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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왕실 위해 특별 제작 … 최상층의 화려한 생활 엿보여
고려 왕실 위해 특별 제작 … 최상층의 화려한 생활 엿보여
  • 김대환 문화재평론가
  • 승인 2015.05.12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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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환의 文響_ (6)은도금모란무늬받침잔(銀製鍍金牧丹文托盞)

▲ 사진1. 은도금모란무늬잔. 잔받침

잔과 잔 받침의 알맞은 비례감이 器形의 곡선과 어울려서 유려함과 세련됨을 동시에 느낄 수 있게 하며 잔은 6옆의 꽃모양으로 각 면과 골 사이에는 화려한 모란무늬를 섬세하게 毛彫技法으로 陰刻했다.

1991년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은 「고려의 금속기와 도자기」 조선도자 시리즈-16 특별전을 개최했다. 도쿄국립박물관, 나라국립박물관, 고려미술관, 일본민예관, 대화문화관, 오도미술관 등의 유물과 개인소장품까지 60여점의 고려시대 금속유물과 청자가 출품돼 비교 전시하는 것으로 고려시대 공예품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자리였다. 고려시대 靑銅器와 陶磁器의 제작시기와 상감기법의 起源問題를 비교분석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으로 이미 24년 전에 일본 연구자들이 고려청자 연구방법의 한 방향을 제시한 데 의의가 있었던 큰 전시회였다.


▲ 사진2. 청자상감국화무늬잔. 잔받침
그런데 필자에게는 의외의 성과가 있었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고려시대 금속유물의 出品으로 고려청자에 가려져서 제대로 조명 받지 못했던 고려시대 금속공예품의 다양한 기형과 수준 높은 예술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특히 도쿄국립박물관에서 출품한 銀細工品(銀鍍金陰刻草花文托盞)이 매우 희소한 경우로 눈길을 끌었다. 이러한 器形의 탁잔은 고려시대에 도자기로 만들어진 사례는 많이 있으나(사진2) 금속기인 銀으로 만든 사례는 국내에는 국립중앙박물관에 파손된 한 점을 포함해 몇 점만이 전해지고 있고, 일본에는 단 두 점만이 알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도 도금이 벗겨지고 은이 부식돼 검게 변해 보존상태도 좋지 못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가 최근에 조사한 銀製鍍金牧丹文托盞(사진1)의 유물을 통해 고려시대 상감청자뿐만 아니라 금속공예품의 세계적 수준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려시대 금속공예품의 범위는 생활용기, 제례기, 장신구 등 다양하며 材質도 금, 은, 청동, 철 등 용도에 따라 세분할 수 있다. 제작기법으로는 기본적인 몸체성형의 鑄造技法, 鍛造技法에 세부적인 문양의 새김인 毛彫技法, 打出技法, 魚子文技法, 象嵌技法, 금속의 접합기술인 接技法과 마무리작업에 해당하는 鍍金技法이 있다.
이 탁잔은 단조기법의 일종으로 銀板을 오려 펴서 두드리고 접어 모양을 만들고 최종 접합(銀接)해 만들었다. 잔과 잔의 굽, 받침의 전 부분, 굽 부분, 잔 받침의 다섯 부분으로 나눠 제작한 후 접합했다. 접합방법은 접합할 부분에 은가루나 작은 은조각을 몸통에 올려놓은 다음에 가열해 녹으면 바로 접합체를 붙이는 방법이다. 물론 각 부분의 정교한 문양은 접합 이전에 어자문기법, 타출기법, 毛彫技法으로 조각하고 마지막 공정으로 鍍金을 함으로써 완성했다(사진3).

▲ 사진3. 잔을 내려놓은 상태.

