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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帝가 지운 ‘문화사’ … 복원 위한 첫걸음 내딛었다
日帝가 지운 ‘문화사’ … 복원 위한 첫걸음 내딛었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02.09 15: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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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서지학회·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공동 학술대회 ‘식민지 시기의 출판 자본과 출판문화’

▲ 일제 강점기 출판사 광학서포가 1910년 6월 발행한 판매도서목록인 「書目提要」를 비롯, 다양한 판매도서목록이 이번 학술대회에서 처음 공개됐다. 사진제공=근대서지학회

‘판매도서목록’ 하나로 학술대회가 너끈히 진행될 수 있을까. 알려져 있듯, ‘판매도서목록’은 출판시장에서 어떤 책이 어디서 어떻게 팔렸는지 한 눈에 읽어낼 수 있는 자료다. 그런데 이 자료가 오늘날의 판매도서목록이 아니라 식민지 시기의 목록이라면? ‘근대 출판과 「판매도서목록」의 문화사’라는 부제를 단 근대서지학회(회장 전경수)와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의 공동 학술대회 ‘식민지 시기의 출판 자본과 출판문화’는 ‘판매도서목록’ 하나를 갖고 문화의 두께와 넓이까지 읽어낸 학술대회였다.


지난 6일 관훈클럽 신영연구기금회관에서 열린 이번 학술대회에는 근대서지학회가 지금까지 수집한 30여 종의 「판매도서목록」이 열띤 논의화 함께 공개됐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1장짜리 팸플릿이나 전단지부터 100쪽이 넘는 도서목록, 매년 출판물을 총정리해서 사전처럼 두껍게 묶은 연감까지 가지각색의 「판매도서목록」이 선보였다. 모두 학술대회를 통해 처음 빛을 보게 되는 진귀한 자료들이다.


특히 강제병합 직전에 제작된 도서목록 2종은 금서 처분을 받아 압수된 리스트가 포함된 귀중한 사료다. 일제 초기에 결성된 서적상 조합에서 배포한 도서목록도 7종이나 된다. 1930년대 도서목록에는 국내에서 실제로 유통된 근대 출판물 거의 전부가 수록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밖에 초창기 출판사나 서점 모습이 담긴 사진도 눈길을 끌며, 전화 주문 방법, 송금 유의 사항, 할인 방법, 배송 안내문, 책값과 우송료를 출판사 계정으로 이체하는 불입표와 영수증 등 흥미로운 자료가 넘친다.


거듭 밝히지만, 「판매도서목록」만 놓고 학술대회가 열린 것은 학계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언론계의 원로부터 각계의 신예 연구자까지 고루 발표자로 나서서 머리를 맞댔다. 특별 발표를 맡은 언론학자 정진석 한국외대 명예교수가 먼저 「판매도서목록」 가운데 대표적인 20여 종을 정리해 목록 연구 방법론과 데이터베이스 구축 방안을 제시했다(「서양인들의 한국학 색인과 일제 강점기 도서목록」).

압수서적 『서목제요』 등 35종 첫 공개
특히 정 교수는 근대서지학회에서 수집한 「판매도서목록」 가운데 대표적인 21종을 통해 식민지 시기에 발행된 도서를 총체적으로 개관해냈다. 그에 의하면, 1910년대 7종, 1920년대 5종, 1930년대 7종, 발행연도 미상 2종이다. 그중에서 한성도서주식회사가 4종으로 가장 많고, 그 외에 17개의 서점과 출판사에서 발행한 목록이 남아 있다. 그는 “이 목록을 활용해 앞으로 (1)목록에 수록된 서적의 목록화 (2)목록의 해제 (3)데이터베이스 구축 (4)서적의 소재 파악이 진행돼야 할 것이다. 이번 학술대회 개최가 그 출발점이며 앞으로 다양한 작업과 연구가 뒤따르기 바란다”라고 지적했다.


