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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 에세이]분류의 폭력
[릴레이 에세이]분류의 폭력
  • 교수신문
  • 승인 2002.11.0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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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1-09 13:20:19
이왕주 / 부산대·윤리교육과

카프카의 소설 ‘성’에서 주인공인 측량기사 K는 측량업무를 위탁받은 성안으로 들어가려 애쓰다가 자신을 찾아온 두 명의 조수를 만나게 된다. 한명의 이름은 아루투어였고, 다른 한명은 예레미아스였다. 그러나 K에게는 얼굴과 행동거지가 몹시 닮은 두 조수를 구분해서 일 시키는 게 골치덩어리였다. 그는 둘을 불러놓고 그 중 한 명에게 다짜고짜 “네가 아루투어지?” 하고 묻는다. 지명당한 조수가 고개를 가로 저으며 “아뇨. 저는 예레미아스인데요.”하고 답하자 K는 다시 이렇게 덧붙인다. “그건 아무래도 상관없어. 나는 자네들을 아루투어라고 부를테니까. 내 눈엔 자네들이 한 사람이나 마찬가지야.” 물론 두 조수는 이구동성으로 항의한다. “그건 기분 나쁜 일인데요.”

조수들이 기분 나쁜 이유는 분명하다. 아무리 닮았어도 각자 이름이 있고 독립된 인격이 있는데 한데 엎쳐서 하나로 취급한다는 건, 참을 수 없는 모독일 테니까. 겉보기에 닮아보이는 모든 것들도 여유를 갖고 살피면 제각각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마련이다. 부모들은 일란성 쌍생아 자식을 정확히 구분해낸다. 자식들이 갖는 섬세한 차이를 애정으로 헤아려보는 눈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관심과 관용을 지닌 그런 섬세한 시선으로 저토록 닮아보이는 모든 것들을 바라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럴 수 있을 때에만 이 모노톤의 세계가 사실은 미묘하면서도 다채로운 온갖 차이들이 넘쳐나는 역동적인 공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던적 조건’에서 “불일치와 차이를 인정하는 관용”에 대해 언급했던 것도 이런 맥락이었다.

학생 시절 나는 ‘오십보 백보’를 ‘그게 그거’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일이 곤혹스러웠다. 어떻게 두 배의 차이가 그런 식으로 묵살될 수 있다는 거냐. 당시의 나는 K가 카프카의 소설 ‘성’ 속에만 있는 게 아니라 어느 때나 어디에나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땅을 자신의 발로 걸어본 적 없는 왕족, 가마만 타고 행차하는 제후들에게는 가마 짊어진 종놈들이 걷는 오십보나 백보는 그게 그거다. 그러나 끼니 거른 채로 가마를 짊어지고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디디며 나아가야 하는 종에게 오십보와 백보는 생사를 가르는 차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세상의 많은 K들은 그런 것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귀찮은 것이다. 물론 그는 해야 할 일이 많고 신경 써야 할 일도 많다. 하루하루 날은 가는데 성안으로 들어가는 길조차 제대로 찾지 못하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다행히 조수는 그가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아랫사람이다. 그들에게조차 신경을 써가며 이놈은 아루투어, 저놈은 예레미아스, 일일이 구분해서 불러줘야 한다면 피곤한 노릇이리라. 편하게 가야 한다. 두 놈의 이름 중 부르기 쉬운 걸로 골라 그것으로 둘을 한꺼번에 부르는 게 상수다. 어차피 그놈이 그놈이니까.

미셀 푸코는 ‘말과 사물’에서 ‘분류의 폭력’에 대해 언급한다. 묶는 것과 나누는 것으로 사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야말로 근세적 주체성이 자행해온 교활한 폭력이라는 것이다. 이런 폭력은 담론의 공간에서 교묘하게 은폐된 채 작동하기 때문에 피해자들은 도대체 그것이 분노해야 할 상황인지 가늠하는 일에서부터 어려움을 느낀다.

K의 호칭법은 이제 화려하고 다양한 레토릭의 포장 속에 숨어 있다. 몇 가지 예를 살펴보자. ‘제3자’라는 말에서 분노를 느끼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강한 배척과 분류의 의미를 함축하는 권력적 수행언어다. 당사자들에게는 당사자가 아닌 사람이 모두가 똑같아 보이기 때문에 그냥 제3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제3세계’도 마찬가지다. 선진국의 정치, 사회학자들 사이에 회자되는 제3세계는 제4세계, 제5세계…로 연속되는 서수계열의 분류표에 속하는 하나의 항목이 아니다. 자기들 구미 선진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제3세계다. 이 개념에는 심지어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로 일일이 구분하는 것조차 짜증스럽게 여기는 측량기사 K의 성마른 호칭법의 흔적이 스며있다.

인구에 회자되는 우리 일상어 중에서 ‘지방대’도 이 시대 우리 땅에서 K가 즐겨 쓰는 호칭어다. 가령 이 글을 쓰는 나를 지방대 교수 아무개로 부르는 것은 아주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들린다. 왜 부산대학교라고 하지 않고 지방대라고 부르는가. 물론 K가 고유명사를 챙겨서 불러줄만큼 한가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북대, 전남대, 제주대, 어휴, 그걸 어떻게 일일이 이름을 기억하면서 부른다는 거냐. 그냥 아루투어로 두 조수놈을 한꺼번에 호출하듯이 ‘지방대’로 그 복잡한 명칭들을 한꺼번에 싸잡아두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물어보자. 지방대는 어느 도시에 있는 대학인가.

우리의 주문은 일란성 쌍생아를 구분하는 부모의 섬세한 눈으로 서울 바깥에 있는 대학들을 구분해달라는 게 아니다. 다만 각 대학의 교문에 붙어 있는 그 이름으로 대학을 호칭해달라는 것 뿐이다. 제발 K의 어투로 ‘지방대’라고 부르지 말아달라. 그건 정말 기분 나쁜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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