잔과 잔 받침의 알맞은 비례감이 器形의 곡선과 어울려서 유려함과 세련됨을 동시에 느낄 수 있게 하며 잔은 6옆의 꽃모양으로 각 면과 골 사이에는 화려한 모란무늬를 섬세하게 毛彫技法으로 陰刻했다. 음각기법은 정으로 일일이 쪼아서 문양을 새겼는데 그 간격과 선이 일정해 숙련된 솜씨를 훨씬 뛰어 넘는다. 입술 부분과 굽의 접지면은 부드럽게 턱을 만들어 접었고 연꽃잎 무늬를 돌려 새겼으며 나팔형으로 벌어진 굽은 안정감이 있다. 잔 받침은 받침부분과 넓은 손잡이의 전 부분, 굽 부분으로 가장자리는 모두 부드러운 턱을 만들어 접합했으며 모란무늬와 연꽃잎을 화려하게 쪼아서 毛彫技法으로 조각했다(사진4).
특히 잔 받침부분은 바탕에 魚子文技法의 사용과 陽刻의 효과를 나타내는 打出技法으로 측면은 물론 잔을 올려놓는 윗면까지도 富貴를 상징하는 세 송이의 모란꽃나무가지 무늬를 섬세하게 조각했다(사진5). 또한 굽은 잔의 굽과 마찬가지로 나팔형 굽으로 안정되게 벌어져 일체감과 균형감을 느끼게 한다. 鍛造品이라서 가볍고 튼튼하며 화려한 金鍍金이 잘 남아있어서 고려시대 최상층의 화려한 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上品의 官窯靑磁도 매우 귀했지만 金銀器 역시 귀했을 것이다. 이 탁잔 전체의 높이는 12㎝이고 폭은 16.2㎝다.

▲ 사진4. 잔받침 무늬
盞과 넓은 전이 달린 잔받침(盞托)이 한 쌍으로 이뤄진 이러한 형식의 탁잔들은 중국의 송나라 것을 모방해 만들어졌다고 보는 견해가 다수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미 삼국시대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사례를 비롯해 여러 점이 전해지고 있어서 속단하기에는 이르다(사진6). 중국과의 교류에 의해서 어느 정도 器形의 완성도에 기여했을 수는 있지만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기형이 중국의 영향으로 탄생한 것은 아니다. 현존하는 유물의 양으로 봐 고려시대에 들어서면서 일반화돼 도자기나 금속기로도 많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래된 유물은 도자기 탁잔의 수량이 월등히 많고 靑銅이나 銀으로 만든 후에 도금한 유물도 몇 점 전해지고 있다.
도자기 탁잔의 경우에 고려 초기부터 고려 말에 걸쳐 전시대의 작품이 많이 남아있고, 수준 높은 官窯靑磁와 일반적인 粗質靑磁의 탁잔이 상존하는 것은 고려시대에 신분의 구분 없이 茶文化를 즐겼다는 것을 시사한다. 실제로 고려왕실에는 茶를 전담하는 기구인 茶房을 설치하고 왕이 행차할 경우에는 수행하는 茶軍士를 둬 생활의 필수요소로 자리 잡았다. 왕실의 茶文化는 당시 國敎였던 불교와 함께 寺刹에도 영향을 미쳐 사찰주변에 茶村이 형성될 정도로 번성했으며 지방호족들을 중심으로 전국적으로 번져 일반 백성들 사이에서도 茶所나 茶店이 생겨났다.


1123년 고려국을 방문한 송나라 사신 徐兢(1091~1153년)의 使行錄인 『宣和奉使高麗圖經』에는 고려국 왕실의 接賓茶禮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 있다. “하루 세 번 使臣에게 차를 대접하는데 뜰 가운데서 차를 끓인 후 순서대로 차를 돌린다. 차를 다 돌릴 때까지 기다리다가 함께 마시는데 기다리다가 차를 마실 때쯤이면 식어서 맛이 없다.” 왕실에서 사신에게 하루 세 번씩 차를 대접했다는 것은 차 문화를 중요시 여겼다는 것이고 차를 다 돌릴 때쯤 차가 식어 버린다는 것은 적어도 수십 명의 대신들과 함께 차를 마셨다는 뜻이 된다.
고려시대 왕실, 사찰, 지방호족, 일반백성에까지 생활화된 차문화의 발전은 아울러 茶道具의 생산을 촉진시키고 신분에 맞는 器物이 제작됐는데 높은 신분의 왕족과 귀족들은 화려한 金銀器나 官窯靑磁를 선호했을 것으로 보인다.

▲ 사진5. 타출기법의 모란무늬

이 銀製鍍金牧丹文托盞은 金鍍金 위에 묻어있던 소량의 유기물과 침착물을 제거하고 불순물만 닦아냈는데도 워낙 遺物의 상태가 양호해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다. 고려시대 冶金과 工作을 전담하던 관청인 掌冶署에서 왕실을 위해 특별히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銀鑛石의 채굴에서 제련, 세공, 금도금까지 金屬을 마치 粘土 다루듯이 능수능란하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공정을 끊임없이 개발하고 발전시킨 高麗의 匠人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이것은 결국 후세에 남길 수 있는 名品을 誕生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 사진6. 백제무령왕릉 출토 은잔 잔받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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