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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학술기획-우리 이론을 재검토한다] 12-생명사상(김지하)
[연중학술기획-우리 이론을 재검토한다] 12-생명사상(김지하)
  • 신승환 가톨릭대
  • 승인 2002.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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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쓰여진 한편의 사색…‘혼합주의’ 의혹 커
지금 세계는 인간중심 패러다임에서 생명중심의 패러다임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한다. 김지하의 생명사상은 과연 이 세계사적 조류에서 정당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 김지하는 시기적으로 서구보다 먼저 우리사회에 생명의 문제를 공론화시켜 심사숙고의 대상으로 만든 선구자적 사상가로 주목받아 왔다. 그가 우주적 생명사건을 이해하는 능력으로 제시한 ‘영성’의 개념은 기존의 인간 이성이 간과하거나 억압한 무, 공, 허 같은 비가시적 영역을 포괄하는 새로운 인지능력으로서 생명 논의에 많은 메시지를 던져왔다. 그러나 김지하의 생명사상만큼 학문적 엄밀성과 진정성을 의심받아온 사상도 드물다. 통합적 사고와 주체적 사유로 우리 사회에 코스모폴리탄적인 철학적 울림을 만들어온 이 사상이, 다른 극단에서는 왜 비판과 오해의 굴레를 쓸 수밖에 없었는지 그 원인을 살펴보고자 한다.<편집자주>

신승환 / 가톨릭대·철학

현대 한국 사상사에서 김지하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1970년대의 민주화 운동에서 그가 보여준 전 실존을 건 투쟁의 깊이는 물론, 그 이름의 상징성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서라도 그의 생명사상과 문화 운동으로서의 율려운동은 한국 현대 사상의 흐름을 이해하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김지하의 사상적 변천에 대한 평가와 비판은 이 글이 의도하는 바가 아니다. 비판이란 측면에서 사회적이며 민주화의 차원에 따른 문제와, 실존적이며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다른 층위에서 논의돼야 하며 한 개인이 지닌 시대의 흐름에 따른 역할 변화란 관점 역시 고려돼야 한다.

여기서는 그의 생명사상과 율려문화운동이 지니는 의미에 대한 나름대로의 학문적 평가를 시도할 것이다. 문제의 시작은 김지하를 읽어내는 독법에 있다. 이것은 그의 주장이 지닌 다원적 층위 때문에 주어진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철학적 차원과 그가 말하는 영성의 차원, 깨달음에 따른 층위의 구별이다. 영성이란, “우주에 실재하는 모든 것”, 생명체와 비생명체까지 포함하는 그것이 “나와 유기적인 한 생명의 움직임이라는 인식과 깨침”을 말한다. 바로 그가 말하는 “한 생명의 흐름”이다. 그럼에도 생명을 말하는 그의 논의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생명 개념의 모호성이다. 생명사상은 생물학적 차원을 넘어서기에, 그 전개과정에서 생명이 학문으로 정립되는 원리 해명과 철학적 근거정립이 선행적으로 요구된다. 그러나 그의 생명 사상 어디에도 그에 대한 체계적 언급이 없다.

어떻게 ‘김지하’를 읽을 것인가

그는 스스로 생명의 패러다임이란, “모든 것이 모든 것에 연결되는 우주적 전체 유출의 전체 그물망 속에서 파악하는 관점”이라고 말한다. 이런 사유구조에서는 “일체는 우주 생명”이며, 무기물조차 생명체라고 말한다. 또한 이 우주 생명을 기론과 연결시키고, 신과학과도 연결시키며 그것이 모든 이해 체계의 근원이라고까지 말한다. 생명은 일기이며 至氣, 살아 움직이는 무이며, 그것이 곧 ‘한울님’이다. 그러면서도 그 한울님은 인격신의 면모조차 지니고 있다. 도대체 어떤 근거와 원리에서 생명이 氣로 이해되는가. 모든 것을 포함하고 모든 것 안에 있는 생명, “內有神靈 外有氣化”의 존재론적 타당성은 어디에 자리하는가. 이것은 명백히 새롭게 옷을 갈아입은 영지주의이며, 또한 범신론적인 사유체계이기도 하다.

