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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공공도서관, ‘서재 문화’ 확산에 영향 미쳤다
1920년대 공공도서관, ‘서재 문화’ 확산에 영향 미쳤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01.27 10: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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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독서공간, 서재의 탄생

공공 도서관에 영향받은 개인 서재의 확산은 독서와 출판문화, 그리고 새로운 지식의 형성이라는 질적인 변화까지
유인했다. 오락, 교양의 습득 수단에서 새로운 지식을 배태시키는 근거자료로서의 책을 가능케 했다.

서재가 새삼 각광을 받고 있다. 한 포털 사이트가 ‘지식인의 서재’를 탐색한지 꽤 됐지만 서재는 여전히 독서와 지식에 겹쳐있는 ‘식자인’에게는 주요한 의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최근 금석학 전문가인 박철상 박사가 낸 『서재에 살다: 조선 지식인 24인의 서재 이야기』(문학동네, 2014.12)는 담헌 홍대용, 연암 박지원, 여유당 정약용, 완당 김정희 등 19세기 조선의 지식인들의 서재를 빼꼼히 들여다본 책이다. 박철상은 전통시대의 서재를 가리켜 ‘학문와 아취를 상징하는 특별한 장소’라고 지적하면서, “지식인으로서의 삶은 서재에서 시작되고 갈무리됐다”라고 썼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이런 근대적 독서공간은 어떻게 탄생됐고,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근대서지학회(회장 전경수)가 발행하는 반년간 학술지 <근대서지> 제10호(2014 하반기)에 실린 방효순 숭의여자대학 교수(문헌정보학과)의 글 「근대적 독서 공간, 서재의 탄생과 영향」이 그것이다.

광장에서 도서관, 그리고 서재로
방 교수는 19세기에서 20세기초에 이르는 독서공간애서의 대중 독서 양상을 ‘광장에서의 청자적 독서’로 설명한다. 광교 다리 아래에서 책을 읽어주는 ‘전기수’와 같은 낭독자의 존재, 그리고 대중 ‘연설’을 하는 이들의 존재가 청자적 독서에 물질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상업출판이 활성화되고, 언문이 대중을 위한 계몽어로서의 강점을 갖게 되면서 대중들과 더불어 지식인들의 독서는 새로운 변화 양상을 맞는다.


전통 지식층들은 종래의 독서생활을 지속했지만, 문중에 전래되던 많은 고서들이 시장에서 헐값에 거래되기 시작한 사실은 이들의 독서생활에도 변화가 밀려왔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신교육을 받은 젊은 층들이 새로운 지식층으로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방 교수는 “이들은 새로 소개된 각종 신문예서, 사상서, 역사서, 전기 등을 읽었는데, 아일랜드 문학, 타골, 니체 등은 이들의 일상적인 독서물이었다. 근대인이 되기 위해선 새로운 사상과 내용을 담은 신서적을 읽어야 한다고 여겼던 것이다”라고 설명한다.


근대적 서재는 바로 이 무렵에 출현한다. 방 교수는 이즈음 등장하는 ‘수집 취미를 가진 개인’에 주목했다. 이들 수집가들은 종래 외국어, 기술, 상업, 그림 분야에 종사했던 중인 출신들이 주를 이뤘다. 방 교수에 따르면, 이들 장서가들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1920년대 경성도서관을 비롯해 전국에 각급 도서관들이 설립되던 때였다. 옥인섭은 경성도서관에 3천700여 권을 기증한 인물이다.
방 교수는 서재문화의 확산이 1920년대 조선에서 공공도서관의 설립으로부터 ‘상당한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신설된 도서관들은 최신의 건축양식에 서양식 서가와 책상, 의자, 조명 등을 비치, 안락하고 세련된 근대적 이미지를 갖추고 있었다.” 예컨대 이범승의 경성도서관은 1만5천여 권이 넘는 각국 서적과 170종 이상의 국내외 신문잡지를 구비했다. 덕분에 남녀노소 관계없이 아침부터 밤까지 최소한의 비용으로 도서관을 이용하는 것이 가능했다. 도서관은 “세상의 모든 근대적 지식을 한 곳에 집약시킨 물리적 공간으로, 아무런 제약 없이 지식과 교양의 습득이 가능한 지적·미래지향적인 공간”으로 인식됐다. 이런 매력탓인지 도서관의 근대적이고 지적인 정취에 압도됐던 당시인들은 자신만의 개인적 도서관, 즉 서재를 설치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이 시기 서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방 교수는 당시 <동아일보>(1930.10.11.)에 소개된 ‘건강주택과 서재’ 평면도를 인용했다. 가족 9명을 기준으로 한 건평 26평 가량의 주택 설계도인데, 4개의 방과 서재 겸 응접실, 욕실, 주방을 배치한 것이다. “기존 행랑을 없애고, 대신 교양과 위생을 위한 서재와 목욕통이 근대 주택의 중심공간이” 됐다. 방 교수를 이를 근거로 “독서가 더 이상 광장이나 거리에서 아닌, 사적 공간에서 이뤄지는 문화적 활동이 됐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한다. 또 이들 서재는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 독립된 공간으로 두되, 서양식 분위기로 꾸며져야 한다고 권유됐다.

