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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한 카자흐 초원의 분열 … 힘의 논리가 만든 역사의 아이러니
광활한 카자흐 초원의 분열 … 힘의 논리가 만든 역사의 아이러니
  •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5.05.07 10:3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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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 38. 중앙아시아 초원에서(2): 중앙아시아의 거인 카자흐스탄

 

▲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사원)에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 속 코끼리가 등장하는 쿠룩세트라 전투장면을 묘사한 浮彫. 사진 출처:http://www.dreamstime.com

힘은 논리를 뛰어넘는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의 요지를 속속 자신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강자의 기준에 따라 영토 획정이 이뤄져 주민의대부분이 타지크족인 사마르칸트가 타지키스탄에 속하지 않고 우즈베키스탄에 속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생명은 소중하고, 사랑은 더 소중하다. 그러나 자유를 위해서라면 나는 둘 다 버릴 수 있다.” ―헝가리 국민시인이자 자유혁명가인 페퇴피 산도르(Pet¨ofi S´andor: 1823-49년)의 시 「사랑과 자유」 중에서

1848~9년 합스부르크家에 대항해 발발한 헝가리 혁명. 그것은 혁명이자 자유를 위한 전쟁이었다. 그때의 주요 인물들 가운데 한 사람이 슬로바키아계 헝가리인 페퇴피.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자유에 대한 사랑뿐이었다. 그의 신조를 보여주는 멋진 글귀가 있다.
“자유와 사랑, 이 둘이 내게 있어야 한다. 사랑을 위해서는 목숨을 버릴 수 있으며, 자유를 위해서라면 사랑을 희생할 수 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에게 이런 비장함은 때로 부담스럽다. 잠시 순진했던 시절, 그때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 보자.
“코끼리 아저씨는 코가 손이래. 과자를 주면은 코로 받지요.”
생각해보니 까마득하게 오래 전 일이다. 아이들과 함께 「코끼리 아저씨」라는 동요를 부르며 창경원에서 코끼리 구경을 하던 때가. 『法句經』은 코끼리를 통해 인생사의 지혜를 설파한다.
“320. 전장에 나가 싸우는 코끼리/ 화살을 맞아도 참고 견디듯/ 나도 사람들의 비난을 참고 견디며/ 묵묵히 내 갈 길을 가자.
321. 잘 훈련된 코끼리는/ 왕을 태우고 전쟁터로 나아가나니/ 날아오는 비난의 화살을/ 잘 참고 견디는 사람은/ 인간 가운데 최고의 인간이다.”
동물원에서밖에 코끼리를 보지 못하는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상상이 안 가는 노릇이지만, 이렇듯 과거 다른 나라에서는 전쟁 시 코끼리가 등장했던 모양이다. 코끼리가 말과 더불어 전쟁에서 사용됐다는 사실은 힌두교와 불교 경전 등에 심심찮게 기록돼 있다. 코끼리를 타고 싸우는 코끼리군단에 대해서는 서사시 『마하바라타(Mahabharata)』와 고대인도의 兵書에도 언급돼 있다.