1975년의 ‘양심선언’에 이미 “밥이 하늘이다”, “인내천” 등의 생각이 표현돼 있다. 이런 생명사상의 철학적 기초를 그는 “지기일원론”에서 찾고 있다. 그것은 侍天主와 向我設位, 접화군생으로 구체화된다. 이런 주장에 담긴 “생명가치의 실현을 통해 개인의 해방, 사회의 평화, 세계의 조화를 이룩하는 후천개벽의 정치를 만들”려는 내적 동인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이때만 해도 不然其然의 원리, 三敬사상을 말함으로써 논의 전개와 토론의 여지가 담겨있다. 출옥 후 펴낸 ‘밥’에서도 “근원적인 생명이해를 목표로 할뿐 아니라 근원적인 생명의 본성이나 실상에 귀의”하고자 하며, 과학적 이해까지 포함한 “생명에 대한 총체적 이해”를 말하고 있다. 이런 문제의식 자체는 오늘날 근대성의 극복이라는 철학적 명제에 비춰볼 때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그로써 이원론적이며, 근대 인식이성에만 치중하는 서구 중심주의적 사유체계를 극복하는 단초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 사상의 두번째 문제는 생물학적 원리로서의 생명(zoe)과 문화적이며 철학적 성찰을 거쳐 이해되는 생명(bios) 원리의 상호관련성에 대한 해명이다. 이것은 ‘생명’이 ‘삶’으로 이해되는 중요한 논의 지평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사회에서는 수많은 생명담론들이 거론되고 있다. ‘생명’을 담론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은 분명 그의 사상에 힘입은 바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에 대한 이론적 해명은 고사하고, 생명의 정의조차 선명하게 내려져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생명과 삶의 이해는 죽음의 문제에서 이해되며, 그 만나는 지점에 대한 논의는 매우 중요하다. 그의 사상에서 죽음문제는 단지 자연적 죽음과 ‘인위적 죽임’ 정도로만 언급된다. 인간의 생명은 죽음의 문제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에서 이해의 단초가 주어진다. 이것을 김지하는 단지 사회적 차원에서의 ‘죽임’의 문화에 대한 반성으로 국한시키고 있다. 이것은 한편의 잘 씌어진 글, 개인의 종교적 체험과 신조를 담은 생명존중 사상으로 읽힌다. 그것은 당연히 많은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 글을 읽으면서 마냥 기뻐하고 경탄만 할 수 없는 까닭은 그의 글 도처에 흘러넘치는 혼합주의(syncretism)와 논리적 근거나 맥락을 상실한 주장, 모순되는 이론조차 혼융하는 용감함, 절충주의의 전형을 보는 듯한 논의 전개 때문이다.

감흥주지만, 절충주의의 전형에 그쳐

그래서 김지하 사상에서 문제되는 세번째 항은 그가 언급하는 수많은 사상들을 통일적으로 융합할 수 있는 철학적 준거틀이다. 각 학문 또는 사상체계의 배경과 지향점은 물론이고, 그 사상이 근거한 지평에 대한 학문적 해명없이 이뤄지는 언급은 피상적일 뿐 아니라, 철학적 맥락을 상실하게 된다. 이런 사상을 묶어주는 근원적이며 형이상학적 사유 체계가 제시돼야 하며, 그에 대한 철학적 성찰과 이론적 체계화가 필요하다. 존재론적 근원, 형이상학적 근거가 될 준거틀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사상으로는 자리할지언정, 보편성과 타당성을 지닌 학문 체계로 자리할 수는 없다. 따라서 김지하는 외적인 개념에 대한 풍설 수준의 언급으로 자신의 선언을 보완하고자 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수많은 사상의 곁불만 쬐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게 된다. 학문은 선언을 통해 주목받는 것이 아니라 이론적 체계를 통해 논증됨으로써 그 정당성을 보장받게 된다. 이것은 결코 학문절대주의나 학문 결정론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인간의 역사와 세계에서 학문은 학문으로서의 근거 원리와 존재 이유가 있다. 수많은 이론을 학문내적 원리에 대한 규명 없이, 학문성에 대한 철학적 성찰 없이 뭉뚱그려 놓는 태도는 의사학문을 낳을 뿐이다.

네번째로 그가 새롭게 주장하는 신인간주의 또는 새로운 문화운동으로서의 율려운동이 지니는 문제를 언급해야 할 것이다. 율려에 대한 그의 주장을 상징적 의미에서 이해할 여지를 없앤다면 그 사상은 이데올로기적 허구일 뿐 아니라, 심지어 전체주의적 발상이며 도덕적 우월성과 상징성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폭력을 낳을 여지가 매우 많다. 누가 인간을 새롭게 개조하는가. 그것을 운동으로 전개한다고 해서 납득할 수 있는가. 이것은 특정한 이념체계나 종교적 신조 안에서나 가능한 이야기가 사회적이며, 문화적 옷을 입고 등장하는 또 다른 의미에서의 파시즘이 될 혐의가 짙다. 실제로 5만년 전의 이상적 고향인 마고성의 실재와, 상고사에 모든 근원이 내재해 있다는 생각이 은유적 차원을 넘어서는 실증성을 담지할 수는 없지 않은가.

