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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유럽 의학자들에게 위대한 스승으로 불린 ‘아비센나’를 생각하다
르네상스 유럽 의학자들에게 위대한 스승으로 불린 ‘아비센나’를 생각하다
  •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 승인 2015.03.03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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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 인문학 기행: 몽골초원에서 흑해까지 33.古都 부하라: 중앙아시아의 이슬람화와 르네상스(2)

 

▲ 이스마일 사마니 묘당. 소그디아나에 사만왕조의 기틀을 마련하고 중앙아시아 문예부흥을 가능케 한 명 군주 이스마일 사마니의 묘. 사진 김옥철 안그라픽스 대표

전쟁은 수많은 희생을 낳는다. 전쟁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되는 비인간적 숙명이 그 중 하나다. 657년을 기점으로 서돌궐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난 후 중앙아시아 북방 초원 지대에는 투르크계 유목 집단들이 저마다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이들이 이슬람 세계에 노예를 공급하는 악덕업자들이었다.

I have sent for thee, holy friar; / But ‘twas not with the drunken hope, / Which is but agony of desire / To shun the fate, with which to cope / Is more than crime may dare to dream, / That I have call’d thee at this hour: / Such father is not my theme ? / Nor am I mad, to deem that power / Of earth may shrive me of the sin / Unearthly pride hath revell’d in ? / I would not call thee fool, old man, / But hope is not a gift of thine; / If I can hope (O God! I can) / It falls from an eternal shrine. (「TAMERLANE」 by Edgar Allan Poe from Tamerlane and Other Poems)

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는 이중 잣대가 필요하다. 남에게 적용할 엄격 혹은 가혹한 막대 자와 자신에게 부과할 느슨한 고무줄 자. 근래 보기 드문 기이한 집단 IS의 폭력에 대한 태도가 이러한 인간의 이중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중앙아시아에 거대한 제국을 세운 티무르의 잔혹함은 지하드(聖戰)이라는 명분으로 미화됐다.


그런 그가 내적 갈등이 없었을까. 밥 먹듯이 살상을 하고서도 마음 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그의 심사를 헤아리고 고뇌에 찬 독백의 장시를 쓴 사람이 있다. 우연히 나는 그를 이번 설날에 만났다. 젊은 날 음습한 분위기의 그가 쓴 소설을 머리가 쭈뼛거리는데도 밤새 이불 뒤집어쓰고 읽었거니와, 사랑에 관심이 컸던 시절에는 「애너벨 리」와 「헬렌에게」라는 시를 절절한 심정으로 읊조리기까지 했다. 심미주의 시인으로만 알고 있던 그가 동양의 역사적 인물에 관심을 갖고 그의 내면을 간파하는 시를 지을 줄은 미처 몰랐다. ‘절름발이 티무르’라는 어원을 갖는 Tamerlane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기묘한 시는 애드가 앨런 포우의 「TAMERLANE」이다.


이 시는 역사적으로 정확한 것은 아니다. 반드시 그럴 필요도 없다. 티무르가 잔인함으로 유명한 14세기 투르크 정복자라는 사실 정도만 알고 있어도 충분하다. 시의 내레이터 역할을 하는 남자 티무르는 권력을 위해 젊은 날의 사랑을 무시한다. 그런 그가 죽음의 침상에서 그가 내린 결정, 왕국을 건설하고자 하는 야심 때문에 아프게 사랑을 포기한 점을 후회한다. 시 속에서 그가 사랑한 여자의 이름은 아다(Ada)였다. 바이런(Byron)을 흠모한 포우였기에 그의 딸 Ada Lovelace의 이름을 빌린 것이려니 싶다.


설 명절을 지내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저녁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의 학문적 스승은 누구인가. 여태껏 학문의 길에 있으면서 이제야 스승을 묻는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라고 놀릴 사람들이 있겠지만 내게는 새로운 자문이었다. 물론 학문적으로 이끌어주신 전공분야의 은사님들이 계시다. 그분들이 계시기에 내가 이만큼이나 배움의 길에 서 있을 수 있었다. 내가 말하는 학문적 스승은 직접적 가르침이 없어도 내가 닮고 싶고 尊崇하는 그런 인물을 말함이다. 고타마 싯다르타 같은 위대한 구루를 본받고 싶었다. 언어학을 공부하면서도 정작 촘스키처럼 되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에 러셀이나 비트겐슈타인 같은 학자가 되고 싶었다. 러셀의 자서전을 읽고는 특히 그가 내 학문의 길의 모범이 됐다. 케임브리지에 갓 입학한 젊은이로서 그가 세운 인생의 3대 목표―진리 탐구, 열렬한 사랑, 고통 받고 있는 이웃에 대한 연민―는 단숨에 나를 사로잡았다. 훌륭한 사람에 대한 그의 인식은 내가 그를 나의 롤 모델로 삼기에 손색이 없었다. 그가 말하는 훌륭한 사람이란 친절하고 다정하고 상냥한 사람이다. 그랬다. 사람의 진정한 가치를 그런 것에 두는 사람은 나의 스승이 되기에 족했다.


