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隋 文帝는 왜 漢代 장안고성 근처에 새로운 도읍을 건설했을까?
隋 文帝는 왜 漢代 장안고성 근처에 새로운 도읍을 건설했을까?
  •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 승인 2015.03.31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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長安, 동아시아를 만든 1백년을 성찰하다_ 06. 唐 장안, 고대 계획도시의 정치적 설계

▲ 수 문제의 장안성 건설 모사도(서안 대당서시 박물관)

隋의 대흥성 곧 長安城의 건설이 漢代 長安故城의 쇠락과 대비된 것은 의도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혼란기 이전의 漢나라가 지녔던 정통성의 재창조가 그것이다.

고대의 동양과 서양을 대표하는 도시로 로마와 長安을 열거하지 않을 수 없다. 로마는 팔라티노 언덕을 중심지로 삼아 테베레 강 주변의 일곱 언덕으로 점차 확장됐던 도시다. 로마의 확장 혹은 발전은 제국 로마의 성장과 궤를 같이한다. 로마는 그리스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실용성에 중점을 뒀던 국가였다. 로마는 일면으로는 제국의 성장과 함께 자연스럽게 확장되고 발전한 도시였을 것이라 생각되지만, 그 도시의 핵심을 차지하는 것은 광장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로마제국이 제국이면서도, 기본적으로는 황제의 통치를 받는 나라가 아니라 로마시민에 의해 국가의 운영을 최종적으로 결정했다는 정치적 특성에서 기인한다.


로마시민에 의한 통치가 때로는 상징적인 과정에 불과했다고 할지라도 이 상징적인 과정이 황제의 통치에 최종적인 정당성을 부여하는 한에서는, 도시의 기본 구조나 확장에 있어서도 그러한 최종적인 정당성이 작용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로마를 방문한 여행객들이 만나게 되는 크고 작은 광장들은 로마제국의 통치구조가 지닌 최종적인 정당성이 마지막까지 유효했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隋·唐 제국의 도성이었던 長安은 로마와는 전혀 다른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장안과 로마는 출발이 전혀 다르다. 로마가 도시국가에서 출발해 점차 확장하는 제국의 수도로 기능하게 됐던 것과 달리, 장안은 처음부터 거대 제국의 수도로서 그리고 皇都로서 설계됐던 도시이기 때문이다. 곧 황제의 통치의도를 대변하는 도시로서 설계됐던 계획도시가 바로 장안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자연적으로 발생하고 성장한 도시들과는 모양새를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隋·唐 제국 이전에도 장안은 여러 번 제국의 수도로서 기능한 적이 있었다. 漢代의 도성이 있었던 곳이고, 또 隋에 바로 앞서 北周가 도읍했던 곳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長安, 곧 隋·唐 제국 시절에 皇都로 기능했던 장안은, 漢代의 장안이었고 北周가 도읍으로 삼았던 그 장안과는 위치가 다르다. 수 문제가 본래의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옮겨서 長安都城 곧 大興城(장안성은 隋代에는 大興城이라고 불렸다)을 새로 건설했기 때문이다. 대흥성을 새로 건설한 이유에 대해서는 『隋書』는 유계재(庾季才)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전한다. 수 문제가 백성들을 힘들게 할 것을 우려해 천도를 망설이자, 유계재가 밤에 高과 蘇威의 두 사람과 더불어 의논을 정하고서는 다음과 같이 상주해 아뢨다.


“신이 천문을 보고 圖記를 살펴보니 점괘에는 遷都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 합니다. 堯의 도읍은 平陽이었고 舜의 도읍은 冀土였으니, 이것은 제왕의 거처가 세대에 따라 다름입니다. 이 漢代의 궁궐과 성은 이미 800년을 지난 것이고, 물이 모두 소금기를 머금고 있어서 사람들을 감당하지 못합니다. 원컨대 폐하께서는 天人의 마음으로 천도의 계획을 행하십시오.”(『隋書』 「庾季才傳」)
유계재는 천문을 살펴 점복을 보는 것에 능했던 인물로 일찍부터 수 문제의 신임을 받았다. 유계재와 고경 등 신임하는 신하들이 뜻을 모아 청하자, 수 문제 역시 더 이상 머뭇거리지 않고 왕도 건설의 조칙을 내린다(582년 6월). 왕도 건설의 책임은 고경 등이 맡았다. 그리고 새로운 왕도에 들어간 것이 이듬해 3월이다. 약 9개월 정도의 짧은 공사 끝에 이뤄진 입성이므로, 아마도 다 완성된 도성에 들어간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이유의 일단을 수 문제의 천도 조칙에서 엿볼 수 있다.


