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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영토확장 야욕, 傭兵과 戰士의 대격돌 裝塡하다
러시아의 영토확장 야욕, 傭兵과 戰士의 대격돌 裝塡하다
  •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5.04.23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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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 37.중앙아시아 초원에서 (1)초원의 전사 코삭족과 카자흐족

 

▲ 카자흐 유목민의 유르트(yurt) 내부. http://en.wikipedia.org/wiki/Kazakhstan#/media/File:SB_-_Inside_a_Kazakh_yurt.jpg

어원이 같고 말소리가 흡사한 코사크와 카자흐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는 카자흐인을 ‘키르기즈’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들이 이른바 키르기즈-카자흐인데 카자흐인들은 러시아 혁명 후 1925년까지 이 이름으로 불렸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이상한 명칭은 유목민 카자흐와 본래의 키르기즈 사이의 혼동을 초래하게 됐다.

“넘쳐넘쳐 흘러가는 볼가 강물 위에 / 스텐카 라진 배 위에서 노랫소리 들린다 / 영화로운 페르시아의 꿈 다시 찾은 공주의 / 웃음 띤 그 입술에 노랫소리 드높다.”
―돈 코사크 민요 「스텐카 라진」 가사 일부

다음 이름을 읽어보시오. Алексаа́ндр Порфийрьевич Бородийн. 맨날 학생들에게 과제를 부과하거나 시키기만 하던 입장에서 이런 지시를 받으면 당황하기 쉽다. 더구나 잘 알지 못하는 분야의 경우 모르는 게 죄는 아니지만 괜히 자존심이 상한다. 알파벳은 알파벳인데 러시아 키릴문자를 읽는 게 그런 경우다. 위의 이름을 로마자로 표기하면 금세 읽을 수 있다. Alexander Porfiryevich Borodin. 그러면서 동시에 “아, 러시아 음악가 보로딘?”이라는 말이 뒤따라 나올 법하다.
내가 알렉산드르 포르피리예비치 보로딘(1833~1887년)의 이름을 들은 건 나이가 좀 들어서다. 그는 일생을 화학자로 살면서 「중앙아시아 초원에서」와 같은 낭만적 음악을 작곡한 러시아인이다. 러시아 5인조의 한 사람으로 러시아의 국민악파 음악에 큰 업적을 남겼다고 한다. 사람 사는 세상이다 보니 흔히 있는 일이지만, 그는 제정 러시아의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그루지야의 귀족 루카 게데바니슈빌리(Luka Gedevanishvili)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과 같은 서자의 서러움을 우리는 들어서 알고 있다. 보로딘의 기막힌 사연은 이렇다. 그는 조지아(Georgia) 즉 그루지야 출신의 러시아 귀족이던 아버지 루카 시모니스 제 게데바니슈빌리(그루지야어 표기: ლუკა სიმონის ძე გედევანიშვილი)와 유럽계 어머니 예프도키야 콘스탄티노브나 안토노바 사이의 사생아로 태어났다. 당시 상류사회에서 이런 일은 흔했다. 러시아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시인 푸시킨도 사생아였다. 체면을 의식해서였는지 보로딘의 생부는 혼외 자식인 보로딘을 자신의 농노였던 포르피리이오노비치 보로딘의 아들로 입적시키고 어머니가 양육하도록 한다. 이 때문에 그는 게데바니슈빌리(Gedevanishvili) 가문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보로딘이란 성을 갖게 된다.


러시아 남자 이름이 흔히 -스키, -오프, -비치 등으로 끝나듯이 그루지야의 남성 이름 어미는 십중팔구 -슈빌리(-shvili)다. 그래서 현 그루지야 대통령의 이름이 Giorgi Margvelashvili, 수상은 Irakli Garibashvili, 국회의장은 Davit Usupashvili로 하나같이 -슈빌리로 끝난다. 보로딘의 친부 루카 시모니스 제 게데바니슈빌리의 姓 게데바니슈빌리에도 -슈빌리가 들어있다. 그루지야인의 성에 붙는 접사로 가장 흔한 -슈빌리의 의미는 ‘child’. 영어 이름에서 보는 -son, 러시아 이름에서 보는 -sky와 같은 의미를 지니는 말이다.