『마하바라타』를 살펴보기 전 먼저 알렉산더의 동방정벌군을 만나보자. 기원전 331년 아케메네스왕조의 페르시아를 침공한 알렉산더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건너 진격해 들어간다. 페르시아는 이에 맞서 대군을 모아 마케도니아군(그리스군)의 진로를 막고 포진한다. 전투가 벌어진 곳은 오늘날 이라크의 모술 근처의 가우가멜라(Gaugamela) 평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는 상대적으로 병력이 열세인 마케도니아군을 맞아 자신의 대군을 이끌며 효과적으로 진을 펼칠 수 있도록 넓고 평탄한 가우가멜라 평원을 전투장소로 정해 미리부터 기다리고 있다. 플루타르크에 의하면 가우가멜라라는 말은 ‘낙타의 집’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 역사적 전투를 아르벨라 전투(the Battle of Arbela)라고도 부른다.
병력의 규모면에서 알렉산더의 군대는 페르시아 군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다리우스 황제는 동방과 동맹 스키타이 부족들에게서 우수한 기병을 모으고 전차 200대와 인도산 전투 코끼리 15마리도 포진시켰는데 이를 처음 본 알렉산더는 놀라서 혼비백산 상태였다고 한다. 겨우 열다섯 마리의 코끼리를 보고 다리가 후들거린 것이다. 서양이 모르는 동양에서는 이보다 스케일이 더 컸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알렉산더의 손을 들어줬다. 막강한 페르시아군과 싸워 뜻밖의 승리를 거둔 알렉산더는 승리의 기쁨에 들뜬 병사들의 사기를 믿고 그 여세를 몰아 인도로 쳐들어갔다. 정확히는 기원전 325년의 일이다. 오늘날 인도 펀자브 지방에 있는 베아스(the Beas) 강변에 당도한 그는 이내 인도 침공의 야망을 접어야 했다. 왜일까.
사실 인더스 강의 지류인 베아스 강은 유속이나 규모로 봐 강이라기보다는 작은 시내에 가깝다. 말 등에 올라 뛰어넘으면 말발굽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을 정도로 폭이 좁다. 불패 신화의 군대를 이끈 알렉산더가 베아스 강 이남으로 전진하지 못한 까닭이 바로 엄청난 규모의 코끼리군단 때문이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황제가 거들먹거리며 위용을 뽐내던 코끼리의 수가 겨우 15마리에 불과했는데, 강 건너에서 그리스 군대를 기다리고 있는 인도 군대에는 무려 100여 마리의 코끼리가 앞장 서 자리 잡고 있으니 사기가 꺾이고도 남음이 있었을 것이다. 물론 다른 해석도 있다. 휘하 장수들의 전쟁 포기 종용과 같은, 이제는 고국에 돌아가고 싶다는 강렬한 바람 같은.
앞서 말했듯 『마하바라타』에도 코끼리 전투 장면이 등장한다. 그리고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wat, 사원)에 이 장면이 부조로 묘사돼 있다. 부조의 내용은 지금의 인도 델리 부근 쿠룩세트라 평원(Haryana주에 속함)을 무대로 벌어지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전쟁, 이름하여 쿠룩세트라 전쟁(the Battle of Kurukshetra) 이야기. ‘Kuru왕의 영지’라는 말 쿠룩세트라는 ‘聖地(holy place)’라는 뜻의 다르마크세트라(Dharmakshetra)라고도 알려져 있다. 여기는 그 유명한 바가바드 기타(Bhagavad Gita)가 설해진 곳이기도 하다.


현재 아시아 코끼리의 서식지는 인도, 태국, 미얀마, 라오스 등 아열대 지역이다. 그러나 춘추전국시대(기원전 770~221년) 이전인 기원전 1천년 무렵에는 중국 대부분의 지역에서 코끼리를 전투에 이용했다. 그 결과 많은 코끼리가 죽었다. 그 이후로도 거의 2천여 년 동안 중국인들은 간헐적으로 코끼리를 전투에 이용했다. 『明太祖實錄』이 전하는 내용은 웅장한 스케일의 전쟁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1388년 3월 반란군 思倫發은 총병력 30만 명과 100마리가 넘는 코끼리를 동원했다. …… 적의 우두머리와 지휘관들은 모두 코끼리에 올라탔으며, 그 코끼리들은 모두 갑옷을 둘렀다. 코끼리의 등에는 마치 난간처럼 만든 戰樓가 설치됐으며, 코끼리 양 옆에는 측면으로부터의 공격에 대비해 짧은 창을 넣어둔 죽통이 달려있었다. 양측의 군사가 교전을 시작하자 코끼리떼가 서로 부딪치며 계속 전진했다. …… 이때 반이 넘는 코끼리가 죽었지만 코끼리 37마리를 생포했다.”
이로부터 200년이 지나(명나라 말기) 중국 남서부 지역에서는 만주족에 대항하기 위해 비한족 지역에서 코끼리를 징발해 부분적으로 군대 수송에 활용했다. 그러나 1622년 이후 코끼리가 사라져 더 이상 중국에서 코끼리를 이용한 전쟁은 목격할 수 없게 됐다.


