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7 05:25 (수)
[동향과 쟁점 ]들뢰즈-가타리 이해 둘러싼 논쟁
[동향과 쟁점 ]들뢰즈-가타리 이해 둘러싼 논쟁
  • 이지영 기자
  • 승인 2002.11.09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2-11-09 12:51:53
“들뢰즈-가타리는 反파시즘의 탈을 쓴 파시스트이다.” 다소 도발적인 주장이다. 적어도 들뢰즈와 가타리가 강압적인 파시즘에 대항해 전복적 사유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읽히는 이 땅에서는 말이다. 이것을 주장한 사람은 이종영 ‘진보평론’ 편집위원. 그가 ‘문학과 사회’ 여름호에서 ‘파시스트 들뢰즈와 가타리가 반파시즘을 말하다’라는 제목의 글을 실은 것이 논쟁의 출발이었다. 이에 칼을 뽑아들고 공격을 시도한 이는 김재인 문예아카데미 강사. 그는 다시 ‘문학과 사회’ 가을호에 ‘파시즘과 비인간주의 사이에서 외면당하는 들뢰즈와 가타리’라는 글로 응수했다.

이씨의 말부터 들어보자. 왜 들뢰즈-가타리가 파시스트인가. 한 단락을 인용해 보자. “들뢰즈와 가타리는 ‘유목적 사유는 보편적인 주체를 요청하는 대신 이와 반대로 독자적인 인종을 요청한다’라고 한다(천개의 고원 p.727). 자연적 범주인 인종을 이처럼 사회적 정치적 범주로 상승시키는 것은 파시스트 철학의 특징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인간의 동일성과 사유의 보편성을 부정하려 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구절, “들뢰즈와 가타리는 전쟁 기계의 본질이 창조적인 도주선을 그리는 것이라고 하지만, 그러한 창조적인 도주선은 오히려 파시즘 쪽으로 흐를 가능성이 더 많다.” 즉 들뢰즈와 가타리는 도주선이 혁명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하면서도 전혀 그 조건을 탐색하지 않고, 파시스트적 위험성 속에 도주선을 방치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김씨의 반론은 전제부터 부정한다. “초보적인 문헌적 작업마저 무시한 채 억측과 선입견을 가지고 글을 전개했다”. 개념의 정확함을 생명으로 하는 철학에서 자의적인 해석과 오독을 가지고 들뢰즈가 파시스트라고 주장했다는 것이다. 그는 그 예로 한글번역판 앙띠 오이디푸스와 원본과의 대조를 통해 들뢰즈 읽기를 시연했다. 이것을 통해 현재 통용되고 있는 들뢰즈 번역본이 가진 문제를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오역투성이의 번역을 가지고 이해했으니 들뢰즈-가타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견해도 덧붙였다.

논쟁방식·고증 둘러싸고 의견 대립

이 두 글이 발표되고 이씨는 다시 김씨에 대한 반론을 지인들에게 보냈고 이것은 인터넷을 통해 알려지게 됐다. 주요 골자는 “자신은 독자를 위해 번역서를 인용한 것 뿐”이며 “들뢰즈 추종자인 김씨는 자신의 의견을 수용하고 싶지 않았을 것”등이다. 들뢰즈-가타리를 학문적으로 읽어내는 것이 아니라 추종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믿음에 부합하지 않는 분석을 수용조차 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김씨는 다시 “내가 지적한 것은 이종영이 텍스트를 대하는 태도였다”라는 주장을 담은 반론을 제시했고 이와 함께 인터넷상에서는 네티즌 사이의 논쟁으로도 이어졌다.

이 논쟁은 우선 몇 가지 접점을 함의하고 있다. 우선은 논쟁의 방식에 대한 의견이다. “‘들뢰즈-가타리는 파시스트다’라는 주장에 대한 답변은 ‘들뢰즈-가타리는 파시스트가 아니다”라는 논증으로 진행돼야 한다. 그런데 김재인은 이에 대한 논의는 생략한 채 문헌학적 고증이 미흡하다는 확인되지 않은 사실을 주장하면서 학자로서의 명예를 실추시켰다.”(이) “그는 줄기차게 논증을 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내가 읽기에는 그의 글에는 논증이 없다. 억측과 짐작. 그리고 권위에 기대는 글쓰기로 만연해 있다.…이씨는 내가 순진하게 들뢰즈-가타리의 선언을 그대로 믿고 추앙했다고 말하고 있다. 들뢰즈-가타리에게는 논증이 부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씨는 ‘자신이 이해하지 못했다’거나 ‘자신이 동의할 수 없다’를 ‘논증의 부재’라고 말하는 것에 불과하다”(김)

