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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 서유경 경희사이버대·NGO학과
  • 승인 2015.01.19 11: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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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칼럼] 서유경 경희사이버대·NGO학과

▲ 서유경 경희사이버대/NGO학과
악의 평범성(?). 우리 사회에 대형 범죄가 일어날 때마다 이 표현이 주요 신문과 언론매체에 등장한다. 얼마 전 세월호 참사가 발생했을 때도 그랬다. 그뿐인가. 우리가 자주 접하는 언론 기고문이나 영화평에도 이 표현이 단골로 등장한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이 문구의 의미를 제대로 알고 쓰는 것일까?

2012년 독일에서 제작된 영화「Hannah Arendt」는 바로 이 악의 평범성 테제로 인해 불거진 한 유태인 여성 정치철학자의 필화사건을 집중 조명하고 있다. 사실 영화는 묘한 기시감을 불러일으킨다. 아렌트를 마치 2500년 전 아테네에서 ‘思惟의 모험’을 즐겼던 소크라테스의 20세기적 환생인양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자신이 선택한 사유의 모험으로 인해 위험에 빠진 철학자 아렌트와 성난 유태인들의 모습은 소크라테스와 그에게 독배를 마시게 한 고대 아테네인들의 모습과 매우 흡사해 보인다.

영화는 히틀러의 유태인 대학살을 진두 지휘했던 나치 대령 아돌프 아이히만이 이스라엘의 모사드에게 검거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아렌트는 <뉴요커> 잡지의 특파원 자격으로 1961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아이히만 재판을 참관한 다음, 그 잡지에 자신이 취재한 내용을 연재했으며 1963년 기고문들을 모아『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관한 보고서』라는 제하에 단행본을 출간했다. 여기서 그의 유명한‘악의 평범성’이라는 문구가 부제로 등장했고 이내 뜨거운 논쟁의 주제로 부상했다.

그도 그럴 것이, 히틀러의 인종말살 명령에 따라 600만명의 유태인을 가스실에 처넣은 아이히만의 반인륜 범죄에 대해 그것은 한 악한이 저지른‘본질적인’악이 아니라 사유 능력이 없는 한 꼭두각시 관료가 저지른‘평범한’악일뿐이라는 아렌트의 설명은 매우 상식 밖이었다.

그리고 이 해석은 우리 중 어느 누구라도 아이히만이 처했던 그런 상황에서는 그처럼 행동할 개연성이 있다(즉‘우리 모두 안에 아이히만이 있다’)는 식으로 그 나치 관료에게 일종의 면죄부를 주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판받았다.

사실 이 악의 평범성 테제의 핵심은 인간의 사유와 악의 상호연관성, 즉 사유 행위가 악행을 미연에 방지하는 도덕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통찰이다. 이것에 따르면 사유할 줄 아는 사람은 누구나 악행을 저지르지 않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 사유의 전문가인 철학자 하이데거가 나치에 부역하면서 자신의 유태인 제자들에게 불이익을 준 사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설명을 할 수 있을까.

이 대목에서 우리는 아마도 인간이 악행을 저지르는 근본 원인은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 즉 아렌트가 1970년대 칸트 정치철학 강의를 통해‘반성적 판단능력’이라고 부른 것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비단 하이데거뿐 아니라 아이히만이나 세월호의 이준석 선장에게 나타난 공통된 문제도 단순한 사유 능력의 부재가 아니라 바로 이 반성적 판단 능력의 부재였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결국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테제는‘우리는 누구나 악을 행할 수 있는 상황에 놓일 수 있다’는 제1 명제와‘그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다’는 제2 명제로 이뤄져 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지금껏 제1 명제에만 큰 관심을 보였으며 제2 명제인 반성적 판단 능력, 즉 우리의 도덕적 선택의 문제는 대체로 간과해 왔다. 우리가 이 점을 직시할 때 비로소‘악의 평범성(?)’테제의 심오한 의미를 제대로 알고 쓰는 것이 된다.

서유경 경희사이버대·NGO학과
경희대에서 정치철학으로 박사를 했다. 한국정치학회 정치사상분과위원장을 지냈고, 현재 한나 아렌트 학회회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제3의 아렌트주의: 후기-근대 민주주의의 유목적 윤리학 방법서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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