플라톤에게는 소크라테스라는 괴짜 스승이 있었다. 아테네 감옥에 갇힌 스승에게 감옥에서 벗어날 길을 제시하는 제자의 딜레마는 참 스승에 대한 존경심으로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라 믿는다. 이슬람이 낳은 위대한 학자들은 많다. 그 중에서도 서양 의학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 아비센나(Avicenna, 980~1037)에게도 위대한 스승이 있었다. 이미 말했다시피 이 사람은 아랍인이 아니다. 아랍의 침공으로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이 붕괴한 후 이란과 중앙아시아 지역에 출현한 토착 페르시아 왕조인 사만조(the Samanid empire, 819~999년) 시절 부하라 근처의 작은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페르시아 혈통의 인물이다. 이 사람이 서양 중세를 거쳐 르네상스로 넘어가며 유럽의 의학자들에게 위대한 스승으로 자리 잡는다.


‘초기 근대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아비센나는 의학자인 동시에 철학자, 자연과학자, 수학자였으며 시인이자 신비주의 사상가이기도 했다. 450여권의 저술 중 현재 남아있는 것은 약 240권인데, 이 가운데 의학서가 40권, 철학서가 150권이라고 하니 이 사람의 학문적 관심과 깊이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역작 『醫學典範』은 이슬람 세계는 물론 유럽에서도 가장 권위 있는 의학서 역할을 했다. 이슬람 세계에 전승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구사해 이슬람 철학을 수립한 勞作 『치료의 서(The Book of Healing)』는 사실 육신의 질병이 아니라 영혼의 무지를 치료할 목적으로 집필한 방대한 철학적 과학적 백과사전이다.
그는 페르시아인이었지만, 피지배계층은 오아시스 정주민인 소그드인과 여전히 유목생활을 고수하는 돌궐인(투르크인)이 주를 이뤘다. 당시 종교 상황을 보면 유목민의 텡그리즘(tengrism, 천신숭배)이 아랍에서 시작된 새로운 종교 이슬람으로 완전히 대치되고 있었다. 아랍 역사가 이븐 울 아시르에 의하면, “960년에는 20만호(천막)의 투르크인들이 모두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한다. 물론 종교적으로는 이슬람을 수용하면서도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여전히 유목인의 방식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만조 통치하에서 꽃 피기 시작한 학문과 예술의 르네상스는 이들의 삶과 무관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런 시대적 여건이 학문의 발전, 예술의 개화에는 극히 의미 있는 일이었다. 우마이야 왕조의 뒤를 이어 새롭게 등장한 이슬람 압바스 왕조가 수도를 다마스커스에서 신도시 바그다드로 옮기며 학문과 예술을 장려한 것은 인류를 위해 여러모로 유익한 결과를 낳았다. 이들 이슬람이 아니었다면 그리스와 로마의 위대한 철학과 사상, 과학과 예술이 과거 속으로 사라졌을 것이고, 당연히 르네상스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 부하라 기념품 가게. 유목민 남자의 필수 휴대품인 단도 진열품이 인상적이다.

이슬람 골든 에이지의 정점에 알 파라비(Al-Farabi)라는 아랍 이름을 가진 학자가 있다. 서방 세계에는 알파라비우스(Alpharabius)로 알려진 그는 대략 872년 경 태어나 ‘초기 근대 의학의 아버지’란 명성을 얻고 있는 아비센나가 태어나기 30년 전인 950년 사망했다. 당시 세상의 중심인 바그다드에서 수학하고 시리아 다마스커스에서 거주하다 그곳에서 세상을 버렸지만, 그는 현 카자흐스탄 시르다리아 강 중류의 파라브(Farab, 오늘날의 오트라르)가 고향인 돌궐인이었다. 그의 부친은 칼리프의 친위대에 속한 군인이었다. 그의 관심 영역은 무한대에 가까웠다. 형이상학, 정치철학, 논리학, 음악, 과학, 윤리학, 신비주의, 인식론 등 그의 학문적 호기심은 그 끝을 몰랐다. 그의 철학은 아비센나를 위시한 이슬람 세계의 철학자뿐만 아니라 서양의 스콜라 철학자들에게도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때문에 ‘첫 번째 스승(the First Master)’인 아리스토텔레스에 버금가는 위대한 철학자인 그를 ‘두 번째 스승(the Second Master)’ 혹은 ‘제2의 아리스토텔레스’라 부른다. 그는 학문적 선배로서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프톨레미, 알 킨디, 포르피리 등의 영향을 받고, 아비센나, 마이모니데스와 같은 후학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이슬람의 영향 아래 중앙아시아의 문예부흥기를 이끈 중요 인물에 ‘대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알 호라즈미(Al-Kwariami)가 있다. 글자적 의미로는 ‘호라즘(Kwarizm) 출신의 사내’라는 이름이다. 호라즘은 현재는 우즈베키스탄 히바(Khiva) 지역이다. 이슬람 압바시드 왕조 하의 페르시아 수학자로 페르시아 최초의 수학책을 쓴 이 인물 역시 수학자인 동시에 천문학자요 지리학자였다. 대수학을 영어로 algebra라고 하는데, 이 말은 호라즈미가 2차 방정식을 푸는데 사용한 두 개의 演算法 중 하나인 al-jabr에서 파생된 것이다. 연산법을 알고리즘(algorism or algorithm)이라고 하는 것도 호라즈미의 라틴어 이름 Algorismus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수학자는 기하학자이자 대수학자인 이집트 태생의 아부 카밀(Abu Kamil, 대략 850년경~930년)에게 학문적 영감을 줬다고 한다.


