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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明梅의 일생을 생각하면서
大明梅의 일생을 생각하면서
  • 박노동 전남대 명예교수·농화학
  • 승인 2015.04.06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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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박노동 전남대 명예교수·농화학

"다시 태어난 늙은 아이 앞에 제2의 인생은 늦겨울에 핀 매화 꽃봉오리같은 것.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로서 무한미래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싶다."

▲ 박노동 전남대 명예교수
지난 2월 26일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논문을 완성해 투고하고 28일 고별강연회를 갖는 것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강의를 맡지 않기에 연구실을 마저 비웠다. 앞으로 한 학기 동안 그저 쉬고 싶다는 심사 외에는 아무런 욕망이 없었다.

이렇게 연구실을 벗어나서 겨우 한 달을 지내면서 나는 스스로 갓 태어난 아이라고 믿게 됐다. 아이, 순수한 無知. 무한한 가능성의 밀도 높은 집합체.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 어디로 튈 줄 모르는 럭비공. 내 앞날은 오리무중이지만 未걐無限의 에너지로 충전된 다이너마이트라고 생각했다.

갓 출생한 아이는 정말 아무것도 모를까? 그렇지 않다. 영화나 연극을 적어도 일주일에 한 편은 보겠다고, 그동안 못 읽었던 소설을 실컷 읽겠다고, 매일 시를 몇 편 읽고 외우자고 작정했으며, 또 칸트가 그랬다는 것처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길로 산책을 나서자고 결심했다. 이쯤되면 며칠밖에 안된 아이라고 해서 전혀 무지하다고 못할 것이다.

아이로 다시 태어나보니 이상하게도 날짜를 기억하지 못하고 요일을 가리지 못했다. 시간은 이미 내가 누리고 계산하던 시간 이상의 시간이 돼 있다. 강의와 연구와 학생면담은 시간과 함께 이미 완성됐다. 일은 끝났다. 그 결과가 정년 아닌가. 완성된 것은 이미 내 것이 아닌 것. 날짜와 요일은 정년 퇴직자에게 어떤 경우에도 의미와 가치가 없는 것이다. 잊어버리거나 혼동해도 독촉받거나 부담을 느끼지 않게 됐다.

어느 이른 아침 낯설어진 교정으로 400년 묵은 大明梅를 보러 갔다. 올해는 유독 개화가 늦어 그날 꽃을 보지 못했다. 시절을 가리지 못하고 있었다. 1621년 중국에서 조선의 남녘으로 옮겨 심겼을 때, 그도 나처럼 스스로 어린 아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버림받은 느낌, 배신감, 이국의 기후풍토, 위협받는 생존, 설익은 문화 풍속 등의 충격에 휩싸였을 것이다. 어린 아이에게 대명매는 전에 없이 동병상련의 절친이 돼 있었다.

春걐不似春이란 말처럼, 이제 한 달밖에 안됐지만 작심도 하고 결심까지 한 아이에게, 정년은 기대했던 만큼 한가하지 못했다. 아침 황사처럼 답답한 기류 속에서 여태 영화 한 편을 보지 못했으며, 소설책은 손에 잡아보지도 못했으니, 한 시간에 한 공간을 만보하는 일은 더욱 가당치 않았다. 아이에게 시간은 제멋대로 날뛰는 야생마였다. 순치할 방도를 아직 찾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 또한 아이의 일이란 대개 말뿐이어서 결심이나 약속은 헛것이 되기 쉬운 것이었지만, 나무랄 일은 아니라는 듯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았다.

존재는 언제나 자기 말을 한다. 그동안 정년 이후로 미뤄둔 일들이 산사태처럼 한꺼번에 밀려들었으니, 치다꺼리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냈던 것이다. 인생의 한 고개를 넘었으니 정리해야 할 자료도 많았다. 지친 심신을 다독이고자 여행을 생각해 봤지만, 손가락 안에 아예 들지 못했다. 몸에 밴 대로 출퇴근하듯 출입하고자 약간 떨어진 곳에 조그만 서재를 마련해 갖추는 일도 내 손을 오래 붙들었다. 그러나 시간과 효율을 초극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이 어제 같고 어제와 내일이 구분 안 될 바에, 건강과 꾸무럭댈 일이 허여됐으니 문제될 게 없었다. 시간을 넘어선 것, 이는 정년 퇴직자에게만 허락된 진정한 축복이라고 할 것이다.

다시 태어난 늙은 아이라고 해서 포부가 어찌 없을까. 아이 앞에 제2의 인생은 늦겨울에 핀 매화 꽃봉오리 같은 것. 날짜나 요일과 상관없이 스스로 굴러가는 바퀴로서 무한미래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싶다. 하나의 순수한 무지로써 400년 전 북경에서 창평의 고 선비 댁에 이식돼 지내다가 전남대로 옮겨 앉은 아름답고 고매한 대명매. 그의 강인한 일생을 생각하면서.

박노동 전남대 명예교수·농화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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