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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논문쓰기 열풍
영어논문쓰기 열풍
  • 소영현 연세대 국학연구원·문학평론가
  • 승인 2015.04.06 11: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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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소영현 연세대 국학연구원·문학평론가

▲ 소영현 문학평론가
한국의 영어사랑은 남다르다. 탁월한 영어 능력은 누구나 탐내는‘워너비 문화자산’이다. 한국에서 영어 능력은 학업, 진학, 취업, 승진 등 인생의 고비마다 결정적 변수가 된다. 뭐든 탁월한 능력을 갖는 일은 나쁘지도 불필요하지도 않다. 사실 외국어 능력이 커다란 의미를 갖는 분야와 영역도 적지 않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분류와 구분을 무화하면서 누군가를 선발하고 평가하는 최종기준으로 영어 능력을 고려한다.

한국의 영어사랑은 특별한 것임에 분명하다. 한국의 아이들이 한글 자모보다 알파벳을 먼저 접하는 일도 드물지 않다. 영미권 문화로 열린 관심의 향배는 대개 영어 공부로 수렴되는 경우가 많다. 영어공부를 위해‘영드’와‘미드’를 반복 시청하고 영어로 된 블록버스터 영화와 문학을 보고 읽는다. 그 와중에 영미권 문화를 몸으로 익히게 되는 것은 영어 능력을 키우기 위한 노력으로 얻는 덤 같은 것이라 해도 좋다.

영화든 스포츠든 뉴미디어 기기든 신상 백이든 뭔가에 모두가 한꺼번에 빠져들거나 휩쓸리는 일이 비교적 흔한 편이니 이 땅에서 영어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급작스럽게 부풀어 오른다 한들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하지만 영어 유치원 열풍, 조기 유학 열풍, 외고 열풍 등 하위의 층차 다른 열풍들을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영어에 대한 깊은 애정은 한국사회를 순식간에 달구고 지나가는 다른 열풍들과는 차원을 달리해서 이해해야 한다. 따지자면 영어를 요람에서 무덤까지 가지고 갈 삶의 자산으로 만든 것은 온 국민의 영어에 대한 깊은 애정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학업, 진학, 취업, 승진에 미치는 영어 능력의 영향력이 점차 영어 능력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해왔다.

개국 이래 지속됐던 세계화에 대한 국가적 지향이 글로벌리즘과 만난 1990년대 이후로 영어가 특별한 위상을 차지하게 됐고 이후 영어 능력이 평가기준으로서 무소불위의 힘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1990년대 말에 불거졌던‘영어공용화론’이 영어 능력의 가치를 담론 차원에서 사회에 유포했다면 2000년대 말부터는 담론에 그치지 않고‘영어몰입교육’과 같은 정책으로 영어 능력의 실질적 영향력이 행사되기 시작했다.

各自圖生의 원리를 일상 깊숙이 새기게 한 신자유주의 시대를 맞이해 한층 업그레이드된 한국의 과도한 교육열도 이런 현상을 강화하는 데 적지않은 기여를 했다. 공교육을 통해 영어를 배우고 사교육을 통해 부족한 영어 능력을 채우는 일은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집중적으로 이뤄지지만, 이제 한국사회의 일원 가운데 영어 능력에 대한 압박감에서 자유로운 이는 많지 않다. 이러한 압박의 크기에 비하자면 전 국민의 영어 능력이 국가간 지역간 비교에서 월등하다고 할 수 있는지는 확신하기 어렵다. 사실상 모두가 영어 능력에 대한 콤플렉스를 안고 영어 울렁증의 트라우마를 갖게 되는 게 회피하고 싶은 현실의 진면목에 더 가깝다.

영어사랑이 갖는 유동적 성격으로 중국의 경제적 부상과 함께 한국인의 영어사랑이 중국어사랑으로 빠르게 대치될 것이 예견되기도 한다. 실제로 영어 유치원이나 영어 마을, 외고에 대한 관심은 한풀 꺾인 분위기가 완연하다. 그럼에도 영어를 교육어로 사용하는 교육기관은 영어 유치원, 영어 마을, 국제학교 등 대상과 방식을 달리하면서 우후죽순으로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여전히 영어사용자에게‘한국에서 영어학원 차리기’는 실패 없는 대박상품으로 인식되고 있다. 영어사랑은 완만한 상승곡선을 그리며 일상에 미시적 영향을 미치는 삶의 주요 토대 가운데 하나가 됐다. 한국에서 이제 영어는 단지 언어만은 아닌 것이다.

최근 영어 능력 문제로 가장 심하게 몸살을 앓고 있는 공간은 대학이다. 대학생이 영어 스펙 압박에 시달리는 일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면, 교수나 연구자에게 요구되는 영어 능력 또한 분야와 영역 구분 없이 무차별적이다. 대학을 기업운용의 관점으로 바라보면서 교육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간으로 이해하기 시작할 때 대학은 이윤을 남겨야 하는 비즈니스 공간이 된다. 밑도 끝도 없는 영어논문 쓰기 열풍은 대학의 기업화 현상의 사후효과이자 경쟁 체제에 내몰린 대학의 민낯이다.

영어논문 쓰기 취지에 공감하는가의 여부와는 별도로, 교수자와 연구자 전부가 취업과 업적, 그리고 승진의 관건이된 영어논문 쓰기로 내몰리는 현상은 인문학(과/부)의 통폐합으로 가시화된 대학의 구조조정과의 상관성 속에서 긴급한 문제로서 다뤄질 필요가 있다. 애초에 대학 내에서 영어사랑을 불러온 원인인 세계화의 열망에 비춰봐도 외국인이나 재외 한국인 학생 유치에 열을 올리는 일만큼이나 연구와 교육의 획일화와 이류화를 부를 가능성이 높은 영어논문 쓰기는 그리 유효한 방법론이 아니다. 대학의 세계화를 목표로 한 영어논문 쓰기 열풍을 두고 결국 학문의 장을 고사시킬 치킨게임이 되는 것 외에 다른 결과를 상상하기가 쉽지 않다.

소영현 연세대 국학연구원·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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