중앙아시아 페르시아 왕조인 사만조 치하 호라즘에서 태어나 가즈나 왕조 시기 가즈니(Ghazni,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 활동하다 사망한 백과사전적 학자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수학, 물리학, 천문학, 지리학, 측량학, 광물학, 역사학, 인류학, 비교사회학, 화학, 의학, 심리학, 철학, 신학 등 그의 학문적 호기심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는 응용수학의 한 분야인 측지학(Geodesy)과 인도학(Indology)의 창시자였다. 그의 이름은 아부 라이한 알 비루니(Abu al-Rayhan Muhammad ibn Ahmad al-Biruni, 973~1048년)였다. 이슬람 전파 이전의 호라즘과 河中지역(마 와라 알 나흐르)에 대한 그의 저술은 이 지역 역사와 문화 연구에 극히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가즈나조의 술탄 마흐무드의 인도 원정길에 동행했다. 이 때 그는 산스크리트어와 여타 인도어를 배워 『인도사』를 집필했다. 이 사람 역시 아리스토텔레스, 프톨레미 등 선배(?) 희랍 학자들의 영향을 받았고, 아비센나와는 상호 학문적 영향을 주고받았으며, 오마르 카이얌(Omar Khyayyam) 등 미래 세대에게 엄청난 학문적 감화를 줬다.


이슬람제국은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이민족에게는 비교적 관대했다. 인종과 피부색깔에 관계없이 형제 무슬림으로 평등하게 대한 것이다. 이슬람 세계에서만 탄생한 독특한 왕조가 있는데 다름 아닌 노예왕조다. 노예왕조는 노예가 왕이 되어 왕조를 세운 것을 말한다. 이슬람제국의 노예들은 주로 슬라브인들이나 투르크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왕의 노예가 돼 궁궐에서 생활하는 경우도 있었다. 궁궐에서 생활하던 노예 중에 왕의 신임을 얻은 노예들은 자유민의 신분을 얻어 국가의 주요 직책에 임명되기도 했다. 또한 노예들은 용병이 되기도 했다. 용병에서 시작해 장군의 위치에 오른 자도 있었다. 군의 실권을 장악한 투르크계 용병 장군들은 왕을 위협하는 위치에까지 오른다. 그들은 왕이 되기도 했는데 그들이 세운 왕조에는 이집트의 맘루크조, 중앙아시아의 가즈나조 등이 있다.


가즈나조(975~1187년)는 투르크계 용병들이 세운 왕조로 호라산, 아프가니스탄 및 인도 북부 지역에 자리 잡은 투르크 왕조다. 이 왕조는 사만 왕조의 궁정 노예 출신 알프 티긴(Alp Tegin: ‘용감한 왕자’라는 뜻의 이름, 재위 962~963년)이 중심이 돼 전 왕조를 멸망시키고 권력을 잡았다. 그리고 거대한 영토를 다스렸으나 얼마 안 있어 셀주크 투르크에게 영토를 빼앗기고, 구르(Ghur) 왕조에게 멸망당한다. 가즈나조의 중심지였던 가즈니는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다. 인도인들은 그들을 투르크계 아프가니스탄 국가로 생각했다.


