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巨業과 微業의 다리가 된 어떤 사전의 탄생 앞에서
巨業과 微業의 다리가 된 어떤 사전의 탄생 앞에서
  •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서양고전문&
  • 승인 2015.04.27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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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서양고전문헌학

『역사용어사전』(서울대 역사연구소 편, 서울대출판문화원, 2117쪽, 2015)의 탄생을 축하한다. 작은 사건은 아니다. 한강에 새로 다리를 몇 개를 더 놓는 것보다 더 크고, 4대강에 보를 몇 개 더 막는 것보다 더 귀한 일이기에. 이유는 간단하다. 2천136쪽에 심겨진 1천500여개의 표제들은 강남거리에 줄지어 서 있는 고층 건물들보다 더 비싼 정신의 묘목들이기 때문이다. 강남의 고층 건물들이, 그렇게 수가 많아도, 내 말과 내 글에, 내 생각과 내 주장에 힘 한 번 실어 준 적이 없기에.

혹자는 말한다. 그런 것은 이제 스마트 폰이 다 해준다고. 한마디만 하겠다. 검증되지 않은 말과 생각은 위험하다고. 듣는 이에게도, 실은 말하는 이 자신에게도. 이런 점에서『역사용어사전』은 아마도 한국에서 출판된 사전들 가운데에서는 처음으로 표제의 저자를 밝혔다는 점에서, 즉 이제부터는 말과 생각과 개념을 사용함에 있어서 이른바‘원산지’검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 사전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아마도 표제의 저자를 명시한 사전이 한국에서는 처음이 아닐는지 싶다. 아무튼, 표제의 저자를 명시적으로 밝혔다는 점은 한국 지성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일 것이다.

앞으로 벌어질 사건들의 풍경은 대체로 이렇게 그려진다. 한국 지성계가 제대로 작동한다면 말이다. 『역사용어사전』에 기재된 표제 묘목들은 앞으로 많은 문장과 주장에, 연구 책임자 최갑수 서울대 교수(서양사학과)의 말대로 때로는‘주어부’에, 때로는‘술어부’에 자신의 모습들을 본격적으로 드러낼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논쟁도 만날 것이다. 이 사전에 기재됐다 사실 하나만으로 개별표제들이 곧바로 표준 개념들로 자리 잡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 사전은 그 자체로 닫힌 구조의 완제품이 아니라 앞으로 수많은 논쟁을 촉발하는 말과 학문의 전쟁터가 될 것임을 감히 예고한다. 그러니까, 개별표제들의 운명이 그리 순탄치는 않을 것이라는 소리다. 『역사용어사전』과 같은 대작(opus magnum)의 탄생에 축하와 축복의 말이 아니라 고생과 고난의 험난한 길을 예고하게 돼 마음이 못내 짠하다. 하지만, 어쩌랴? 그 험로가 학문이 원래 가야하는 길이기에. 오히려, 그 길을 이 사전 하나가 새로이 열었다는 점에서 사전 출판은 진심으로 축하해야 할 일이다.

저 험로는 아마도 이런 지점들에서부터 당장 시작할 것이다. 눈에 띠는 대로 크게 세 지점만 소개하겠다. 먼저, 『역사용어사전』은 많은 새로운 전문 용어들을 소개하고 있다. 해당 분야의 전공 관행에서는 허용될지 모르겠지만, 그것들이 아직 한국 학문의 토양에 착생한 말씨들인지는 아직은 잘 모르겠다. 어떤 것은 너무 낯설고, 심지어 어떤 것은 금시초문의 개념들도 많다. 내가 과문한 탓일 것이다. 이런 표제 묘목들이 사실 좀 많은데, 한국어라는 자연언어의 토양에서 그것들이 행여 고사해 버리지는 않을지 심히 염려스럽다.

다음으로, 『역사용어사전』은 이름 그대로 용어(terminus technicus) 사전이다. 용어는 표준준거로 일반 술어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최소한 두 가지 검증 과정이 요청된다. 그러니까, 술어의 사용과 관련해서, 그것은 개념확정에 있어서 규범 표준(de iure)과 사용표준(de facto aut de usu)의 검증을 거쳐야 한다. 아쉽지만, 사전에 기재된 대부분의 표제들은 이 검증을 거치지 않았다. 적어도, 표제들이 일반 용어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역사 담론에 등장하는 문장들의 用例들을 통한 검증을 거쳐야 했고, 그 거침을 통해서 규범 표준의 개념이 추출됐어야 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검증 과정도 이후 표제 묘목들이 착생하는 과정에서 겪어야 할 일 가운데에 하나일 것이다.

마지막은 사실 칭찬할 일이다. 사례 하나를 들겠다. 박한제 서울대 동양사학과 명예교수가 그동안 주창해온‘胡漢體制걩’표제가 그것이다. 세계사를 독자적인 관점에서 규정하고 그것에 대한 작명을 시도했다는 점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이 표제가 성장해나가는 과정은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는 본격적으로 가까이는 중국과 일본, 멀리는 구미의 이름들과 경쟁을 해야 할 것이기에. 하지만‘호한체제론’표제의 미래는 밝을 것으로 전망한다. 싸우면서 줄기는 단단해지고, 부딪히면서 뿌리는 땅에 더 깊게 내리는 법이기 때문이다.

대작의 앞길에 대해 험로만 늘어놓은 것 같아 미안하다. 하지만, 그 험로가 어쩔 수 없는 길, 그게 학문의 길이기에 이런 말들을 하게 됐음을, 한편으로 독자의 넒은 이해와 다른 한편으로『역사용어사전』필진들의 양해를 구한다. 실은 이제부터가 시작이기 때문이다. 세계사를 이제는 우리의 관점과 입장에서 바라보고 그것에 대한 우리식의 이름을 붙이는‘巨業’이 말이다. 예컨대‘호한체제론’과 같은 우리의 표제들을 만드는 微業들이 말이다.

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서양고전문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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