우리가 신화와 근원(Ursprung)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 시대의 실존하는 이상향때문이 아니라, 인류의 지금의 사유체계가 출발한 원천이기 때문이다. 서구의 근대 극복 노력이 신화와 예술에 주목하는 것도 서구의 논리-이성적 학문의 차원을 벗어나는 사유의 원천, 성찰의 근원을 재조명하기 위함이다. 이성(Logos)을 폐기하려는 것이 아니라, 근대에 이르러 일면성으로 흐름으로써 주어진 역기능의 수정작업이다. 그것은 이성에 대한 보완, “이성의 또 다른 부분”에 대한 성찰 때문이지, 그 옛날에 망각한 어떤 이성의 원형이 있기 때문은 아니다. 고대의 위대한 사상의 복원이 그 자체로 지금의 문제에 대한 답이 될 수는 없다.

그는 자신이 비판하는 서구의 근대를 다시금 전근대의 사상, 그것도 회고적이며 지극히 내밀한 영성으로 대신하려 한다. 그것은 이론으로 성립하기 위한 타당성과 보편성은 물론, 역사적 맥락과의 접점조차 지니지 못하고, 단지 탁월한 깨달음과 그에 따른 悟道頌으로 대신 자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김지하의 사상이 어떻게 발전되느냐는 그 사상이 지닌 원체험을 철학화하는 과정에 달려있다. 하나의 체험이 보편성과 타당성을 지니면서, 이론이나 학문의 차원으로까지 발전해 논의되기 위해서는 그에 상응하는 내적 성찰에 근거한 철학화, 논리의 정합성과 일관성이란 기본적인 전제를 필요로 한다. 김지하의 사상에는 이것이 결정적으로 결여돼 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사상가, 예언자적 지사의 모습은 기꺼이 수긍하고 귀기울일테지만, 그의 사상을 이론이란 이름으로 더 높게 평가할 생각은 전혀 없다. 이것이 학자가 지니는 파당주의적 사고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정말이지 학문의 역할과 영성의 역할을 혼돈하는 일이다.

그에게 철학이나 학문을 요구하는 것은 그가 지닌 시대적 소명을 넘어서는 과도함일 것이다. 그의 글에서 드러나는 것은 시대를 앞서가는 영성의 스승이란 새로운 몫 정도다. 그 영성의 수용 여부는 그의 사상을 바라보는 이에게 달려있다. 또한 김지하의 사상에 깊이 있는 어떤 울림을 학문화하는 것 역시 그의 생각을 읽고 해석하는 이들에게 넘겨진 과제이다.

해석자들에게 남겨진 과제

짧은 지면에 단지 몇 가지 명제 중심으로 비판했지만, 그의 사상이 우리 사회에서 지니는 다층위적인 의미 때문에 정확한 철학적 평가가 필요할 것이다. 이는 그의 사상이 문화운동이나 계도적 입장에서의 전개를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이 학문의 영역으로 전개될 때 그 의사성과 학문적 성찰의 결여 때문에 충분히 비판받아야 한다. 그것은 후기 산업사회와 탈근대 논의 이래 주어진 학문에 대한 오해와 경시 풍조에 한 몫을 하기 때문이다. 순수학문이란 허구는 문제지만 철학적 성찰과 그에 따른 지식 없이 전개되는 실용적이며 정보화된, 탈맥락적 지식은 구원이 아니라 재앙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1980년대 김지하의 생명사상이 탄생한 배경과 문제의식에는 동의할 수 있다. 현대의 학문과 문화의 위기를 벗어나고 서구 근대의 한계를 극복하는 단초를 생명이 지닌 원리와, 인류의 원초적 사상을 성찰함으로 찾으려는 문제제기는 전적으로 타당하다. 나 자신 그런 문제의식에 근거해 생명철학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기에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것이 학문으로 존립하기 위해서는 그 내재적인 원리 뿐 아니라, 외재적 차원에서도 수많은 연구와 철학적 성찰이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넓게 보아 김지하의 문제의식과 그가 제시한 사유동인을 이러한 차원으로 승화시킬 수 있을지는 그 다음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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