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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야의 고수
재야의 고수
  • 장유승 서평위원/단국대 동양학연구원·한문학
  • 승인 2015.03.02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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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장유승 서평위원/단국대 동양학연구원·한문학

▲ 장유승 서평위원
남다른 실력을 가졌으나 제도권에 속하지 않은 사람을‘재야의 고수’라고 한다. 지식의 세계로 말하자면 대학의 교수나 기관의 연구원이 아니면서 그들 못지않은 지식을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필자가 종사하는 한국학, 동양학 분야에는 재야의 고수로 일컬어지는 이들이 유난히 많다. 물론 그들이 모두‘고수’라고 불릴 만한 자격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한 꺼풀 벗겨보면 연구자로서의 기본 소양조차 갖추지 못한 이들이 종종 눈에 띄기 때문이다. 이들은 폐쇄적인 학계가 자신의 성취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불평하지만, 기실 학계가 이들에게 무관심한 이유는 이들의 주장에 학문적 엄밀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은 학계의 무관심을‘배척’이라 주장하며 대중을 호도한다. 때문에 필자는‘재야의 고수’라는 타이틀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물론 학계의 바깥에 이른바‘고수’가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지식 추구의 권리가 학계에 속한 교수와 연구자만의 전유물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학계의 교수와 연구자들은 지식 세계의 選民이라는 착각에서 깨어나야 한다. 필자가 문제 삼는 것은‘재야의 고수’를 직업 삼아 惑世誣民하는 일부 비제도권 연구자다. 이들은 화려한 언변으로 얄팍한 지식을 감춘 채 학계와 대립각을 세우곤 한다.

필자가 보기에 진정한 재야의 고수는 대개 본업이 따로 있다. 취미라고 하기에는 그들의 노력을 폄하하는 것 같아 주저스럽지만, 본업에 충실하면서도 취미 삼아 쌓은 지식이 해당 분야에서 수십 년간 종사한 교수와 연구원의 수준을 넘어서니, 전업 연구자로서는 그저 놀랍고 부끄러울 따름이다. 그들이 내놓는 저술은 학계에 신선한 자극을 제공한다.

박철상의『서재에 살다』(문학동네, 2014)는 19세기 조선 지식인의 서재와 그들의 삶을 주제로 월간지에 연재한 글을 모은 것이다. 전업 연구자로서 이 책을 읽다보면 세 번은 놀라게 된다.

첫 번째는 이 책의 저자에게 은행원이라는 본업이 있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이 책이 학계에서 주목할 만한 새로운 사실과 자료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며, 셋째는 이 책에 인용된 자료의 상당수가 저자의 소장품이라는 사실이다. 그 소장품들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안목으로 찾아낸 자료들이라는 점은 더욱 놀랍다.

글의 서두를 여는 것은 서재의 이름이다. 正祖의 弘齋, 洪大容의 湛軒, 朴趾源의 燕巖山房, 丁겭鏞의 與猶堂, 金正喜의 阮堂등 문인의 號로 알려진 이름들은 기실 그들이 소유한 서재의 이름이었다. 일상을 수양으로 간주하던 과거에는 일상의 공간인 집이나 방에 이름을 붙여 걸어놓고 그 의미를 되새기곤 했다. 이른바‘顧名思義’이다. 따라서 서재의 이름을 통해 그들의 삶과 시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저자는 서재의 이름을 단초로 삼아 19세기 문화사의 다채로운 면모를 선보인다. 아울러 겗學과 燕궋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19세기 조선이 세계와 교류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저자는 이를 바탕으로 19세기에 대한 재평가를 요구한다.

“19세기를 조선 문화의 쇠퇴기로 보는 사람이 많다. 사대부 문화가 쇠퇴하고 민간 문화가 성장하는 시기이므로 겉으로는 쇠퇴기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19세기야말로 지금 우리 문화의 모습이 싹튼 시기라고 생각한다. 왕실 문화는 민간으로 흘러나왔고 청나라의 외래문화가 들어와 새로운 문화가 시작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획일화된 사회에서 각자의 개성이 드러나는 문화가 다원화된 모습으로 분화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조선의 근대적 인간관을 우리는 바로 19세기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196~197쪽)

일반 대중을 염두에 두고 집필한 글이지만, 어설픈 제네럴 리스트가 학계의 성과를 쉽게 풀어쓴 가벼운 읽을거리로 치부해서는 곤란하다. 이 책에 실린 24편의 글은 하나하나가 학술 논문에 버금가는 무게감을 갖고 있다. 그 무게감의 실체는 방대한 문헌이다. 깊은 우물물을 긷고자 한다면 긴 두레박줄이 필요한 것처럼, 古人의 심리와 과거의 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방대한 문헌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지론이다. 저자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이유는 방대한 문헌 자료의 뒷받침 덕택이다.

저자는 본업이 따로 있다는 점에서 학계 바깥의 사람임에 분명하지만, 이미 공신력 있는 학회지에 여러 편의 학술논문을 발표한 데다 뒤늦게나마 박사학위까지 취득했으니, ‘재야의 고수’라는 틀 안에 가두기도 어렵다.“ 옛사람은 조정에 있거나 재야에 있다고 해서 차이를 두지 않았다.[古之人未甞 以在朝在野而有間焉]”(李沂,「 答崔國明書」,『 李海鶴遺書』)라는 말처럼, 누구나 지식의 진화를 이끄는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지식의 세계에서 학계와 재야를 가르는 것은 무의미하다. 저자는 학계의 성과를 충실히 흡수하면서 학계가 미처 말하지 못한 내용을 말하고 있다. 그러한 재야의 고수라면 학계도 기꺼이 반기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장유승 서평위원/단국대 동양학연구원·한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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