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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도 ‘바깥’을 상상하지 못하는 학술 문화자본
제도 ‘바깥’을 상상하지 못하는 학술 문화자본
  • 교수신문
  • 승인 2015.01.21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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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스트로 읽는 신간_ 『누가 문화자본을 지배하는가?』 <문화/과학> 편집위원회 엮음|이동연·한기호·이윤종 외 지음|문화과학사|351쪽|20,000원

한국연구재단은 학문세계의 합리적 질서 구축을 목표로 일련의 학문지원시스템을 구축했다. 학문제도가 규율권력으로 변화하면서 지금은 학문연구자들과 학문후속세대의 일상을 규율하는 권력 효과를 발산한다. 학문제도의 규율권력은 연구자들에게 상징적 힘을 발휘해 연구지원 과정과 연구내용, 연구의 활용도와 같은 일련의 과정에 개입한다. 한국연구재단의 규율권력이 학술 문화자본으로 전환하는 과정은 단지 막대한 지원규모만의 문제로 볼 수 없다. 그것은 화폐자본뿐 아니라 연구자들에게 행사하는 상징자본, 즉 제도화된 상징권력의 자본까지 포함한다. ‘2014년 박사후 국내연수’ 결과 발표에서 ‘예비선정’ 통보가 지원자들에게 발송됐을 때 나타난 반응도 동일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학술 문화자본의 場으로 진입하느냐 못 하느냐가 한국 학문사회에서 학문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갖느냐 못 갖느냐의 문제로 직결되는 상황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특정한 강제력을 동원하지 않더라도 주체들이 제도 자체를 강하게 의식할 수밖에 없는 메커니즘이라면, ‘권력과 순응’은 이미 내면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학술 문화자본의 상징권력은 학술연구자들의 내면화된 ‘순응’에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한국연구재단의 경우가 그렇다. 하나의 제도가 형성되면, 그리고 제도의 질서에 주체들이 복속되면, 그 제도는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고서도 종속과 순응을 유발하는 경향성을 갖는 경우가 많다. 한국연구재단은 대학사회의 비합리적 관행에 대항해 합리적 질서 구축에 기여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학문의 양적 관리라는 맹목성, 그리고 경제적 효용 중심의 생산성에 경도돼 있는 양상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한국연구재단의 등재(후보)학술지 평가 제도를 들 수 있다. 현재 한국연구재단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2014년 12월 21일까지 ‘학술지 평가제도 폐지’를 밝혔다가 최근에는 계속 유지로 선회했다. 대신 ‘우수등재학술지’를 선정해 집중 지원하겠다는 계획으로 선회했다. 한국연구재단의 현재 상황은 학문세계의 합리적 질서 구축에서 학문세계의 관리 자체가 목적이 되고 있다. 운영이 목적이 되면 맹목성을 띠게 된다. 운영을 위해 존재하는 조직은 학문세계에 근대적 합리성을 갖추는 데 기여하겠다는 애초의 취지와는 무관하게 학문적 규율이 되고 마는 것이다.


미셸 푸코는 『권력과 지식』에서 “지식인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주목해야 할 것은 보편적 가치의 담지자로서의 지식인의 모습이 아니라 그가 사회 속의 어느 특정한 자리에서 진실을 생산하고 확산시키고 있느냐”에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 학문세계에서 한국연구재단이 학문생산성 위주의 평가 시스템에 머물고 있는 한, ‘학문성과 물신주의’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학문제도가 규율하는 학문적 상상력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국가기구가 주도하는 학문관리 시스템은 ‘국민국가의 학문’에 머물 개연성이 커진다. 특히 국가권력이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더라도 종속과 순응이라는 가치관이 보편화되면, 그곳에는 ‘권력의 위상학’이 마련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푸코는 “문제는 인간의 의식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생산해 내는 정치적이고 제도적인 체제를 바꾸”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정치적이고 제도적인 체제를 바꾸는 학문은 권력관계로부터 자유로울 때 가능하다. 제도의 작동에만 역량을 집중하는 학술 문화자본은 ‘제도’ 바깥을 상상하지 못한다. 심지어는 ‘사례없음’을 들어 제도 바깥을 배제하거나 억압하기까지 한다.

□ 이 글은 『누가 문화자본을 지배하는가?』에 수록돈 공동필자 오창은 교수(중앙대 교양학부대학)의 「학술 문화자본의 지배구조와 한국연구재단」에서 발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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