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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그러나 ‘사유의 헤맴’이 가득한
모호한, 그러나 ‘사유의 헤맴’이 가득한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02.09 15: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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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역사학자의 ‘사진 인문학’ 제안

▲ 이광수는 이 사진 아래에 “아니따 슈리와스또우, 19세. 2004년 데칸고원 목화밭에서 남편 낫으로 목 베고 자살”이라고 썼다. 그리고 이렇게 설명한다. “이 작품에서 사진은 들러리이고 그 밑에 추가되는 텍스트가 주제틀이다. 저 인물은 인도뿐만 아니라 전 세계 도처에 깔려 있다. 저 인물은 특정한 고유 명사가 아니고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신음하는, 그러다 목숨을 끊거나 끊을 날을 기다리듯 살아가는 전 세계의 수많은 농민과 노동자를 가리키는 것이다. 사진이 사실의 재현에서 전유의 인문학으로, 여기까지 왔다.” 이렇게 이광수는 사진 설명에 동원되는 텍스트의 주제성을 끝까지 밀고 나간다. ⓒ이광수, 2012

▲ 이광수 부산외국어대 교수
사진을 전공한 사진학 교수도 아니다. 다큐멘터리 기록 사진에 승부를 건 전문 사진작가도 아니다. 필름 카메라를 아날로그 시대의 유산으로 밀어낸 자리에 디지털 카메라가 넘쳐 나고 있으니, ‘아마추어 사진가’들 또한 넘쳐날 수밖에 없는 시대다. 그런 시대에 누군가가 사진으로 인문학을 하자고, 아니 사진으로 인문학을 할 수 있다고 외친다면, 그 말에 어떻게 귀 기울여야 할까.


이광수 부산외국어대 교수(사진)는 인도사를 전공한 역사학자다. 그런 그가 『사진 인문학: 철학이 사랑한 사진 그리고 우리 시대의 사진가들』(알렙 刊)을 내놨다. 이 책은 월간 <사진예술>에 2011년 3월부터 3년여 동안 연재했던 글을 모은 것이다. 물론 처음부터 책 발간을 염두에 두고 기획했던 세 개의 시리즈로 연재를 이어왔다. 사진으로 인문학을 하는 데 필요한 개념, 다른 이의 사진을 인문학적으로 느끼거나 생각해보는 일,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글과 사진으로 표현한 사진가들의 세계관을 비평하는 일이 이 작업의 세 기둥이다.


그는 10년 전쯤부터 본격적으로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2002년 미군이 아프가니스탄 공습을 한 직후 그가 공동대표로 있던 아시아평화인권연대의 활동이 단초가 됐다. 아프간 난민 긴급 구호를 위해 몇 차례 아프가니스탄을 다녀온 뒤 후원회원에게 사진전 겸 보고회를 열었는데, 그가 찍은 사진이 죄다 흔들려 건질 수 있는 게 한 장도 없었던 것. “세상에,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소중한 데를 다닐 텐데, 사진을 좀 배우라는 주위의 성화에 못 이겨 사진을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했다.” 그게 ‘사진비평가 이광수’의 첫 걸음이었다.
인도사 연구라는 전공 공부도 한몫했다. 사진이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이다. “처음에는 이미지에 반해 어떻게 하면 좀 더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골똘했으나, 차츰 내 특유의 말대꾸와 의심이 발동하면서 멋진 사진, 좋은 사진이란 도대체 누가 규정한 것이고, 그렇게 규정하는 근거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스스로 하는 질문이 봇물처럼 쏟아졌다.” 그러나 “인문학과 사회과학의 경계선에서 인간과 사회에 대해 평생 고민해온” 이 역사학자는 이 질문에 명쾌하게 대답해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책, 저런 책을 뒤지면서 사진을 찍는 일보다 사진을 읽고 비평하는 일에 더 매력을 느꼈다. 어느 날 난 이미 사진 비평의 세계에 깊이 발을 담그고 있었음을 알게 됐다.”