가즈나조는 술탄 마흐무드 시절에 전성기를 구가했다. 마흐무드는 이슬람 세계에서 최초로 술탄(Sultan, 君主)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그는 가즈니를 중심으로 북으로는 시르다리아강을 경계로 카라한조(Karakhanid)와 경쟁했으며 서쪽으로는 현재 이란의 영토에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그는 인도의 북부지역도 침략해 들어갔다. 그러나 그가 인도 북부지역을 침탈한 목적은 단순히 영토 확장에 있다기보다는 노예, 황금 등 인도의 富를 약탈하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인도인들에게 마흐무드는 잔인한 약탈자라는 인식이 크다. 그가 부유한 사원을 수차례 약탈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특히 솜나트 사원(P ̄atan-Somn ̄ath)을 철저히 유린한 것은 인도인들에게 큰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마흐무드가 사원을 파괴하고 약탈한 목적에는 그의 종교적 신념도 일부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힌두교 사원을 파괴한 뒤 가즈니에 돌아가서는 이슬람문화의 수호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기 때문이다.


솜나트(Somn ̄ath)는 인도 중서부 구라자트(Gujarat) 주 남서부에 있는 고대도시 유적이다. 신성한 음료인 ‘소마(soma)酒의 주인’, 보다 넓은 의미로는 ‘달의 주인’을 가리키는 솜나트 시바 신전이 있는 곳이다. 이 신전은 1024~25년 투르크 가즈나 왕조의 술탄 마흐무드가 이끄는 군대에게 침탈당했다. 고대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Mah ̄abh ̄arata)』에는 이곳이 야다바 씨족이 대량 학살당하고, 비슈누신의 8번째 화신인 사랑의 신 크리슈나가 죽은 장소로 등장한다.

최근의 발굴 결과 기원전 1,500년경 사람들이 살던 거주지가 드러났다. 가즈나조의 인도 침략은 북인도의 일부 지역에 국한된 것이었다. 인도 전체에 영향을 줄 정도의 정복전쟁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술탄 마흐무드의 인도 침략이 중요한 이유는 그의 인도 진출이 후일 구르 왕조, 할지 왕조, 투글루크 왕조로 이어지며 북인도에 투르크 술탄니트(the Turkic Sultanate)를 여는 토대가 됐다는 점에 있다. 구르 왕조(Ghur)는 아프가니스탄의 구르 지역을 기반으로 한 투르크계의 이슬람 왕조다. 고르 왕조(Ghor)라고도 불린다. 처음에는 가즈니 왕조에 예속돼 있었으나 차차 세력을 얻어 1186년에 기야스 웃딘 무함마드(재위 1163~1202년)가 자신이 섬기던 집안인 가즈나조를 전복시키고 아프가니스탄에서부터 서북인도에 걸친 영토의 지배자가 된다. 할지 왕조(Khalji)는 1290년에서 1320년까지 델리 술탄왕조의 전성기를 이끈 왕조다. 투글루크 왕조(Tughluq)는 할지왕조를 무너뜨린 중세 인도의 투르크계 이슬람 왕조(1320∼1414년)다. 이러한 투르크계 무슬림의 북인도 지배는 후일 무굴제국으로 이어지며 인도에 이슬람을 전파시키는 역할을 한다. 역사는 이렇게 연결돼 있다.


전쟁은 수많은 희생을 낳는다. 전쟁 포로로 잡혀 노예가 되는 비인간적 숙명이 그 중 하나다. 657년을 기점으로 서돌궐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난 후 중앙아시아 북방 초원 지대에는 투르크계 유목 집단들이 저마다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이들이 이슬람 세계에 노예를 공급하는 악덕업자들이었다. 아랍 지리학자 이스타흐리는 이들 이슬람으로 개종한 투르크인들이 같은 종교를 신봉하는 무슬림 형제들의 편에 서서 異敎徒(kafirs)인 同族들과 전쟁을 하고 노예를 약탈하는 역할을 수행했다고 전한다. 민족보다 종교가 앞선 것이다. 암흑과 빈곤의 중세를 살아온 유럽이 흥성하게 된 것도 노예무역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서양학자들은 이런 일이 벌어지던 때를 대항해시대라는 진취적인 용어로 포장한다. 인간성은 무시한 채.


이보다 훨씬 오래전 몽골 초원을 중심으로 유목세력들이 걸핏하면 싸우고 노략질하고 그러다 화해하고 하는 일이 되풀이 되던 시절, 흉노인들도 외부집단과 싸워 포로를 사로잡았을 것이다. 이들 포획한 노예들은 대부분 노비 신분으로 살았다. 이들 노비를 홍노인들은 ‘자()’라고 불렀다. 이들이 한데 모여 집단을 이뤘고, ‘자로(虜)’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노비, 종’이라는 의미의 ‘虜’는 중국인들이 붙인 중언부언이다. 여기서도 漢族 역시 인종적 편견에 사로잡혀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자신들은 정당한 사람이고 유목민이나 전쟁 포로는 야만스런 오랑캐로 노비가 되기에 합당한 비인간이라는 황당한 편견이 인간을 변함없이 어리석은 존재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연호택 가톨릭관동대·영어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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