 이 책은 이러한 2년에 걸친 지적 대화의 현장감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주인공은 노재봉 전 서울대 외교학과 교수다. 토크빌의 정치사상을 전공한 노 교수는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을 깊이 천착한 학자였다. 그의 뛰어난 학식에 반한 노태우 대통령이 강단에 있던 그를 청와대로 ‘모셨다.’ 대통령특별보좌관으로 시작된 그의 외도는 대통령 비서실장, 그리고 국무총리로 이어졌다. 주요 언론사 정치부장들과 생방송으로 토론을 벌일 정도로 뛰어난 논리력과 설득력을 갖춘 찾아보기 힘든 학자출신 국무총리였다.
질문을 던진 제자들은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정치외교학과), 서명구 2020통일한국연구위원, 그리고 조성환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다. 이들은 모두 대학원 시절부터 노 교수와 사제지간의 인연을 이어왔다. 『정치학적 대화』는 이렇게 사제지간의 연에서 출발한 2년간 이어진 학문적 만남의 결실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어떤 대화를 나눴을까. 대화의 화두들은 우리의 정치적 삶과 직결되는 의제와 이어졌다. 세월호 참사와 같은 시국현안에부터 21세기 동북아시아의 미래에 대한 전망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이다. 그만큼 한국사회가 직면한 정치적 문제가 많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들의 문제의식과 학문적 고민이 전방위적으로 펼쳐져 있다는 뜻이리라. ‘정치학적’이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의 질문과 답변은 정치사상적 맥락 위에서 상징어와 개념을 통해 제시된다. 개념적 명료함을 통해 현실의 총체적 모습을 더욱 정확하게 이해시키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이들의 대화는 다양한 주제를 오가며 전개되면서도 산만하지 않다는 미덕을 보여준다. 자유민주주의의 강화라는 굳건한 정치적 신념이 전제돼 있기 때문이다. 자유민주주의는 개인주의를 바탕에 두고 주권재민(of the people)과 민주적 절차(by the people)을 본령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근대국민국가의 텔로스와 같은 것으로 규정된다. 이런 점에서 자유민주주의를 헌정원리로 채택한 대한민국의 건국과 이를 주도한 이승만 박사의 공헌에 세계사적 의의를 부여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제자인 김영호 교수의 질문이 대한민국 건국과 발전 문제에 집중된 것도 이 때문이다. 그에게 이승만 박사가 더욱 돋보이는 이유는 국제정치의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자유민주주의를 본령으로 하는 대한민국 체제를 구축했기 때문이다. 조성환 교수가 “성공한 역사로 대한민국을 긍정해야 한다”라고 강조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노 교수는 “자유민주주의의 대안은 없다”는 오르페의 말을 인용하면서 대의제에 기반한 자유민주주의가 현실적으로 유일한 길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렇다고 자유민주주의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인정한다. 그래서 그는 자유와 평등의 딜레마에서부터 사적 탐욕과 공공성의 약화, 그리고 주권과 통치(다스림)의 불일치와 같은 근원적인 문제가 깔려있으므로 부단한 성찰과 노력으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 또한 잊지 않고 있다.
서명구 연구위원이 통치문제에 집중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세월호에서 최근 식물국회에 이르기까지 현실정치가 보여준 실망적인 모습은 국민들을 더욱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다는 문제인식이다. 노 교수는 이러한 문제의 본질을 한국사회의 ‘家督主義的(patrimonial)’ 성격에 찾는다. 가부장적 권위 아래 형성된 사적 후원-추종관계가 공적 관계를 대신하는 것이다. 대통령의 통치스타일도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가독주의의 폐해는 정치권과 관료사회의 패거리 문화와 집단적 이기주의로 나타나고 있다. 관료들의 사익추구적 형태가 비극적으로 표출된 것이 세월호 참사라 할 수 있다. “권위주의가 퇴진하면서 국가의 구심력과 통제력은 약화되고 그 자리를 공적인 힘이 아니라 사적인 힘이 메우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라는 지적이다. “통치의 무풍지대에서 관료들이 주도권을 휘두르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럴수록 통치자의 국정운영능력이 중요한데, 제왕적 권력에 매몰돼 국민이나 정치권에 대해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통치의 위기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 교수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현실을 바라보지 못하는 낭만주의적 경향이다. 민족지상주의나 자주국방과 같은 낭만적 사고는 북한의 정치적 의도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본다. 조성환 교수의 질문이 집중되는 부분이다. 조 교수는 민족지상주의와 자주성의 논리는 남한내 반미 정서를 부추기려는 북한의 공작에 말려 들어가는 것이라고 강하게 경계한다. 북핵문제가 이렇게 악화된 것도 ‘민족과 자주의 환상’에서 깨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낭만주의의 반대에는 현실주의가 있다. ‘맥락을 떠난 추상성’으로는 현실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대화를 나눈 스승과 제자들에게 공산주의와 끝까지 타협하지 않고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박사의 존재감이 더욱 빛나는 것이다. 주권재민의 원리에도 불구하고 다스림의 현실을 인정해야 하며, 미국의 헤게모니를 인정하는 ‘신중함(prudence)’도 필요한 것이다.


어떤 점에서 대단히 보수적으로 보일 수 있는 주장들이 펼쳐져 있지만, ‘진보’가 근본적(radical)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면 이들이 전개한 질문과 대답도 진보적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체제의 본령인 자유민주주의의 근본적 의미와 가치를 천착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저자들은 낭만주의적 사유를 극도로 경계하고 있지만, 이들의 만남 자체는 무척 낭만적이다. 진영논리에 갇혀 진정한 대화가 사라진 분열의 시대에 학문적 대화를 나눴다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운 일이라 할 수 있다.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지적 대화라면 응당 있어야 할 긴장과 대립, 반성과 각성이라는 깨우침의 과정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마 너무 오랜 시간 함께 했기 때문에 지적 동조가 너무 많이 진행된 것이 아닌가 한다. 어쩌면 미덕인지도 모르겠다. 자유민주주의를 고민하는 이들의 일독을 권한다.

최영진 중앙대·정치국제학과
필자는 중앙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정치,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와 예술 등에 대해 연구하며 가르치고 있다. 저서에는 『한국지역주의와 정체성의 정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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