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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의 정체성은?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의 정체성은?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05.19 14: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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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로 읽는 신간_ 『지배받는 지배자: 미국 유학과 한국 엘리트의 탄생』 김종영 지음|돌베개|318쪽|16,000원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 이론은 한국 지식인의 계층화를 지식 생산의 글로벌 위계 안에 위치시킨다. 미국과 한국 사이의 ‘중간에 끼인 존재’로서 이들은 글로벌(미국 또는 서구) 지식 집단과 로컬(한국) 지식 집단의 ‘지식 간극(knowledge gap)’의 중간에 위치하며, 지식 매개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이런 종류의 지식인은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존재해왔다. (……) 미국 유학은 지식 생산의 트랜스내셔널 이해관계에 놓이게 되고, 한국 지식인은 미국 대학과 한국 대학의 지식 간극의 중간에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 이들은 서구의 지배적인 주류 지식인 집단에 비해 그 수와 영향력이 작고, 학문의 아류일 가능성이 크며, 학문 생산의 질이 떨어지는 ‘지식인 소수자’ 집단을 이룬다.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은 대학의 글로벌 위계 속에서 탄생한다. 미국 대학은 지식 생산의 글로벌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으며, 한국 대학은 상대적으로 열등한 위치를 차지한다. 대학은 지식과 지식인의 생산이라는 이중의 역할을 담당하며, 이는 서로 연결돼 있다. 지식 생산은 특정한 기술사회적 하부구조 안에서 이뤄지며, 지식인은 이 생산 과정의 주체다. 여기서 미국 대학은 한국 대학보다 월등히 우월한 지식 생산 구조를 가짐으로써 세계 지식체계를 선도해나간다. 미국 대학과 한국 대학은 지식 생산 능력에서 큰 격차를 보이는데, 한국인 유학생들은 이 간극에서 트랜스내셔널 기회를 포착한다.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은 어떤 의미에서 지식 생산의 경제적 지위를 뜻하며, 지식인의 계급적 질서에서 중간적 위치에 있음을 의미한다. 미들맨 소수자가 식민지적, 전근대적 상황에서 출현하듯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은 한국 학계의 지적 식민성과 전근대성 속에서 탄생한다.


미국에서 교육받은 한국 지식인들은 귀국하거나 미국에 정차한다. 트랜스내셔널 이동의 상황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미식인은 미국에서 생산된 지식을 한국으로 수입하는 역할을 하며, 이를 한국 실정에 맞게 변형, 적용시킨다. 이들의 한국에서의 지식 생산은 일반적으로 미국의 연구 중심 대학보다 독창성, 중요성, 파급력이 떨어지는데, 이는 연구 자원의 부족, 연구 인력의 전문성 부족, 연구 인정 체계의 파편화, 연구 집중 강도의 약화, 연구 문화의 파벌화와 정치화, 한국 학문 공동체의 천민성(pariahhood)으로부터 기인한다. 따라서 트랜스내셔널 미들맨 지식인의 주요 생존 전략은 미국에서 생산된 지식을 빨리 받아들여 한국의 로컬 지식인들에게 판매하는 것이다. 미국에서 훈련받는 한국 지식인들은 영문 저널 투고, 국내외 특허 출원, 연구의 글로벌 네크워칭에 참여해 세계적인 지식 생산에 기여함에도 불구하고 중요하고 독창적인 연구 성과를 내지 못하고 세계 지식 체계의 주변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다.


유학 후 미국에 정착하는 경우 한국 지식인들은 미국의 대학과 기업에서 미국인들과 같이 지식 생산에 참여하게 된다. 일부는 탁월한 지식 생산을 하지만 대부분은 지식 생산의 상층부에 진입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지식 생산의 탁월함이라기보다 이민 사회의 전문가로 살아남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궤적은 백인 중심의 미국 전문가 사회의 인종적, 언어적 질서 속에서 제약을 받는다. 또한 이들은 영어가 완벽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식 생산의 리더십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데, 이는 곧 연구와 사회 네트워크 확장의 어려움을 뜻한다. 이러한 언어 자본과 사회자본 확충의 어려움 때문에 미국 사회에서 보이지 않는 장벽을 경험하면서 이들의 학문적, 전문가적 야망은 떨어지게 된다. 상당수의 지식인들은 한국으로 돌아와서 주류적인 위치를 점하려고 하는데 이는 트랜스내셔널 기화와 연관된다. 미국에 정착한 한국 지식인들도 미국 지식 생산 체계의 상층부를 차지하기 힘들기 때문에 중간자적 역할을 수행하는 데 그친다. 이들이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중간자적 역할은 달라진다. 예컨대 대학에서는 학문적 리더들과 추종자들 사이, 기업에서는 상층부 요직과 하층부 생산직 사이의 중간에 위치하게 된다.


한국과 미국 사이에 낀 미들맨 지식인은 끊임없는 정체성 혼란을 경험한다. 한국에 정착한 지식인들은 미국과 한국의 학문 공동체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침으로써 어디에 소속돼 자신의 연구와 삶을 헌신할지 고민한다. 미국 유학을 통해 형성된 이들의 리버럴 아비투스는 한국 사회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유교적, 가부장적 질서와 충돌한다. 미국에 정착한 지식인들은 ‘트랜스내셔널 이방인 엘리트’로서 전문가적 성공을 거두지만 백인 중심의 인종적 질서와 영어 중심의 언어적 질서에서 소외감을 느낀다. 이들은 경제적으로는 주류에 속하지만 사회적, 정치적으로는 비주류에 속하는 모순을 경험한다.

저자인 김종영 교수(사회학과)는 일리노이대(우르바나)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과학기술사회학 분야에서 다양한 지적 작업을 펼쳐왔다. 논문으로는 「대항 지식의 구성」, 「전통적 지식의 정치경제학」 등이 있다. 향후 『지식정치와 사회운동』 등의 책을 구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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