분류는 지식의 범주화와 체계화에 필수적인 작업이다. 책의 분류도 그에 못지않게 지식의 축적에 관여한다. 「판매도서목록」에 적용된 분류 체계와 배열 방법을 분석한 유석환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는 책의 분류가 근대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의 형성, 그리고 지식인의 사유 체계 변화와 밀접하게 관련돼 있다는 점을 밝혔다(「판매도서목록의 책 분류와 근대문학의 위상」).
출판문화 연구에서 선편을 쥔 한기형 성균관대 교수는 「판매도서목록」과 일제에 의해 금지, 압수된 서적의 통계 자료를 통해 근대 출판과 독서 문화에서 족보나 구소설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과 의미를 ‘이중 출판 시장’의 문화 구조로 설명해내 눈길을 끌었다(「식민지 근대와 ‘토착성’─‘이중 출판 시장’의 문화 구조」). 한편 흔히 신소설로 불리던 구소설이라는 것이 상업적으로 출판되고 대량 유통된 것은 결국 근대가 시작되면서 일어난 현상이라 강조한 유춘동 선문대 교수는 당시 「판매도서목록」과 각종 광고를 교차 점검해 흔히 ‘딱지본’이라 불리는 색다른 책의 출판전략과 광범위한 독서 실태를 분석했다(「활자본 고소설 출판사별 판권지의 광고와 도서목록의 실태」).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출판계에 대한 조명도 신선했다. 외국인 선교사가 주축이 된 조선야소교서회(지금의 대한기독교서회)의 출판 활동, 서양식 자본주의 마케팅 전략, 식민지 조선에서 토착화된 과정을 다각도로 분석한 김성연 연세대 교수는 1920년대 출판계와 독서 시장을 흥미롭게 재구성한다(「식민지 시기 기독교 출판 자본과 책의 유통」). 1930년대 문학비평가 최재서가 설립해 운영한 人文社를 재평가한 장문석 서울대 연구원은 『조선작품연감』과 『조선문예연감』을 통해 민간 출판계가 국가나 식민 통치 기구를 대신해 문화예술계 전반을 총괄할 정도로 성장했음을 밝혀냈다(「인문사의 출판 활동과 조선문예연감」).

근대서지학회의 독특한 연구 풍토
이번 학술대회가 근대 출판과 독서 문화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해낼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눈여겨보지 않았던 「판매도서목록」을 대대적으로 수집하고 학계와 힘을 합쳐 공동으로 연구해 온 근대서지학회 특유의 풍토 덕분이다. 근대서지학회는 창립된 지 5년을 갓 넘긴 신생 학회지만 여러 분야의 수집가, 소장 기관, 대학의 연구자, 각계 전문가가 한데 모였다는 점에서 단연 이채를 띠는 학회다. 근대 출판을 중심으로 문학, 역사, 여성, 대중가요, 만화, 미술, 무용, 라디오, 스포츠, 디자인, 생활사, 문화론과 같이 다종다양한 분야에서 300여 명의 회원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요샛말로 융합적 연구에 익숙한 풍경이다.


반년마다 1천 쪽이 넘는 두툼한 분량으로 발행하는 기관지 <근대서지>는 2014년 12월에 10호를 돌파하면서 학계 안팎에서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동안 <근대서지>를 통해 많은 작가와 출판인을 새롭게 조명하고, 전혀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나 책도 꾸준히 발굴해 소개하고 있는 것도 지나칠 수 없는 부분이다. 문학 연구, 나아가 문화사와 지성사 연구의 기본이랄 수 있는 데이터의 확보와 정리를 근대서지학회가 도맡아 하고 있는 셈이다.


근대서지학회에서 다루는 분야도 잡지, 문학뿐 아니라 삽화, 장정, 디자인, 활자, 인쇄 등으로 점점 더 확장되고 깊어졌다. 또한 매년 1종 이상의 전집과 자료집을 묵직한 ‘근대서지총서’로 내놓고 있다.
근대서지학회와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은 이번 학술대회의 성과를 바탕으로 지금까지 수집한 「판매도서목록」을 한데 모아 ‘근대서지총서’로 영인할 계획이다. 또한 「판매도서목록」에 수록된 도서의 서지 사항을 전수 조사해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함으로써 한국의 출판문화와 근대적인 지식 체계를 둘러싼 다양한 분야의 연구에서 획기적인 진척의 발판을 마련한다는 구상도 세우고 있다. ‘판매도서목록’ 하나가 문화사 형성의 새로운 전기를 제공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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