“이 성은 漢代에 말미암아 이래로 쇠퇴하고 훼손된 날이 오래이며, 누차 전쟁터가 돼 예부터 喪亂을 겪었다. …… 京師는 百官의 관청이자 四海가 귀속하는 곳이니 짐이 홀로 소유함이 아니다. …… 지금 천하가 안영하고 통일됐으며, 음양이 질서를 따르고 있어서, 더욱 편안하게 천도하므로 자그마한 원한도 품지 말라. 龍首山의 들판은 수려하고, 자연은 풍요로우며, 지형을 살피니 마땅히 도읍을 세울 만하니, 왕조의 기틀이 영영 견고하고 무궁한 공업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隋書』 「高祖紀」, 開皇二年六月)
천도 조칙을 살펴보면, 문제는 漢代에 지은 長安故城이 낡고 불편하다는 것, 그리고 전화를 여러 번 겪어 喪亂을 겪은 사실을 천도의 이유 중의 하나로 들고 있다. 아마 그 상란 중에는 문제 자신으로 상란도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북주의 왕권을 찬탈하면서 황족을 모조리 죽였는데, 제위에 오른 뒤 도성 내에 귀신이 나온다는 등의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던 모양이다. 심적인 불편을 일소하고 통치상의 편의를 꾀하기 위해서라도 천도가 급할 만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천도지가 漢代에 건설한 장안고성에서 동남쪽으로 불과 20리 정도 떨어진 龍首川 일대였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새로운 도성이 수 문제 자신의 근거지 곧 지지 세력이 존재하는 곳으로부터 지나치게 멀어지면 곤란하다는 점이다. 북위가 팽성에 수도를 두고 있을 때 북방의 이민족을 방어하기 위해서 흉노와 선비의 유력한 부족을 동원해 설치한 군진이 바로 六鎭이다. 곧 팽성의 바로 북쪽에서 북방 이민족을 방어하는 최전선이었고, 그 때문에 처우 수준 역시 상당했던 핵심 군사력에 해당했다. 그런데 북위가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방어기지로서 육진의 중요성이 현저히 감소하면서 육진의 군벌들은 자연스럽게 권력의 중심에서 멀어지게 된다.

장안고성과 가까운 용수천 일대로 遷都한 까닭
하지만 그들은 북위가 멸망하는 과정에서 온전히 보존하고 있던 군사력을 앞세워 동위와 서위의 중추세력으로 등장하게 된다. 北齊를 세운 高歡이 육진 중의 懷朔鎭 출신이다. 그 대척점에 서서 장안을 중심으로 세력을 구축하고 西魏와 北周, 그리고 隋와 唐으로 이어지는 왕조의 교체과정에서 계속해서 권력의 중추에 서 있었던 것이 바로 武川鎭 군벌이다. 바로 그 무천진 군벌을 대표하는 성씨가 楊氏, 獨孤氏, 宇文氏, 李氏 등이다. 수 문제로서는 자신의 창업에 핵심적인 지지 세력이자 가장 강력한 무력인 무천진 군벌을 버리고 그 본거지인 장안에서 동떨어진 지역으로 천도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무천진 군벌들에게 각인된 기억의 문제다. 그들은 북위 시절부터 국가의 보전은 서북방의 이민족을 어떻게 방어하고 또 어떻게 제어하는지에 달려있다는 것을 뼛속깊이 느낀 집단이다. 최전선에 있었던 만큼 서북방 이민족의 강점과 약점을 속속들이 파악했다. 게다가 서위, 북제로 이어지는 동안에는 돌궐의 조공국으로 전락하기까지 한 쓰라린 기억을 갖고 있었다. 돌궐 같은 서북의 이민족을 제어하기 위해서라도 동북의 전략적 요충지인 탁군과 함께 서북의 전략적 요충지인 장안을 포기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특히 장안은 돌궐을 동서로 분리 공략할 수 있는 거점이자, 동서교역로인 실크로드를 제어할 수 있는 거점이기도 했다.

