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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한국 자본주의와 칼 폴라니 연구소 출범의 의미
21세기 한국 자본주의와 칼 폴라니 연구소 출범의 의미
  • 교수신문
  • 승인 2015.05.12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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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다호메이와 노예무역: 어느 고대적 경제의 분석』 (칼 폴라니 지음|홍기빈 옮김|도서출판 길 ) ·『칼 폴라니, 새로운 문명을 말하다』 (칼 폴라니 지음|홍기빈 옮김|착한책가게)

 

폴라니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로 구성되는 사회의 실재를 무시하고 사회 전체를 시장경제의 영역으로 포섭하려는 억지를 계속한다면, 이는 끝없는 긴장을 낳고 결국 시장경제 자체마저 파국으로 치닫게만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칼 폴라니 사회경제 연구소 협동조합이 지난 4월 24일 서울 불광동 사회혁신파크에서 개소식을 가졌다. 칼 폴라니는 헝가리 출신의 경제사가이자 사회사상가로서, 1944년에 출간된 그의 주저 『거대한 전환』(홍기빈 옮김, 도서출판 길)은 그동안 사회과학과 역사학의 고전으로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2008년 세계 경제 위기 이후 다시 뜨거운 관심을 모으고 있어 오늘날 가장 인용횟수가 많은 저서의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캐나다 몬트리올의 콘코디아대에 있는 칼 폴라니 정치경제 연구소(Karl Polanyi Institute of Political Economy)는 1990년 이래 지금까지 격년으로 세계 학술대회를 조직해왔으며,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프랑스 파리에도 칼 폴라니 연구소 지부가 생기기도 했다. 이번에 서울에서 문을 열게 된 칼 폴라니 사회경제 연구소 또한 그러한 흐름 속에서 아시아 지역에서의 지부로서 설립된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끊임없는 논란을 낳고 있는 가장 심각한 질문의 하나는 바로 경제와 사회의 관계다. 주지하듯이, 지난 30년간 전 세계의 지배적 사조가 된 이른바 신자유주의 시대의 담론은 철저하게 시장 원리에 입각해 조직된 경제가 사회의 거의 전부를 포섭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인간 세상의 경제 활동 나아가 여타 영역에서의 활동까지도 최대한 상품으로 전환시켜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내맡겨서 올바른 가치를 매긴다면 가장 효율적이고 이상적인 자원의 배분과 사회 조직의 최적화가 달성될 것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모든 사회의 영역을 시장으로 포섭시킨다는 프로젝트는 지구촌 곳곳에서 거센 저항 운동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2008년의 세계 금융 위기 이후에는 그것이 과연 스스로가 표방하는 ‘과학적 진리’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심과 회의에 맞닥뜨리게 된다. 정말로 사회의 전 영역을 시장 경제에 종속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가는 고사하고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사회라는 실재’는 엄연히 시장 경제의 바깥에 버티고 있으며 그것과 끊임없는 길항 작용을 일으키는 존재가 아닐까. 따라서 진정으로 효율적이면서도 인간에게 자유와 도덕의 추구를 가능케 하는 산업 사회의 조직은 그러한 막연한 시장 근본주의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와 사회의 관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이해에 근간해 각자가 제자리를 찾아 제대로 된 관계를 정립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경제 사상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닐까.


이미 반세기전에 타계한 칼 폴라니의 사상에 대해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뜨거운 관심이 되살아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할 것이다. 그는 아담 스미스와 칼 마르크스 이후 현대인의 의식에 깊숙이 뿌리박은 ‘경제주의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도발적인 명제들을 던지면서 근본적인 전환을 꾀했던 이였기 때문이다. 그는 시장 경제의 자기 조정 작용에 근간이 되는 노동, 토지, 상품 화폐 등은 인간, 자연, (신용) 화폐를 억지로 시장에 밀어 넣은 ‘허구적 상품’일 뿐이며 따라서 완벽하게 작동하는 시장 경제란 결코 현실에 실현될 수 없는 유토피아라고 갈파했다. 이렇게 엄연히 존재하는 인간과 자연의 관계로 구성되는 사회의 실재를 무시하고 사회 전체를 시장 경제의 영역으로 포섭하려는 억지를 계속한다면 이는 끝없는 긴장을 낳고 결국 시장 경제 자체마저 파국으로 치닫게 만들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경제란 본래 개인과 집단의 ‘좋은 삶’을 가능케 할 물적 수단을 조달하는 행위임을 기억할 것이며, 사회 속에서 인간들이 그러한 ‘좋은 삶’을 추구하면서 벌이고 맺는 무수한 활동과 다양한 관계를 인정하면서 그 속에 경제적 활동이 다시 묻어 들어가도록 경제적 관계를 재조직할 것을 주장한다.