출판문화와 지식의 형성에도 영향미쳐
당시 <동아일보>는 최남선, 이광수, 김활란, 홍성하, 박승철, 박승빈, 박영희, 홍에스더, 홍명희 등의 서재를 사진과 함께 차례로 소개했다. 이들 지식인들이 우선적으로 서재를 마련해 갔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1930년대를 전후해 언론에서 연재한 지식인들의 서재 탐방기는 대중들로부터 큰 관심을 끌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서재에는 어떤 책들이 꽂혔을까. <삼천리> 제6호(1930.5)에 실린 「名士의 書齋」를 보면, “백과전서, 미술전집, 사상전집류, 그리고 영·독 철학서, 국내외 문학서, 조선관련 연구교재 등을 갖췄는가 하면, 조선역사서, 율곡전집, 다산전집 등”과 “일본 현지, 기타 제 외국으로부터 들어온 각종 원서들”이 서가를 채웠을 것으로 보인다.


장서량도 결코 적지 않았다. “1930년 최동규는 한번 화재가 난 후에 다시 모은 장서가 1천여 권이었고, 정인보의 경우 5천여 권을 소장했다고 하는데, …… 대중들 역시 서재를 마련, 지식인들처럼 장서를 갖춰 나갔다. 즉 조선어 서적 외에 자신들이 읽지 못하는 영어, 일어, 기타 외국어로 된 서적들까지 사 들여 서재를 꾸며 나갔다.” 아무래도 서재의 장서가 소장자의 지적 수준과 교양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던 게 이런 확산을 부추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방 교수에 의하면, 이렇게 확산되기 시작한 서재 문화는 당시의 독서·출판문화에 영향을 미쳤다. 화려한 장정의 하드커버 서책들이 증가했으며, 각종 미술적 시도들까지 행해져 유명 화가들이 표지나 삽화를 그리는 데 참여하기도 했다. 이를 두고 방 교수는 “대중의 서적소장과 서재 문화 확산이 이 시기 서적의 심미적·예술적인 가치를 향상시키게 된 것”이라고 읽어냈다.


독서 방면에도 영향이 미쳤다. “출판시장의 확대와 함께 각 개인들의 소장량이 많아지자 올바른 선별 필요성을 느끼고 자연스럽게 良書 선정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도서 선별에 대한 고민은 출판물의 질적 수준과 책에 대한 대중들의 안목을 높여 주는 계기가 됐다. ‘다양한 측면에서 책의 가치’를 따져보기 시작했다는 얘기다. 출판년도, 초판여부, 장정 상태와 특징 등 책의 내용 및 물리적 체제에 대한 실증적·학문적 접근이 시작됐다. 방 교수는 “서지학적 가치 기준에서 책들이 엄격히 평가되기 시작한 것”으로 읽어냈다.
이러한 물질적, 제도적 변화와 함께 이윽고 ‘새로운 지식의 형성’이라는 질적 수준에서의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방 교수는 최현배의 글을 인용, “이제 책은 오락과 흥미, 지식, 교양의 습득 수단이었을 뿐만 아니라, 저작의 내용과 논리를 보족하고 독자 입장에서 그것을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견해를 세우고 새로운 지식을 배태시키는 근거자료로 활용됐다”라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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