▲ 수당 시대의 장안성 외성벽 남문 부분. 현재의 성벽은 명나라 시대에 보수한 것이다.

장안을 확고하게 장악해 실크로드를 제어함으로써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한편 돌궐의 성장을 방해하면서 기회를 노린다. 이것이 아마도 무천진 출신 군벌들에게 일관된 사고방식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얘기했던 것처럼, 동서로 나뉜 돌궐은 隋代에 이르러 오히려 수나라의 눈치를 보는 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그러한 전략적 이점을 수 문제가 포기했을 리 없다.
비슷한 문제가 唐 高祖 李淵(566~635년, 재위 618~635년)에게도 있었다. 隋末唐初의 혼란기에 중국 전역에서 일어났던 대부분의 반란세력은 허약하기 그지없었다. 반면 隋末 啓民可汗이 죽고 始畢可汗(재위 609~619년)이 그를 이어 동돌궐의 가한이 됐는데, 그는 양제를 공격해 곤경에 빠뜨릴 정도로 강성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 李淵 역시 건국 초에는 돌궐의 신하를 칭할 정도였고, 624년 돌궐의 침입을 당했을 때는 그 위협을 벗어나고자 천도를 운운할 지경이었다. 단순히 생각하면, 좀 안정된 지역으로 천도하는 것이 오히려 나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唐 왕조 역시 隋와 별반 다르지 않은 처지였기 때문이다.


사실 돌궐의 세력이 쉽게 무너지지 않았던 데는 경제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돌궐은 隋와 唐의 서북방에 넓게 거주하면서 초원로를 장악하고 있었던 것은 물론 隋와 唐의 세력이 약해질 때면 언제든지 장안이 있는 관중지방을 공략하는 한편 실크로드 교역에서 오는 이익을 선취했다. 돌궐 자체 내의 산물은 물론 실크로드 교역에 참여함으로써 적지 않은 이익을 취했고, 그것은 그대로 돌궐의 강성한 세력을 유지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따라서 隋가 됐든 唐이 됐든, 장안에서 물러난다는 것은 단순히 관중지방을 상실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중원의 북부 지방 곧 강북 전체를 잃는 결과를 낳을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西晉이 맥없이 무너지면서 이후 300년 가까이 강북이 서북 이민족의 손에 놓였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사태가 되는 셈이다. 이 같은 배경을 염두에 두면, 수 문제가 왜 漢代 長安故城에서 동남방으로 불과 20리 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새로운 도읍을 건설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다만 수나 당이나 본질적으로는 북방 왕조, 한족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이면에는 혈통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상당한 정도로 오랑캐화 돼 있는 왕조다. 곧 혈통은 한족인 경우라고 해도, 그 사고방식은 전형적인 한족이라고 보기 힘든 경우다. 수나라가 남조의 마지막 왕조인 陳(557∼589년)을 흡수하면서 남북을 통일하기는 했지만, 陳의 중추로 활약했던 士族 세력이 완전히 복속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한족이 아니라 오랑캐 곧 서북 이민족이 세운 왕조라고 손가락질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게다가 그 중추세력인 무천진 군벌은 전통적인 士族이 아니라 무인가문이다. 여기에서 무인가문이란 것은 무력에 민감한 집단이란 의미다. 전통적인 士族의 입장에서 보자면, 때로는 한없이 빈약하기만 한 武力 한 가지만 제외하면 여러 모로 무시당할 만한 집단이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수 문제가 새롭게 大興城을 건설할 때는 남북을 통일하기도 전이었다. 앞뒤의 적을 다 평정할 만한 무언가가 필요했다고밖에 할 수 없다. 곧 남조의 陳을 무너뜨릴 수 있을 만큼의 정통성을 내세울 수 있어야 하고, 북방의 오랑캐에게는 그 세력의 강성함 혹은 물러나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보여줄 수 있어야 했다. 그런 점에서 급하게 서두르기는 했지만, 새로운 황도인 대흥성 곧 장안도성의 건설은 그러한 의지를 반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문제의식은 그의 후계자인 양제는 물론 당의 고조와 태종에게도 그대로 계승됐던 것으로 짐작된다.
文帝는 대흥성 입성을 반포하는 조칙에서 굳이 漢代 長安故城이 쇠락했음을 강조하고 그 쇠락한 구태로는 四海가 귀속할 수 없음을 지적했다. 이것은 단순히 漢代 長安故城의 쇠락만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새로 건설한 대흥성 곧 장안도성의 입지를 정함에 있어서, 周公이 洛邑을 건설할 때 입지를 정하면서 ‘지형을 살피게’[相土] 한 후 다시 점을 쳐서 길지를 얻었다는 기사를 원용해, ‘점복을 치고 지형을 살폈다’[卜食相土]고 표현한다. 周公 곧 聖人의 전례를 따랐다는 것이며, 이것은 이후 仁壽 연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천명을 받은 황제, 부처의 加被(부처나 보살이 자비를 베풀어 중생에게 힘을 줌)로 祥瑞를 보인 황제로서 문제 자신의 위상을 거듭해서 강조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수 문제의 대흥성 조성에 담긴 정치적 셈법
하지만 단순한 강조만으로 그러한 위상이 획득되는 것은 아니다. 실제 대흥성의 건설을 지휘했던 宇文愷는 입지인 龍首原의 여섯 구릉을 주역의 乾卦의 길상지로 해석하고 그에 따라 도성의 시설을 배치하고 있다. 무엇보다 『周禮』 「考工記」에 따른 전통의 법식에 따라 시설을 배치하는 것에 더해, 宮城과 중앙관아를 배치한 皇城을 민간거주구역과 완전히 분리하는 새로운 방식을 선택한다. 이를 위해 남북조 시대에 국가 종교로서 기능하기 시작한 국립도관인 玄都觀과 국격 사찰에 해당하는 大興善寺 역시 황제의 권위를 나타내면서 동시에 백성들이 궁성에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배치됐다. 정북에 궁성을 두고 그 앞에 중앙 관청시설인 황성을 배치한 다음 그 정중앙에서 남북의 축선을 잇는 대규모의 주작가도를 설치했다. 그리고 그 주작가도를 중심으로 동서로 대칭해 각종 시설을 배치하는 한편, 궁성과 황성의 동과 남 그리고 서의 세 방향에만 거주 구역을 설정하고 있다.


