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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예술경험 속에서 공동체의 이성적 구성 가능하다”
“다양한 예술경험 속에서 공동체의 이성적 구성 가능하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03.03 16:5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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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인터뷰_ 『심미주의 선언』 출간한 문광훈 충북대 교수

 

▲ 사진 제공= 김영사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문광훈 충북대 교수는 크게 세 가지 방향에서 글을 써왔다. 첫째는 독일문학과 문예론으로, 박사학위논문을 번역한 『페르세우스의 방패―바이스의 ‘저항의 미학’ 읽기』, 최근에 펴낸 『가면들의 병기창: 발터 벤야민의 문제의식』 등이 있다. 두 번째는 한국문학과 문화에 대한 글쓰기인데, 『시의 희생자, 김수영』, 『한국 현대소설과 근대적 자아의식』 등이 이에 해당한다. 세 번째는 그의 독특한 시선을 엿볼 수 있는 ‘김우창 읽기’다. 『구체적 보편성의 모험』, 『김우창의 인문주의』, 『아도르노와 김우창의 예술문화론』 등이 구체적 결과물이다. 여기에는 예술론과 미학에 관련된 글쓰기도 포함된다. 사진평론집 『거친 현실의 내면: 강운구론』, 『램브란트의 웃음』 등이 있다.
확실히 책 목록으로 보더라도, 그는 우리시대의 열정적인 사유인의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의 글쓰기 방향을 언급한 것은 그가 최근에 내놓은 『심미주의 선언』(김영사 刊)가 놓이는 자리를 이해하기 위해서다. 이 책은 어쩌면 그의 사유의 한 축이 빚은, 그가 즐겨 말하는 ‘형성적 주체’의 내면일 수도 있다. 그는 자신의 ‘심미주의 선언’을 가리켜, “정치 적대적 담론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의 드넓은 가능성을 예술경험적 차원에서 모색한 시도”라고 말한다. 이성과 마음의 심미주의를 탐구해온 그는 어째서 이 책을 내놓았을까. 그것도 ‘선언’이라는 제목으로. 다음은 그와 나눈 이메일 인터뷰 전문이다.

△ 박사논문이 ‘저항의 미학 읽기’였다. 이번 책은 ‘심미주의’의 심층을 파내려갔는데, 혹시 이게 ‘저항의 미학 읽기’와 관련 있지 않나?
“삶에 대한 책이건, 이 책에 대한 소개이건, 그것은 단순화를 피할 수 없다. 제대로 설명하려면 길어질 수밖에 없는데, 지면의 제약 상, 최대한으로 간결하게 답변하겠다.
당연히 한 사람의 글쓰기에도 일종의 ‘역사’가 있다. 이 사적 역사의 경로 속에서 뒤의 책은, 그것이 제대로 된 경우라면, 앞의 책을 변증법적으로 지양하게 돼있다. 나의 경우, 학위논문을 끝낸 1999년부터 시작된 글쓰기 작업에서는 처음부터 설정한 세 가지 방향이 있었다.


첫 번째는 독일문학과 철학, 미학과 문화론을 깊게 공부해 그에 대해 쓰는 것이고, 둘째, 이것을 한국의 문학과 문화지형에 적용하는 것이며, 셋째는 이를 통해 나 자신만의 예술론/미학을 정립하는 일이었다. 이런 작업에서 이론적 근거로 내가 의지한 작가는 여럿인데, 벤야민이나 아도르노 이외에 은사이신 김우창 선생의 저작이 그에 해당한다. 이 서너 방향에서 축적된 중요한 하나의 문제의식은 결국 ‘문학예술은 무엇인가’, ‘인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여기에서 ‘심미적인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으로 수렴됐다. 바로 이런 생각을 독일 현대문학에서 깊게 천착한 대표적인 작품이 페터 바이스(P. Weiss)의 『저항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심미주의 선언』은 학위논문에서 가졌던 나의 예술비평적 관점을 좀 더 자유롭게, 한국의 문화적 유산과 서구의 문화적 유산을 결합하는 가운데, 다시 전개한, 일종의 나의 학문적 독립선언서다. 이 선언의 핵심에는 ‘심미적인 것(das Ästhetische)의 반성적 성찰적 비판적 잠재력’이 있다. 그리고 이 잠재력이 지닌 특징은, 간단히 말해, 감각과 사고의 갱신을 강요하거나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장려하는’ 데 있다. 아도르노가 예술을 ‘비강제적 언어’라고 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예술경험 속에서 스스로 자신의 감각과 사고를 변화시키는 가운데 삶 자체의 변화로, 공동체의 이성적 구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사실 이것은 인문학의 가장 빛나는 통찰이기도 하다. 내가 저항을 한다면, 심미적-인문학적으로 하고 싶다.”