▲ “세상 모든 존재는 무수한 잠재성을 지니며 그 잠재성을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유연함을 만들 수 있다. 어떤 것이든지 고정된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나 반응하고 열려 있는 상태여야만 새로운 사유가 시작될 수 있다.”―「작업노트」 중에서이광수는 사진가들의 ‘작업노트’를 꼼꼼하게 훑어, 사진 속의 생각을 읽어내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언어를 이끌어내고자 한다. 오진영의 사진과 그의 작업노트를 함께 보여준다. ⓒ오진영, 201

역사학자인 사진비평가 이광수 교수는 “사진 비평의 최우선은 사진가의 뜻을 잘 살려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어렵지 않게 일반 대중과 잘 소통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게 사진비평가의 첫째 임무라고 봤다. 그러나 그는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도 빠뜨리지 않았다. “대중과의 소통과 脫 일반화의 두 속성이 충돌하는 지점에 사진 비평이 있다. 대중과의 소통을 추구하되, 그들이 지혜를 찾아가는 일련의 과정을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 보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다.” 이 대목은 사진비평가로서의 그의 批評眼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는 사진을 하나의 ‘도구’로 인식한다. ‘도구는 쓰기 나름이다.’ 이게 그의 지론이다. 그러니까 사진을 통해 뭔가 다른 메시지를 전할 수 있다고 봤던 것이다. 그가 ‘사진 인문학’이란 생소한 이름의 방법론을 제안한 것은 이쯤에서다. “인문학은 사람이 돼 가는 길, 사람으로서 해야 하는 길, 사람이기 때문에 가야 하는 길과 같은 것들을 고민하는 것이다. 이런 고민들을 사진이라는 도구를 갖고 해보자는 것이다.” 자기만의 생각과 느낌을 말이나 글이 아닌 ‘사진’으로 말할 수 있지 않겠냐는 발견인 셈이다.

사진으로 말을 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가 문제적인 것은 말하기를 넘어 ‘사진’을 갖고 인문학을 하자고 제안하기 때문이다. “사진을 회화(그림)에 비하면 고유의 미학 담론이나 인식론이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사진이 다른 예술 형식이나 표현 양식에 비해 인문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데 결코 뒤지는 장르가 아니다. 왜냐하면, 사진은 역사도 되고 과학도 되고 예술도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진에 대한 감상평은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 사유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사유의 헤맴, 그것이 인문학과 맞닿아 있다고 본다.”


그가 ‘사유의 헤맴’을 사진인문학의 특성으로 꼽은 건 쉬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사진 개념을 잡은 글들의 冒頭에서 “사진을 통해 인문학을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사진이 모사가 아닌 재현을 하기 때문이다”라고 쓴 것도 같은 맥락에 있다. 모사와 재현은 미학에서도 한참 논란이 많았던 용어들이다. 그가 이를 두고 “자연스러운 표현이 아닌 인간의 의지가 반영되는 재현”을 거듭 강조한 것도 이 ‘사유의 헤맴’과 이어진다.


좀 못마땅한 대목이기도 하지만 ‘사유의 헤맴’을 읽어내기 위해 그는 벤야민, 바르트, 하이데거, 칸트, 엘리아데, 데리다, 사이드, 들뢰즈, 푸코, 보드리야르 등을 거치면서 ‘사진의 인문학’을 구축한다. 이어 사진 속 생각을 읽어내기 위해 우리 시대의 하이 아마추어 사진작가들을 만나고, 결국에는 사진으로 어떻게 말을 할 것인지의 최초의 물음으로 돌아가 ‘사진으로 철학하기’를 시도한다.


그가 말하는 사진으로 작가의 생각을 읽어내는 바람직한 방식은 “작가의 큰 의도 속에서 자신만의 창작 독해를 하는” 것이다. 좋은 작가는 독자의 해석을 유도하는 사람이며, 독자는 작가의 의도에는 맞춰 가되 그만의 해석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 그는 “사진가, 비평가, 기획자, 큐레이터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 사진으로 생각 읽기의 첫 걸음”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는 사진으로 어떤 말을 건네는 게 될 것이다. 짐작할 수 있는 대목 하나. “사진은 다른 어떤 시각 매체보다 더 심각한 사회적 맥락을 갖고 있고 그래서 사진가의 사회적 책무도 무겁다. 그렇다고 사진 행위가 사회 변혁을 가져오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사진은 본질적으로 모호하고, 익숙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의 사진 인문학은 분명 더 많은 고민과 시행착오, 반발과 비판, 토론과 수용을 통해 더 단련될 것이다. 그러는 사이 그는, 수전 손택과 장자, 후설과 들뢰즈, 이반 일리치, 그리고 카뮈와 니체까지 동서고금을 가로지르며 사진과 어떤 절정의 풍경 속을 계속 연결해가면서 헤집고 있다. 그의 말대로 ‘사유의 헤맴’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의 작업이 익숙하게 보이는 것 같지만 많이 낯설게 보이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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