와인의 원조국가라고 할 수 있는 이 나라 그루지야가 중세 이후 서방에서 사용되던 엑소님(exonym, 타칭)으로서의 라틴 이름, George 성인에서 비롯된 Georgia말고 스스로 부르는 엔도님(endonym, 자칭)으로서의 나라 이름은 사카르트벨로(Sakartvelo[sɑkʰɑrtʰvɛlɔ])다. ‘카르트벨리언의 땅(land of Kartvelians)’이라는 의미다. 카르트벨레비(Kartvelebi) 다시 말해 카르트벨리언(Kartvelians)은 조지아인이 조지아인을 가리키는 자칭이다.
그루지야의 자칭인 Sakartvelo는 두 부분으로 이뤄져있다. 어근에 해당하는 kartvel-i는 Kartli라는 그루지야 동중부 지역의 주민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 Kartli가 비잔티움(동로마제국) 자료에는 Iberia라고 명시돼 있다. 스트라보(Strabo), 헤로도투스(Herodotus), 플루타르크(Plutarch), 호머(Homer)와 같은 고대 희랍인은 물론 로마인 티투스 리비우스(Titus Livius), 타키투스(Tacitus) 등도 서부에 거주하는 그루지야인을 콜치 사람인 콜치언(Colchians), 동부의 그루지야인들을 이베르 사람인 이베리언(Iberians)이라고 지칭했다. 후자인 이베리언(Iberian)은 물론 영어식 표기이고, 고대 그리스어로는 이베로이(Iberoi)라고 했다. Iberoi는 Iber에 복수형 어미 -oi가 붙은 말로 ‘Iber 사람들’이란 의미를 지닌다.


이쯤에서 생기는 의문.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자리한 지역을 이베리아 반도라고 하는데, 이 이베리아는 과연 무엇인가. 아래 지도에서 보듯 코카서스 산맥 아래 오늘날의 그루지야 동부에 해당하는 지역도 Iberia라고 표기돼 있다. 양자가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연관이 있다면 역사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언어학자인 나는 나름의 상상력에 날개를 단다. 학문의 발전은 상상하는 힘에 달렸다고 믿기 때문이다. Iberia는 ‘Ibe(r)인의 땅’이다. Ibe(r)인이 서쪽으로 멀리까지 가서 그곳에 정착하며 출신지로 지명을 삼았다. 동쪽으로 간 부류도 있었다. 오른쪽의 카스피해 너머에 하중지방 더 구체적으로는 호레즘 지역이 있다. 제일 먼저 당도한 곳이 여기였을 것이다. 떠나온 곳을 잊고 정착생활을 시작하며 지명을 Ibe(r)라 했다. 세월이 지나며 이버(Ibe(r))가 어느 순간 히바(Khiva)로 바뀌었다. 양자는 기실 氣息音 /h/의 유무만 다를 뿐이다. 이런 변이는 흔하다. 과거에는 인도였지만, 오늘날에는 파키스탄의 영역에 속하는 신드(Sindh /sɪnd/)주를 라틴어로는 Indus, 고대 희랍어로는 Ind´os, 범어(Sanskrit)로는 신두(Sindhu)라고 했다. Sindh라는 이름은 인더스강을 가리키는 범어 Sindhu에서 파생됐다. Sindhu는 ‘강’이라는 뜻의 말이다. 인더스강 일대에 사는 원주민들은 이 강을 자신들의 언어로 江 즉 Sindhu라고 했지만, 이들과 접촉한 외래인들은 저마다 자신들의 언어로 이 강의 이름을 표기했다. 그래서 아베스타말을 사용하던 고대 이란인들은 Hindu로, 후일의 페르시아인들은 Ab-e-sind(신드 강)로, 기원전 7세기 무렵의 앗시리아인들은 Sinda로, 그리스인들은 Indos로, 로마인들은 Indus로, 아랍인들은 Al-Sind로, 중국인들은 身毒 등으로 표기했다.

▲ 하늘에서 내려다 본 우시토베(Ushtobe)(카자흐스탄 알마티 일대)http://www.panoramio.com/photo/13646469?source=wapi&referrer=kh.google.com