△ 이 책은 넓게 보면 ‘좋은 삶의 가능성’에 대한 탐색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책 제목에는 ‘선언’이 들어 있다. 무엇에 대한 촉구이며 요청인가.
“책 제목에 ‘선언’이 들어간 이유는 나 개인적으로는 그만큼 절박하고 절실했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 - 사회적인 이유와 학문적인 이유가 있다.
첫째, 사회적인 이유다. 나는 한국 사회만큼 집단주의적 이데올로기적인 슬로건에 의해 주기적으로 휘둘리는 사회가 없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경제적 물질적 수준에서 다른 나라와 비교문화적으로 고찰하면 그렇다는 얘기다. 이런 집단주의적 이데올로기적 성향 때문에 각 개인의 삶은 많은 부분 空洞化돼 있다. 그러나 원래 ‘사회적인 것(the social)’의 정확한 의미는 ‘나를 넘어서 공동체적 선의를 위하는 혹은 배려하는’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사회적인 것은, 너무나 자주 얘기됨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의미에서 쓰이기보다는 이해관계적으로 혹은 당파적으로 오용되는 경우가 더 많다(그래서 나는 ‘사회적인 것이 과잉’ 혹은 ‘사회적인 것의 과부하’라는 제목으로 이를 지적했다). 사람들은 다들 바쁘게, 또 열심히 살아가지만, 정말 자기 삶을 ‘실질적으로 살아가는’, 그래서 깊은 의미에서 자족하는 삶의 사례는 드물지 않나 여겨진다. 내가 󰡔심미주의 선언󰡕에서 나/개인/주체/자기 삶을 강조하는 이유다.


둘째, 학문적인 이유다. 더 결정적인 이유는, 한국사회에서 ‘인문학 위기’를 그렇게 줄기차게 얘기하면서도, 역설적이게도, 인문학의 근본정신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해 보여주는 설득력 있는 사례는 매우 드물다는 사실에 있다. 이 땅에서 500쪽, 1천 쪽의 책을 쓰면, ‘어리석다’는 말도 있다. 그런 책을 낸다면, “두 권으로 묶어내는 것이 좋다”는 조언도 서로 즐겨 한다. 이른바 ‘평가지수’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우리 학문공동체의 현주소가 이렇다. 최근 몇 년 전에도 나는 ‘논문편수가 모자라’ 대학임용지원에서 여러 번 ‘자격미달’된 적이 있다. 그 무렵 나는 10권 가까이 책을 썼지만, 이것을 참작해주는 대학은 한국에 없었다. 드물게 산정하는 아량을 베푼 대학에서 책 한 권은 논문 한 편과 ‘똑같은’ 점수를 받았다. 한국은 이토록 놀라운(!) 곳이다. 무엇을 더 말하겠는가. 이런 곳에서 인문학을 한다는 것은 사치이고, 인문학의 가능성을 말한다는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어리석은 길을 15년 전부터 걸어왔다. 결국 인문학의 저력은 소수의 모범적인 사례 속에서 입증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선의나 윤리는, 도덕교과서가 그러하듯이, 강제되거나 명령될 수 없다. 그것이 지속적으로 훈련되고 연마되어야 하지만, 그러나 각 개체의 독자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이뤄져야 한다. 문학예술 그리고 인문학은 각 개인의 독립성을 존중하는 가운데 그 변화의 자발적 가능성을 꾀한다는 점에서 사회과학이나 자연과학과는 방법론적 변별성을 지닌다. 바로 이 선의의 자발적 장려, 비강제적 자기육화의 과정을 강조한 것이 예술의 ‘형성/교양이념(Bildungsidee)’이다. 이 형성이념은 쉴러와 헤겔 이후 독일이상주의 철학과 미학의 최대 유산이지만, 크게 보아 서구사회의 가장 뛰어난 문화이념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것은 동양의 전통에서도 결코 없었던 것이 아니다. 뉘앙스와 강조점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심미주의 선언』에서 지나가듯 썼듯이, 성리학에서는 ‘자기를 위하는 학문(爲己之學)’이라는 이름으로, 또 양명학에서는 ‘내면에 전념해 자기를 충실히 하는 학문(專內實己之學)’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좋은 뜻은 이루기 어렵다. 이제 우리는 좋은/바른 삶의 방식을 어떤 외적 명령으로서가 아니라, 또 강제된 명령으로서가 아니라, 그런 외적 규칙이나 원칙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각 개인이 스스로 연마해 내면화하는 단계―자발적 육화의 문화적 단계에 들어섰다. 그것이야말로 성숙된 문화이고, 올바른 시민문화의 성격이기 때문이다. 문학예술이나 미학은 바로 이 점을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인문학의 가장 빛나는 유산도, 바로 이런 점―감각과 사고의 자발적 갱신이 지닌 기쁨, 그 윤리적 차원을 암시하는 데 있다. 선의는, 무엇보다 내 스스로에게 좋은 것이기에, 할 만한 것이다.”