이러한 배치는 두 가지 목적을 동시에 달성할 수 있게 했다. 첫째는 중앙관청과 민간인 거주구역을 분리함으로써 통치의 효율성을 제고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중앙관청과 민간인 거주 구역이 분리됨으로써 公私에 분별이 생기는 것은 물론, 무엇보다도 중앙 관청들이 집중됨으로써 황제의 통치가 좀 더 효율적으로 작동할 수 있게 됐다. 둘째는 분리 그 자체가 중앙 관청의 권위를 높인 것은 물론 동시에 황제의 권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민간인이 접근할 수 없다는 것은 일정 부분 성역화 된다는 의미이며, 따라서 그 성역화된 공간에서 통치 질서를 지배하는 황제 역시 신성한 권위를 지니게 된다.


이 같은 隋의 대흥성 곧 長安城의 건설이 漢代 長安故城의 쇠락과 대비된 것은 의도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혼란기 이전의 漢나라가 갖고 있던 정통성의 재창조가 그것이다. 문제는 그와 같은 정통성의 재창조를 통해서 후방을 결집할 수 있는 정당한 왕조로서의 권위를 부여받기를 원했던 것 같다. 물론 그렇게 결집된 힘이 향할 곳은 자명하다. 漢代 이후 멈췄던 서북방을 다시한번 제어하는 것이 그것이다. 隋唐의 2대에 초기 100년에 걸쳐 장안성이 서역과 중원 그리고 동아시아를 아우르는 국제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통치자가 그러한 도성 건설의 의도를 외면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후의 장안이 서북 이민족의 말발굽에 짓밟혔던 이유 또한 자명하다고 할 것이다.

■ 이번 글은 세오 다쓰히코의 『장안은 어떻게 세계의 수도가 되었나』(최재영 옮김, 황금가지, 2006)와 최재영 선생의 「隋唐長安의 都城構造와 治安對策의 變化」(서울대 박사논문, 2010)으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석길암 금강대 불교문화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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