아주 간단하게 말해 원산지의 Sindhu가 이웃한 페르시아로 넘어가서는 Hindu가 되고, 그리스/로마로 가서는 어두의 [h]음이 탈락되고 Indus로 차용됐다. 이와 비슷한 사례를 하나 더 들자면, 월지가 세운 오아시스 도시국가 康國을 소그드어로는 Samarqand라고 한다. 이를 고대 희랍인들은 Marakanda라고 불렀다. Samarqand는 본래 ‘돌’이라는 뜻의 소그드어 asmara와 ‘성채’ 혹은 ‘도시’라는 뜻을 가진 역시 소그드어인 kand가 결합된 말이다. 결국 Asmarakand에서 어두 모음 a가 탈락돼 Samarqand가 되고 이 말을 고대 희랍인들은 Marakanda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우리말에서 兄(님)이 성(님)이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엉님, 급기야는 엉아가 되는 것과 같은 음운변화현상이다. 마찬가지로 혓바닥이 셋바닥이 된다. 때문에 Skarma라는 라다키(Ladakhi, 티벳에 인접한 북인도 라다크 지역 사람) 이름을 카르마라고 듣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데 보로딘의 이름 Алексаа́ндр Порфийрьевич Бородийн에서 보듯 왜 러시아인들은 이상하게 생긴(?) 키릴문자를 사용할까. 키릴문자(Кириллица)는 동유럽(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와 몰도바,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일부지역, 크로아티아 일부지역, 루마니아 일부지역,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공화국)과 중앙아시아, 아제르바이잔, 조지아 일부지역(압하스/압하지야, 남오세티야), 몽골 등 러시아의 영향을 받은 나라에서 쓰이는 문자다.
역사적으로 키릴 문자는 그리스 알파벳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 그러나 키릴 문자를 그리스 문자의 변형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키릴 문자는 그리스 문자에 비해 자모 수가 거의 10개 가까이 더 많으며, 과거에는 더욱 많았기 때문이다.


고대 슬라브어 표기에 글라골 문자라는 특이한 모양의 문자가 따로 쓰였는데 지금까지 이 글라골 문자는 9세기에 비잔티움 제국의 동방정교회 선교사인 성 키릴로스Κύριλλος, Кирил) 즉 키릴과 그의 형 성 메토디오스(Μεθόδιος, Методий) 즉 메토지가 문자가 없던 슬라브족에 기독교를 전파하기 위해 그리스와 라틴 문자를 바탕으로 고안했다고 여겨졌으나 최근에는 이 이론이 부정되고 있다. 당시 그들은 슬라브족이 세웠던 大모라비아(현재 체코를 중심으로 폴란드, 독일, 발칸 반도 일부를 포함하고 있었다)에 파견됐는데, 파찰음이 많은 슬라브어를 기록하기 위해 라틴 문자와 그리스어 문자를 변형시켜 글라골 문자를 만들었다. 이 문자는 나중에 키릴 문자로 대체돼 사라졌는데, 몇몇 글자가 키릴 문자로 흡수됐다. 따라서 현 키릴 문자는 그리스어 알파벳을 베이스로 하되, 글라골 문자를 일부 흡수하는 등 자모 추가와 변형 과정을 거쳐 성립됐다고 보는 게 옳다. 키릴 문자라는 명칭은 후일 성인 키릴로스의 이름을 본 딴 것이다.
다시 묻자. 왜 러시아인들은 그리스 문자를 닮은 키릴문자를 사용하게 됐을까? 1453년 4월 2일,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의 이슬람 군사 8만여 명과 대규모 비정규군이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했다. 열세였던 기독교도 군대(약 7천여 명으로, 이 중 2천여 명은 외국인이었다)가 필사적으로 해자를 방어했으나 두 달간 벌인 공성전 끝에 1453년 5월 29일에 오스만 제국은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했다. 비잔티움 제국 최후의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적군이 도시 성벽을 장악하자 황제의 예복을 벗고 육박전에 뛰어들어 장렬하게 전사했다.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자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3세가 동방 정교회의 보호자로서 황제의 역할을 자처했다. 그는 안드레아스의 누이 소피아 팔레올로기나와 혼인했고 이들의 손자 이반 4세는 러시아 최초의 짜르(tsar)가 됐다. 이후 이반 황제의 후계자들은 모스크바가 로마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적법한 후계자라고 생각했다. 러시아 제국이 세 번째 로마라는 생각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제국이 무너질 때까지 계속됐다. 정교회를 받아들이고 그리스 문자를 본떠 오늘날의 키릴문자를 만든 것은 이런 생각이 바탕이 된 결과다.
시간을 거슬러 16세기 중반 모스크바 공국의 대공 이반 4세 바실리예비치가 짜르 즉 황제라는 호칭을 최초로 사용하며 러시아의 통치자로 군림하던 때로 되돌아가보자. 1556년, 4년 전 몰락한 카잔 칸국과 마찬가지로 조치 울루스의 후예인 볼가강 하류 유역의 아스트라한 칸국도 러시아 군대에게 무릎을 꿇었다. 러시아의 지배를 받기 시작한 후 2세기 동안은 일부 타타르(몽골) 귀족들은 이슬람교를 신봉하며 러시아 관직을 수여받기도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봐 타타르 무슬림들은 가혹한 압제 하에 놓여 있었다. 러시아 당국은 볼가강 유역의 비옥한 농경지를 러시아 귀족과 정교회 수도원 혹은 중부 러시아에서 도망쳐온 농민들에게 나눠줬다. 18세기 중엽 반 무슬림 정책이 강화되면서 상황은 더 나빠졌다. 이런 상태에서 반란이 일어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과도한 사회 경제적 억압과 종교적 동화 정책에 불만을 느낀 타타르 무슬림들은 더 이상 반감을 숨기지 않았다. 스텐카 라진(Stenka Razin)으로 잘 알려진 스테판 티모페예비치 라진(1630~1671년)은 제국 러시아의 짜르 알렉세이(재위 1645~1676년)의 전제적 통치에 반발하고 카스피해와 볼가강 연안 지방의 농민이 주축이 된 코사크 반란을 일으킨다(1670~1671년). 100년 쯤 뒤 예카테리나 2세 시대에는 타타르인을 비롯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의 비슬라브계 이민족 다수, 여기에 농노, 우랄 지역 광산과 공장 노동자인 러시아 민중까지 가세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다. 돈 코사크 출신의 탈영병 푸가초프가 우랄-코사크인들의 불만을 이용해 일으킨 반란이다(1773~1775년).