△ 공재 윤두서나 이태준을 읽어낸 대목은 깊고 아름다우며, 시리기까지 하다. 그런데, 이 책에는 여러 목소리가 섞여 있는 것 같다. 多聲的이다. 실러의 목소리도 있고, 김우창 교수의 목소리도 들린다. 그런 목소리 사이에서 ‘저자’만의 목소리를 들으려면, 무엇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가.
“이전에 독일 수상이었던 게르하르트 쉬뢰더는 언젠가 사민당 전당대회에서 ‘스스로 감동받지 않으면 타인을 감동시킬 수 없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이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심미주의 선언』은 일종의 ‘사랑의 궤적’이다. 즉 이 책은 내가 아끼는 시와 좋아하는 그림, 그리고 내가 즐겨 듣는 음악, 또 내가 존경하고 흠모하지 않을 수 없는 작가와 화가와 시인과 음악가의 목록들이다. 깊게 사랑하지 않으면, 그리고 참으로 오래 사랑하지 않으면, 책은, 적어도 울림을 주는 책은, 결코 쓸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공재 선생을 예로 들어보자. 조선 시대에 선비가 과거에 나가지 못하면, ‘사람’ 행세를 하기 어려웠다. 공재 선생은 당쟁의 와중에서 과거 길이 일평생 막혔지만, 또 위의 형은 바로 그 때문에 죽음을 당했지만, 그는 ‘동인’이니 ‘서인’이니 하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그는, 「행장」이 보여주듯이, 나이가 어리다고 함부로 꾸짖거나, 천한 종이라고 ‘이놈저놈’ 부르지 않았다고 한다. 「행장」은 대체로 어버이가 죽은 후에 아들이, 또 지인이 미사여구를 곁들어 쓴다고 하지만, 그래서 과장이 없지 않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공재의 「행장」에서는 어떤 구체적 체험에서 오는 깊은 호소력이 있다. 그것은 그 자체로 깊은 감동을 주는 소중한 기록물이 아닐 수 없다. 공재 선생은 이런 험난한 현실 속에서도 자기 자신과 삶 그리고 세계에의 탐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또 하나―「공재 자화상」에 대해서는 좋은 안내서도 있지만, 대체로는, 우리나라에서 미술사 연구가 대체로 그러하듯이, 양식사나 모티브 연구에 집중돼 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연구는, 필요하면서도 답답하고 내게는 지루하다. 나의 관심은 공재 선생의 이런 실제적 삶의 기율이 어떻게 그의 초상화에, 그의 눈빛에 어려 있는지, 그의 내면적 정신의 풍경은 어떠한지에 있었고, 바로 이 점을 쓰고자 오래 전부터 열망해 왔다. 왜냐하면 그것이야말로 공재의 이 놀라운 「자화상」이 가진 ‘현재적 의미’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바로 이 점에서 공재의 자화상은 카라바조의 자화상―󰡔골리앗 머리를 든 다윗󰡕에 들어있는 자기직시의 엄정성과 정직성과 이어진다고 나는 판단한다). 그 내면풍경의 핵심에는, 글 속에서 적었듯이, ‘恬靜自守’―‘고요 가운데 나를 지킨다’라는 원칙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이 공재의 삶의 원칙을 푸코가 재해석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나 세네카의 ‘자기절제’의 정신, 또 푸코 자신의 ‘자기배려의 미학’와 연결시킴으로서 그 보편적 현재적 의의를 강조하려고 했다.
상허 이태준 선생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의 성북동 가족사진을 보면 마음이 아려온다. 흔히 ‘시는 지용이요 산문은 상허’라고 하지만, 그의 단편작품을 보면, 그 어느 것이나 그의 궤적―선비로서의 향기가 배어있다. 그런 분이 월북 이후 숙청되고, 결국에는 고철노동자로 살아가야 했다. 나는 언젠가 한국근대소설론인 󰡔한국현대소설과 근대적 자아의식󰡕(2010)을 쓰면서 그의 중편 소설 「해방 전후」나 채만식의 「민족의 죄인」을 본 다음, 일제 시대의 삶에 대해, 또 타인의 삶에 대해 함부로 단정해선 안 되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다. 이 작품에 나오는 어떤 주인공만큼 나는, 내가 그 식민치하에 살았더라면, 더 양심적으로 살았으리라고 결코 자임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은 보이는 보이지 않는 겹겹의 한계와 제약 속에 산다.
다시 말하자. ‘겹겹의 한계 속에 산다’고 해서 모든 과오를 무조건 용서하자는 뜻이 아니라,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볼 수 있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행동과 사유, 느낌과 언어의 곳곳에 이름하기 어려운 난관이 있다는 뜻이고, 바로 이런 난관을 헤아리는 것 자체가 문학예술의 윤리적 소임이라는 뜻에서다. 이 윤리적 소임을 행하는 가운데 우리는 자신의 삶에 대해서는 더 깊어지고, 타인의 삶에 대해서는 더 너그러워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사랑하고 흠모하는 이들의 삶의 궤적을 글로 기록하면서 내 스스로 깊어지는 듯 한 느낌을 여러 차례 받았다.
다성성을 지적했는데, 물론 내가 읽고 사숙하고 흠모한 여러 작가와 사상가의 목소리가 내 책에는 녹아있을 것이다. 그들의 견해 역시 나의 글 속에 나의 피와 뼈와 근육이 되어 내 삶의 일부로 녹아있을 것이다. 나는 『심미주의 선언』이 어떤 미학론이나 예술론이 아니라, 다양한 심미적 경험 속에서 어떤 삶의 다채로운 교향학적 울림을 주는 ‘작품’이 되기를 간절하게 희망한다(음악은 내게 중요하다. 4장의 제목도 ‘서정적 모음곡’이지 않나).”


