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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로 살아남기
번역가로 살아남기
  • 박아르마 건양대·불문학
  • 승인 2015.03.23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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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박아르마 건양대·불문학

▲ 박아르마 건양대 교수
번역이 외국문학 전공자의 의무는 아니지만 학위를 받고 우연한 기회에 번역을 시작해 꾸준하게 일을 하다 보니 20여권의 프랑스어 작품을 번역한 나름 중견번역가가 됐다. 책을 출간하고서 처음에는 출판사에서 증정본으로 받은 책 말고도 수십 권을 개인적으로 구입해 가까운 사람들에게 나눠드렸다. 최근에는 증정본조차 다 소진하지 못할 정도로 받은 책을 서가에 쌓아두는 일이 많아졌다. 책을 출간했을 때의 최초의 감동과 성취감이 점차 희미해진 탓인지도 모르겠다.

번역한 책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듣는 인사말 중에는 월급 외에 번역까지 해 돈을 버니 번역료 수입이 상당하겠다는 부러움인지 야유인지 모를 말이 심심치 않게 있다. 번역을 많이 하는 교수들 중에는 연봉 이상의 수입을 올린다고 자랑하는 사람도 간혹 있지만 실제 인세 수입을 확인할 길은 없다. 내 경험에 비춰, 그리고 우리 출판시장의 상황을 고려했을 때 인문학 책을 번역하는 번역자가 생활이 가능할 정도의 수입을 올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대학에 있으면서 꾸준히 번역 일을 하거나 과거에 번역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경우 대학원 시절 자기 이름이 아닌 이른바‘대리 번역’으로 번역에 입문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대리번역을 하게 되면 정당한 노동의 대가가 번역자에게 가지 않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그 성과물은 대개 영향력 있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나오기 마련이다. 더 큰 문제는 쪼개기 번역과 번역자의 책임감 부족으로 세상에 나올 수 없는 책이 독자들에게 소개되는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인문학 책을 그것도 자기 이름으로 대형출판사에서 출간할 수 있었던 내 경우는 어쩌면 행운인지도 모르겠다.

번역의 길에 들어서고 꽤나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번역가로서 늘 겪는 어려움은 원서와 모니터를 번갈아 들여다보며 원문을 이해해 우리말로 옮기는 일이다. 처음 번역을 시작할 때보다 번역 속도가 조금 더 붙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책상을 떠나지 않고 하루 중 일정 시간을 쏟아야만 결과물이 나온다. 그마저 그것도 아주 조금씩 일정한 분량밖에 성과가 나오지 않는 것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말하자면 번역을 하는 데는 별다른 요령이 없고 오래 앉아있으면서 원문과 씨름하는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가내 부업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지만 봉투 붙이기, 인형 눈 붙이기와 같은 단순 노역을 번역 일과 비교하려는 사람도 있는데, 생각해 보면 무리도 아니다.

번역가로서 겪는 또 다른 어려움과 고통은 책이 출간된 뒤 듣게 되는 독자들의 반응이다. 번역을 시작하고 자신도 이해하지 못한 문장을 되는 대로 옮긴 기억은 없지만 결과물에 대해서는 비판이 따르게 마련이다. 비문과 오역은 온전히 번역가가 감당해야할 책임이다.

지난해 카뮈의『이방인』번역 논쟁이 일었을 때 익명으로 오역의 문제를 제기한 사람의 주장에 대해서는 공감할 수 없었지만 번역자로서 자신의 번역이 완전하다고 확신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보면 독자의 반응에 대해서는 늘 신경을 쓰게 된다. 내가 10여 년 전에 번역한 책을 두고 블로그에서 조목조목 해석의 문제점을 지적한 사람의 글을 보고 한동안 괴로워했던 적도 있었으니 말이다. 책은 독자와의 만남을 통해 완전한 생명력을 얻는다는 프랑스 작가 미셸 투르니에의 말이 번역에도 적용된다는 생각을 하며 독자의 비판을 달게 받아들이려 노력한다.

이쯤 되면 많은 수입을 얻기도 힘들면서 오랜 시간을 할애할 수밖에 없고 결과물에 대한 비판에서도 자유롭지 못한 번역 일을 왜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드는 것도 당연하다. 내 경우에 한정해서 말하자면 직업이 있고 적성에도 맞아서 번역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바꿔 말하면 번역 수입에 전적으로 의존해 생활을 하거나 사명감으로 번역을 하기에는 한국 출판시장과 번역 환경이 열악하다는 뜻이다. 수만 부가 팔린 책의 경우 원고료 한번으로 번역료를 받게 되고, 번역 기간만 수 년이 걸리는 고전의 경우 책이 잘 안 팔릴 것을 알면서도 인세 계약을 하게 되는 것이 현실이다. 원고료를 받을 것인지 인세 계약을 할 것인지는 번역자가 아닌 출판사의 결정사항이기 때문이다. 올해 한국연구재단의 명저번역지원사업 예산이 10억 6천300만원이고 사업에 선정된 연구자에게 평균 2천 여 만원의 지원금이 돌아간다는 발표를 봐도 고전번역에 도전하려는 연구자들로서는 맥이 빠질 수밖에 없다.

장 자크 루소 전집 발간 계획에 참여해 최근『고백』1, 2권을 번역 출간한 데는 10여 년전 祖父의 간곡한 부탁도 한몫했다. 철학을 전공한 조부는 이미 해방 전에 일본어로 번역된 루소의 책을 읽으셨는데 아직까지 우리나라에 루소 전집조차 없으니 꼭 번역을 해보라는 부탁이었다. 번역 과정의 어려움보다는 지금의 어려운 출판 여건에서 18세기 서양 고전이 출간됐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다. 올해 100세가 넘은 조부께서 루소 전집의 완간을 보게 되셨으니 번역가로서 살아남은 것이 행운이 아닐 수 없다.

박아르마 건양대·불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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