두 번째로는 문헌학적 고증이 객관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철학자로 손꼽히면서도 그의 저서들은 난해하기 그지없어 정확히 이해하기 힘들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그렇다 보니 원본의 번역에 대해서도 두 논객의 입장은 팽팽히 대립한다. ‘앙띠 오이디프스’의 첫문단에서 역자의 주석을 살펴보자. “여기서 ‘그것’이라 옮긴 말의 주석은 불어 원서에서 싸(ca)로 되어 있다. 영역에서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Id로 해석되고 있고, 독일어역에서는 Es로 옮기고 있는데, 이것 역시 프로이트의 개념인 Id를 가리킨다’를 둘러싼 해석이 그 대립의 단면을 보여준다. 김씨는 이 역주야말로 ‘앙띠 오이디푸스’를 잘못 읽게 만든 가장 큰 주범이라고 본다. “싸(ca)는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Id가 아니다. 혹은 그렇다 하더라도 오히려 정신분석이 발견해 놓고도 오해한 무의식, 다양체로서의 무의식을 가리킨다. 이 문맥에서의 그것은 ‘입’이다.”(김) “첫문단에서의 싸는 명백히 이드이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그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어 표출되는 ‘이드’에 정관사를 붙이지 말자는 다분히 전술적인 목적을 가지는 것이다.”(이)

세 번째 들뢰즈-가타리의 주장 중 들뢰즈 철학의 존재론적 위상을 둘러싼 논쟁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동물-되기’와 ‘여성-되기’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여성은 누구나 마음대로 될 수 있는 존재일까?…그들은 여성과 동물을 열등한 존재로 설정하고, ‘우리 우월한 남성’이 선심이라도 쓰듯이 언제든지 여성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이) “‘동물-되기’와 ‘여성-되기’가 동일하게 여겨지는 것은 ‘소수자-되기’라는 맥락에서다. 이것은 언제든지 선심 쓰면 할 수 있는 하찮은 일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힘든 짓이다. ‘소수’가 어떻게 ‘열등’으로 읽힐 수 있을까.”(김)

논쟁이 시작되고 꽤 시간이 흘렀지만, 두 논객은 그다지 합의점을 발견하지는 못한 것 같다. 오히려 그 팽팽한 긴장감이 대립되는 구도로 변할 뿐이다. 뿐만 아니라 이들을 둘러싼 다른 학자들도 이 논쟁의 합의점을 찾지 못한다. 철학자 이정우씨는 “들뢰즈-가타리를 파시스트라고 읽어내는 것은 그들의 철학이 가진 존재론적 위상을 파악하지 못한 명맥한 오독이다. 들뢰즈의 철학은 현실과 같은 거시세계에 적용될 수 없는 미시적인 차원을 논의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평가한다.

반면 문화 평론가 김성기씨는 “어차피 아카데믹한 대학이 아닐 바에는, 또 모두가 한 철학자의 저서를 완독하지 못할 바에는 자신의 맥락으로 타인의 사상을 끌어올 수 있는 해석의 여지를 남겨야 하지 않을까”라는 입장이다. 들뢰즈 철학의 수용 초반부터 계속돼 온 두 입장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형상이다.

우리 학계 번역의 깊이 따져
그러나 두 논객간의 대립이 속 시원히 답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두 입장을 이해하기에는 일차적으로 문제의 텍스트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탓도 있고, 두 사람간의 대화가 서로를 비난하는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이다. 동시에 “최명관 교수가 고대 희랍 연구에서는 우수한 학자였지만 들뢰즈 번역에 있어서는 문제가 있다”라고 평한 윤평중 한신대 교수(철학)의 말처럼 들뢰즈를 이해하기 위한 토양이 약한 탓도 있다. 뿐만 아니라 국내 들뢰즈 수용에 있어서도 그 중심인 철학적 수용보다는 문학·문화론적인 수용이 먼저 진행된 현실도 간과할 수 없다. 두 논객의 논쟁은 두 사람의 것이기도 하지만, 국내 프랑스 철학 연구가 가진 약점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원전 이해에 대한 학계의 불완전한 위치를 다시금 생각할 수밖에 없다.
“많은 독자들이 직접 읽지 않고 말하는 데 익숙해있다. 이종영과 나의 글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들뢰즈와 가타리의 글에 대해서도 섣부른 추측과 왈가왈부 이전에 제발 직접 읽고서 말했으면 좋겠다”라는 김씨의 말이 따끔하다. 이 논쟁이 국내 프랑스 철학계가 가진 불완전한 위상을 재고할 있는 기회로 거듭나기를 기대한다.

이지영 기자 jiyoung@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