△ 이 책에서는 심미주의를 19세기말 유미주의의 되풀이가 아닌, ‘심미적인 것의 잠재력’을 탐구하는 데 집중한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현실의 파편과 대결하고 삶의 모순과 역설을 직시하면서 그 불순을 교정해가는 복합적 대응방식”으로 정리되는데, 미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앞서 언급했듯이, 나는 미학에 대한 개론서를 쓰거나, 어떤 개념을 논증하거나, 또는 어떤 미학유파를 안내하는 데 별 관심이 없다. 내가 의미하는 ‘미학’은, 간단히 말하면, ‘삶의 예술(Lebenskunst), 예술의 삶(Kunstleben)’이다(󰡔심미주의 선언󰡕의 영어 제목으로 ‘manifesto for life aesthetic’를 쓴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러니까 하나의 학문적 분과로서의 미학 - 논증과 개념의 체계로서의 미학이 아니라, ‘삶 안에 육화돼 나/개인/주체가 살아가는 나날의 생활의 실질적 에너지로 발현돼 나오는 미학의 가능성’에 나는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나의 미학적 문제의식은 단지 분과학문으로서의 미학에만 제한된 것이 아니라, 사실 인문학, 더 크게 문화의 문제의식과도 겹쳐있다. 인문학의 모든 문제는, 궁극적으로, ‘삶을 어떻게 제대로 살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수렴되고, 문화는, 적어도 좋은 문화는 결국 ‘각 주체가 건전한 시민으로서 어떻게 이성적인 사회를 구성하고 그에 참여할 것인가’라는 문제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나는 현실과 대결하면서 선의의 가능성을 미학적 문학예술적 미학적 문화적 차원에서 타진하고, 바로 이 점에서 내가 말하는 심미주의는 현실이나 윤리를 도외시하는 19세기 말의 ‘유미주의’나 ‘탐미주의’와는 질적으로 전혀 다르다.

이런 삶의 미학으로서의 심미주의의 핵심에는 다양한 ‘예술경험’, 더 크게 ‘심미적 경험’이 있다. 나는 그림이나 사진, 소설이나 조각, 음악과 시 등등에 대한 나의 개인적 경험의 내밀한 경로를 내 언어로 추적하고자 했다. 이 기록이 그 나름으로 절실하다면, 독자에게 어떤 반향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집단의 규칙, 외적인 명령어가 아니라 나의 언어, 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나온 절실한 느낌이 내게는 중요한 것이다.”


