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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 생명사상 제창한 시인 김지하
인터뷰 : 생명사상 제창한 시인 김지하
  • 강성민 기자
  • 승인 2002.10.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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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律呂’에서 ‘呂律’로 탈중심화한 생명이론 구상중

“사람들이 자꾸 어렵다고 해서 좀더 명확하게 다듬고 있지. 율려는 역이거든. 周易. 역 사상 안에 기본이론이 들어 있거든. 그래서 주역공부를 1년 넘게 하고 있지.”

일산 자택에서 만난 김지하 시인이 원고지 가득한 한자들을 가리키며 던진 첫마디다. 지난 2~3년간 논란이 많았던 율려운동은 그렇게 제2라운드를 위한 몸만들기에 한창이었다.

그런데 김 시인의 말은 “그래서 내년 겨울부터나 작곡가 김영동씨와 같이 율려가 아니라, 여율 운동을 한번 할까 해요”라고 이어진다. 여율이라면 율려의 거꾸로가 아닌가, 하는 좀 묘한 표정을 짓자 그는 여율이 일종의 탈중심화된 율려라고 설명하기 시작한다.

“율려는 밝고 웅장해. 종묘음악을 보면 소리가 웅~ 웅~ 하잖아. 하늘의 음악이야. 황종음이 가운데 놓여서 그렇지. 이게 좋긴 한데, 한편으로는 로고스 중심주의거든. 중국·천자·군자·남자가 민중·여자·물건·오랑캐를 다 괄시하는 거라. 그래서 수술이 필요하다 생각해서 바꾼 게 바로 여율이지. 여율은 협종음이 가운데 있어. 사이 夾에 쇠북 鍾. 이거는 재래악이나 궁정음악보다 속악, 산조 같은 민중음악을 더 중시하거든.”

이를테면, 율려 운동이 초고대사 복원쯤으로 비춰지는 상황을 민중이라는 구체적 계기를 끌어들여 돌파하려는 시도인 것 같았다. 한편 김 시인의 이런 갑작스런 역전에는 계기가 있었다. 19세기 중반 김일부라는 사람이 주역을 민중의 사상으로 재해석한 ‘正易’이 바로 그것. 요즘 그의 하루는 정역을 텍스트로 한 주역의 민중적 재해석에 바쳐지고 있다.

“내가 말하는 게 복잡한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예요. 생명은 물질이 뭔가를 모시고 있는 상태를 말하지. 무엇을 모시냐. 바로 마음이야. 동학에서 ‘內有神靈’이라고 한 것. 그리고 생명은 조직화, 사회화하면서 복잡화하지. 이게 또 동학에서 말하는 ‘外有氣化’거든. 생명은 안에 마음을 모신 것이고, 그 생명이 자체의 원리로 복잡화해간다는 것이 내 이론이야. 또 중요한 것은 ‘各知不移’인데, 이것은 그러한 생명의 원리, 생명의 리듬을 각자 각자가 깨달아서 실천한다는 의미가 있어. 근데 이걸 공부해서 이해하려는 생각은 않고 자꾸 서구 생태이론이나 철학이론만 갖고 해석을 하려니 문제가 생겨.”

김 시인은 자신의 생명사상이 동학, 주역, 풍수학 등에 대한 이해 없이 논해질 수 없다고 되풀이 강조했다. 그가 쓴 ‘신비주의’라는 멍에 또한 동학의 ‘신령’과 ‘모심’에 대한 세간의 오해에서 불거졌다고 말한다. 두 단어가 그대로 “신령을 모신다”는 이미지 연상으로 빠지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축자적으로 해석돼 왔다는 것이 불만의 요지다.

그는 동학의 생명사상이 서구에서 진화에 대한 최신의 이론으로 받아들여지는 ‘자기조직적 진화론’과 일맥상통하고 있다며 그것으로 생명사상의 보편성을 말하고자 한다. 동학의 생명론과 자기조직적 진화론을 종합해서 생명의 운동에 접근하면 “생명이란 안에 있는 것이 밖에 있는 것을 조직화하면서 스스로 안에서도 진화하는 것”이 되는데, 이것이 김지하 생명사상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못 박고 있다. 이날 김 시인은 생명사상이 문화운동으로 전개돼야 한다는 것을 한번 더 강조했다.

“문화운동이란 자기존재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하거든. 이런 질문의 과정이 없이 생명에 대한 자각이 생겨날리 없지. 앞으로 나는 미학 문제도 ‘모심’으로 밀고 나가려고 해. 모심은 미적 존재론이면서도 인식론이다 이렇게 보는 거지. 대상이 무언가를 모시고 있을 때 아름답다고 보는 것이면서 동시에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그 마음은 바로 무언가를 모시는 마음이라 이거지.”

마지막으로 그는 생명의 사유에서 중요한 것은 이중성, 모순, 반대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특유의 ‘아니다 그렇다’ 논리를 여전히 견지하고 있는데, 최근의 ‘붉은 악마’에서 그런 모순적 생명의 아름다운 풍경을 목격했다고 털어놓는다.

“생명에 합당한 질서는 흩어지는 질서지. 붉은 악마를 봐. 색이 전부 빨개. 그런데 패션은 전부 제각각이야. 해체적이지. 집중적이면서도 동시에 해체적. 이거 완전 반대잖아. 우리는 그동안 변증법과 형식논리에 갇혀 있었어. 둘중 하나가 이겨야 하는 싸움의 논리였지. 그런데 진정한 사유의 평화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 한 곳에 있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거든. 생명의 문제는 이런 논리적 해방에서도 추구할 수 있는 것이지.”
강성민 기자 smka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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