말이 난 김에 東周時代의 다른 이름인 춘추전국시대에 대해 약간의 설명을 해야겠다. 먼저 春秋란 단순히 봄가을이라거나 연세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공자가 편찬한 魯나라의 편년체 사서 『春秋』에서 다루고 있는 시대(기원전 770~403년)를 가리키며, 戰國이란 『戰國策』에서 다루고 있는 시대 즉 대국들이 패자의 자리를 놓고 치열하게 다투던 시대(기원전 403~221년)를 지칭한다. 좀 달리 말하자면 춘추시대란 노나라 은공 원년인 기원전 722년에서 애공 14년인 기원전 481년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환경사의 측면에서 볼 때 이 무렵 중국의 기후는 현재보다 추웠다고 한다. 기후변화가 왕조의 종말이나 제국의 분열 등 역사변화와 연관이 있을까? 답은 그렇다다. 춘추시대 이전인 기원전 1천년 경 존재했던 고대 西周 왕조의 종말은 혹독한 추위 때문에 발생했다. 북중국 일대와 그 위쪽 지역인 漠北 초원지대의 기후가 한랭건조해지면 초원과 삼림지대의 유목민들은 남쪽으로 이주하거나 약탈 목적의 침략을 시도했다. 12세기 이후 송제국의 몰락을 가져온 배경도 극심한 추위였다. 견디기 어려운 혹독한 추위 때문에 여진과 뒤이어 몽골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왔다. 이때 太湖가 결빙됐다고 한다.
기후변화는 동식물의 생태계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놀라지 마시라. 4천년 전 중국의 북동지역인 현재의 북경 일대는 물론 중국 대부분의 지역에 코끼리가 서식하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오늘날에는 미얀마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남서지역의 작은 보호구역에만 코끼리가 살고 있다. 장기간에 걸친 코끼리의 후퇴는 상당 부분 기후변화에 기인한 것이다. 코끼리는 추위에 약하다.

▲ 구글 어스가 보여주는 발하슈 호 및 그 주변 지도와 거의 똑같은 오늘날의 제티수(Zhetysu, 七河)지역이 포함되어 있는 중가르 汗國(the Zunghar Khanate) 지도. 1716-33년 중가르 한국에 포로로 잡혔던 스웨덴 장교가 그렸다. 출처: http://en.wikipedia.org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도 코끼리가 있을까? 당연히 없다. 그러나 과거에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알마티 시내 자연박물관에서 찾을 수 있다. 과학대학 동물학 연구기구중 하나인 이곳은 고생물학과 동물학 두 분야를 주 테마로 전시관을 운영하고 있다. 여기에 공룡의 원형 화석, 거대한 코뿔소, 마스토돈, 매머드, 코끼리 등의 다양한 長鼻類(proboscidean)와 고대 거대 돼지, 거북화석 등을 전시하고 있어 쥐라기 공원을 연상케 한다. 알마티 소재 자연 박물관에 카자흐 평원에서 출토된 코끼리를 위시한 장비류의 유골과 화석이 전시돼 있다는 것은 옛날 이 지역에 코끼리가 서식했다는 증거다. 지금 코끼리가 사라지고 없는 이유는 중국의 사례에서 보듯 기후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이제 광막한 초원에 자신들의 이름을 준 카자흐족의 風雲의 역사를 더듬어보자. 이들이 역사의 무대에 이름을 알린 건 15세기 중엽이 돼서다.


우즈벡의 리더였던 아불 하이르 칸의 압박을 받은 일단의 유목민들―이들은 시르다리야 강 중류 유역을 근거지로 삼고 있었다―은 아불 하이르와 마찬가지로 칭기즈칸의 큰 아들인 조치 가문의 일원이던 자니 벡(Janibeg)과 케레이 혹은 기레이(Kerei or Girey)를 따라서 모굴리스탄 변경으로 이주했다. 이들을 우즈벡-카자흐 혹은 그냥 카자흐라 부르는데 이들이 바로 오늘날 카자흐족의 기원이 됐다.
우즈벡의 아불 하이르가 세상을 뜨자 우즈벡 울루스(Ulus, 國)는 곧바로 분열 상태에 놓이게 됐다. 울루스를 구성하고 있던 많은 유목민들이 자니 벡과 케레이를 칸으로 떠받들었는데, 그 수가 무려 20만 명에 달했다. 구심력이 떨어진 우즈벡인들이 마 와라 알 나흐르(하중지방, 즉 소그디아나)로 이주하는 틈을 타 카자흐족은 킵착 초원의 여타 유목민들을 휘하로 받아들이고 자니 벡의 아들 카심 칸(재위: 1511~1518년)의 시대에는 강력한 유목국가로 성장했다. 이들은 적어도 18세기 전반까지 시르다리야 강을 거점으로 나름대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었다.