△ 4-5년전 이 책을 구상했다고 썼다. 그간 다양한 글쓰기를 시도해 왔는데, 왜 이 책을 썼나? 현실에 대한 전면적 응전방식을 고안하는 게 학문적 탐색의 주된 목표라고 했다. 여기에 ‘심미적인 것’이 유효하면서 동실에 절실한 방식이 된다고 했다. ‘심미적인 것의 잠재력’이 오늘 한국사회에 긴급한 요청이 될 수 있다고 보는 이유는.
“앞서도 적었지만, 우리 사회만큼 집단적 술어나 유행에 휘둘리는 곳이 없는 것 같다. 그것은 좋게 말하면, 흔히 말하듯이 ‘역동적’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사회적 안정성이 떨어진다는 뜻이다. 이제 우리 사회의 문화는 이제 ‘깊이’에 대해 고민해야 할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깊이’를 고민한다는 것은 ‘문화의 성숙’을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다. 문화의 깊이, 성숙된 문화의 출발점에는 무엇보다도 ‘내가 내 삶을 허황되지 않게 사는 데’ 있다. 즉 내 삶을 깊고 높은 의미에서 ‘돌보는’ 데 있다. 깊은 의미에서 돌본다는 것은 자기의 감각과 사고와 언어를 또 다른 가능성에 열어둔다는 뜻이고, 더 간단히 말해, 반성한다는 뜻이며, 반성 속에서 변형해간다는 뜻이다. 각 개인이 반성을 통해 자기 삶을 쉼 없이 개선시켜 간다면, 나는 내 옆의 너와 우리에 다가갈 수 있고, 우리는 그들과 교류할 수 있을 것이다. 심미적인 것의 잠재력이란 주체의 자발적 자기변형 속에서 삶의 전체성에 참여하는 데 있다.”


△ 심미적 주체를 두고 감성과 이성을 조화시키는 균형적 존재라고 지적했다(근래 정치와 감각 논쟁을 연상시키고, 또 이것을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이 심미적 주체, 균형적 존재가 ‘형성적 주체’라고 설명한 대목이다. 그렇다면, 심미적 주체는 오늘날 한국 대학(풍토)에서, 나아가 현재 사회(풍토)에서 만들어질 수 있다는 뜻 아닌가? 그것은 또 외적 교육뿐 아니라, 개인적 차원에서의 자기 수양(함양)을 통해 가능한 것인지도 궁금하다.
“『심미주의 선언』의 「후기」에 적었듯이, 나는 ‘사회’나 ‘집단’보다는 ‘나’와 ‘개인’, 이 개인의 ‘심성’과 ‘인격’을 더 중시한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몸으로 담고 있고, 그래서 과장을 줄이면서 비교적 조금은 더 자신 있게, 덜 허황되게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미 여러 차례 적었듯이, 사회변혁에서 정치적 제도적 법률적 차원의 개선이 필수불가결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해방 이후 한국사회의 70년을 되돌아보면, 지금까지 사회정치적인 요소가 강조된 데는 정당하고도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 그러나 앞으로도 그럴까? 혹은 지난 20여년 이래 그것이 지나치게 강조된 것은 아니었을까?


말하자면, 삶의 전체적 균형이라는 차원에서 봤을 때, 이제 정치는, 이미 여러 차례 강조했듯이, 정치 자체가 아니라 ‘정치적인 것’의 차원 속에서, 즉 삶의 일부로서의 정치라는 의미에서 근본적으로 재검토될 필요가 있다. 정치는 이제 생활, 시민, 개인, 사적인 공간을 더욱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할 때가 됐다. 우리나라의 정치학자는 변혁과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민주주의와 복지를 내세우지만, 왜 ‘정치와 일상’, ‘정치와 양심’, ‘내면성과 정치적 차원’……이런 글을 쓰지 않을까? 가장 사적이고 내밀하고 감각적인 사안에서 이미 정치적인 것의 움직임은 시작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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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오 2018-11-09 22:16:49
한 편의 아름다운 글과 좋은 정리 감사합니다. 이렇게 우수한 대담이 3년 전에 이루어졌다니, 지금 발견한 것이 아쉬울 정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