한편 일부 타타르인들은 이제는 러시아의 땅이 된 볼가-우랄 지역을 떠나 투르크계 무슬림들이 거주하는 카자흐 초원과 투르키스탄으로 이주를 감행한다. ‘타타르인의 디아스포라’가 시작된 것이다.
스텐카 라진도 돈 코사크인이었다. 코사크(Cossacks)의 어원은 카자크(Kazakh)와 같은데, 이 말이 코자크(Kozak)로 변하고 다시 코사크로 바뀐 것이다. 말뜻은 ‘자유로운 존재(free man)’. 돈 코사크란 돈 강(the Don) 유역에 거주하는 코사크인이란 말이다. 자칫 경칭으로 사용되는 스페인어 돈(Don)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의 작품 『Don Quixote』는 영어로 치자면 Mr./Sir Quixote라 할 수 있다. 원제는 『The Ingenious Gentleman Don Quixote of La Mancha』(라만차 출신의 똑똑한 신사 키호테 경). 공교롭게도 세르반테스가 이 소설을 쓰고 나자 스페인에 살던 무슬림들은 정치적 박해를 피해 부득불 스페인을 떠나게 된다. 나는 나를 스페인식 경칭으로 부르는 걸 원치 않는다. 누군가 스페인 여행 기념품을 사다주며 거기에 ‘Don Yeon’이라 써놓은 것을 보고나서부터다. 내가 왜 ‘돈 년’이 돼야 하는가.


이제 무대를 중앙아시아 카자흐 초원으로 돌려보자. 동토의 백곰 러시아는 16세기 중반 카잔 칸국의 정복을 시작으로 마침내 16세기 말에는 시비르 칸국을 멸망시키고 야금야금 영토를 확장하는 재미를 붙인다. 그리고 18세기 초에는 광활한 카자흐 초원의 북쪽에서부터 코사크 요새선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자신들의 자유로운 생활공간으로 알고 있던 초원에 코사크인을 앞세운 제국 러시아가 날카로운 발톱을 들이밀자 유목민 카자흐는 당황할 수밖에 없다. 영토 확장의 야욕에 불 탄 짜르의 용병 코사크와 초원의 전사 카자흐의 대결이 벌어지는 것은 시간문제다. 어원이 같고 말소리가 흡사한 코사크와 카자흐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는 카자흐인을 ‘키르기즈’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들이 이른바 키르기즈-카자흐인데 카자흐인들은 러시아 혁명 후 1925년까지 이 이름으로 불렸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 이상한 명칭은 유목민 카자흐와 본래의 키르기즈 사이의 혼동을 초래하게 됐다. 명칭조차 제 맘대로 못하고 힘 센 자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현실. 때는 제국주의가 득세하던 시절이었다.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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