그러나 용병 집단 코삭을 앞세운 러시아 세력이 야금야금 카자흐 초원 북변에 다다를 즈음 유목민 카자흐족은 이미 정치적 통합성을 상실하고, 서쪽으로부터 Kishi-juz, Orta-juz, Ulu-juz라는 3개의 부족 연합체로 나눠져 있었다. Juz는 본래 ‘百’을 의미하는 말이다. 키시 쥐즈는 小 오르다(orda, 정치 군사 사회 집단, ulus와 같은 말)라고 번역되며 노가이 칸국(the Nogai Horde)의 노가이족에게서 기원한 집단으로 그 영역은 우랄 강 하류에서 사리수(Sary Su, ‘黃河’)까지였다. 中 오르다인 오르타 쥐즈는 악튜빈스크와 세미팔라틴스크 사이의 카자흐 초원 중부를 차지한 주요 집단이다. 울루 쥐즈, 즉 大 오르다는 제티수(Jeti Su, 七河, 러시아말로는 세미레치에) 지방을 근거지로 한 전통적 카자흐 집단이다.
이때는 러시아가 영국과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기 전이다. 게임의 무대는 발칸반도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 때는 19세기 중엽. 이미 투르키스탄의 전략적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던 러시아는 크림 전쟁(1853~6년)을 치른 후, 1864년 코칸드 칸국에 대한 공격을 시작으로 이듬해인 1865년에는 중앙아시아의 주요 도시 타시켄트를 점령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런 군사적 행동의 배경에는 경제적 동기가 숨어 있었다.


힘은 논리를 뛰어넘는다.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의 요지를 속속 자신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코칸드 칸국이 무너지며 페르가나, 부하라, 히바, 사마르칸트, 메르브 등이 러시아 제국의 일원이 됐다. 그리고 광활한 카자흐 초원을 포함해 중앙아시아 전 지역이 러시아의 식민지가 됐다. 강자의 내 맘대로 식 기준에 따라 영토 획정이 이뤄져, 과거의 汗國(khanate) 중심의 중앙아시아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의 국가 형태로 분할됐다. 그러다보니 주민의 대부분이 타지크족인 사마르칸트가 타지키스탄에 속하지 않고 우즈베키스탄에 속하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이들이 러시아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건 1991년의 일이다. 백년 넘는 세월동안 러시아의 지배를 받은 것이다.


중앙아시아의 거인 카자흐스탄 이모저모

영토 면적 2백72만4천900㎢로 세계에서 아홉째로 큰 나라(남한 면적의 약 30배). 가장 큰 내륙국. 인구는 2015년 현재 1천7백94만8천816명으로 세계 62위. 땅이 워낙 넓다보니 인구 밀도가 겨우 5.4명/㎢로 세계 215위. 수도는 알마티에서 1998년 아스타나로 옮겼다. 그래도 최대 도시는 여전히 ‘사과의 아버지’라는 뜻의 알마티다.
광대한 평원국가로 기후는 대륙성으로 건조하며 초원과 사막이 아주 넓다. 주민은 카자흐인이 절반을 훨씬 넘는다. 130여 종족이 모여 산다는 이곳에 카자흐인 65%, 러시아인 22%, 우즈베크인 3.0%, 우크라이나인 1.8%, 위구르인 1.4%, 고려인 0.6%, 폴란드인, 불가리아인, 벨라루스인, 약간의 중국인, 기타 6.6%가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특징적 삶을 사는 가운데 민족적 조화를 꾀하고 있다. 현재 우리 동포인 고려인은 11만명 정도가 살고 있으며, 교민도 10만 이상 거주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아, 카스피해, 투르크메니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중화인민공화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천연자원이 풍부해 우라늄 매장량 세계 2위, 천연가스 매장량 약 322억 배럴(세계 7위), 은, 텅스텐 등 많은 광물자원을 보유한 자원강국이다. 이 나라 북부 지역은 1954년부터 광대한 처녀지가 개간돼 밀, 귀리, 보리 등을 산출하는 곡창지대다.
카자흐스탄 최대 도시 알마티는 남동부 거의 끝자락, 키르기스스탄과의 국경 바로 위쪽에 위치해 있다. 인구는 약 120만명. 키르기스스탄 및 중국과의 국경에 가깝고, 천산 산맥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어서 경관이 빼어나다. 2011년 동계 아시안 게임의 개최지이기도 하다. 1991년 구 소련연방의 붕괴 이후 독립국가연합(CIS: the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이 이곳 알마티에서 탄생했다. 1980년대에 중국 신장 위구르 자치구 우루무치에서부터 카자흐스탄까지 철도가 개통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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