이러한 폴라니의 사상은 특히 반세기에 걸친 압축적 고도성장의 끝물에서 그 후유증에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 사회에 큰 적실성을 가진다. 경제 성장과 자본 축적이라는 목표 아래에 모든 사회적 영역에서의 가치와 관계를 철저히 복속시킨다는 점에서 과연 대한민국을 능가할 나라가 몇이나 될까. 눈부신 고도성장의 뒷면에서는 사회와 생태 영역의 잠식과 파괴가 진행돼 온 결과 우리는 이제 아이를 낳아 기르기도 또 서로 믿고 힘을 합치기도 힘든 세상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이는 시장 경제의 활력 자체를 갉아먹기 시작해, 이제 우리는 장기적인 저성장과 만성적인 실업의 늪에 빠져들고 있으며, 그 와중에 불평등은 그 속도를 더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 경제 시스템이 지속가능하다고 생각할 이는 과연 얼마나 될까.
이번에 출범한 칼 폴라니 사회경제 연구소는 칼 폴라니의 사상을 연구 확장해 한국 사회가 이러한 기존의 경제 패러다임에 대한 맹신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회 경제 시스템으로의 ‘거대한 전환’을 이루는 데에 일조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폴라니 관련 문헌들의 번역과 연구는 물론, 그동안 ‘제 3부문’ 등의 이름으로 주변화돼 있었던 사회적 경제(social economy)의 발전을 위한 이론적 연구와 현실의 제도 및 정책의 개발을 위해 노력할 것이다. 또한 폴라니의 경제 패러다임에 입각해, 국가 및 공공부문, 기업 및 시장 경제, 사회적 경제의 세 영역이 함께 조화를 이루면서 진정한 ‘좋은 삶’의 확장으로서의 경제 발전을 꾀하는 ‘다원적 경제 발전 ’의 모델을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이번에 연구소 출범에 맞춰 새로이 번역 출간된 폴라니의 두 저서의 의미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먼저 『다호메이와 노예무역: 어느 고대적 경제의 분석』은 18세기 서아프리카에 있었던 다호메이 왕국의 경제 제도를 분석한 고전으로서, 국가의 효율적인 행정 기술을 통해 국가 권력과 사회의 자율성이 절묘한 균형을 취하는 가운데 강력한 중앙 경제 계획과 자유롭고 활발한 시장 거래와 대외 무역이 함께 어우러지는 모습을 세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결 속에서 경제 계획과 자유 시장이 마치 양립불능의 상극의 것들인 것처럼 여겨지던 냉전 시대의 세계에 폴라니가 죽기 전에 던지고자 했던 메시지라고 볼 수 있다.


『칼 폴라니, 새로운 문명을 말하다』는 폴라니의 미출간 에세이와 강연을 골라 묶은 것으로서, 19세기의 자기조정 시장을 낳았던 유럽 문명의 정신적 문화적 태도에 대한 다각적인 분석 그리고 새로운 사회 경제 시스템의 건설을 위한 사고의 전환을 경제사, 민주 정치, 교육 제도 등 다양한 영역에서 촉구하는 영감이 넘치는 글들을 담고 있다. 올해 내로 『인간의 살림살이』(이병천 역, 후마니타스)가 출간될 것이며, 다른 주저인 『초기 제국에서의 교역과 시장』 또한 내년 출간을 목표로 번역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칼 폴라니 사회경제 연구소는 협동조합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시장 근본주의와 경제 성장의 맹신을 벗어난 새로운 사회 경제 시스템으로의 전환은 다양한 이들의 협력과 연대를 필요로 한다. 사회적 경제의 활동가들과 정책 및 제도를 만들어나갈 공직자들도 중요한 축이지만, 이와 똑같이 폴라니의 경제 사상을 연구하고 공유해 경제와 사회의 올바른 관계와 위치를 설정할 수 있는 설계도를 만들어나갈 연구자들의 역할과 참여가 대단히 중요하다. 많은 연구자들이 칼 폴라니 사회경제 연구소에 관심을 가지고 조합원으로 참여할 것을 바라마지 않는다. 한 두 사람의 열정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너무나 큰 작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조합원 가입은 인터넷 홈페이지 www.kpia.re.kr 에서 가능하다.

홍기빈 칼 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연구위원장3
필자는 캐나다 요크대(토론토) 정치경제학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재)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으로 있으며, 저역서로는 『비그포르스, 복지국가와 잠정적 유토피아』, 『자본의 본성에 관하여』 (역서) 등 다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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