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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낙청교수에게 듣는다 - 한반도 분단체제의 정세와 전망
백낙청교수에게 듣는다 - 한반도 분단체제의 정세와 전망
  • 박순성 동국대 교수
  • 승인 2001.01.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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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체제는 세계체제의 핵심고리 통일로 여는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
백낙청 서울대 교수(영문학)
대담자 : 박순성 동국대 교수(북한학)

지난해의 남북정상회담은 남북관계의 진전에 커다란 물꼬를 텄다. 한반도 '분단체제'의 해체 조짐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92년 '분단체제의 인식을 위하여'를 발표한 이래, '분단체제'의 체계적인 인식과 그 극복의 전망을 끊임없이 모색해온 백낙청 교수(서울대 영문학)는 최근의 남북관계의 변화를 일컬어 '흔들리는 분단체제'라고 표현한 바 있다. 2001년의 새해 첫날, 백낙청 교수로부터 한반도 분단체제의 현주소와 앞으로의 전망을 들어보았다. 대담은 우리신문 편집기획위원인 박순성 교수(동국대 북한학과)가 맡아 진행했다.

박순성(이하 '박') = 분단 55년, 한국전쟁 발발 50년이 되던 2000년 6월, 남북정상이 만나 공동선언을 발표함으로써 평화와 통일에 대한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국전쟁이 이제야 끝났다거나 '민족'을 다시 발견하게 되었다는 말들도 있었습니다. 분단의 역사에 전기가 마련되었다는 뜻이겠지요.
백낙청(이하 '백') = 정상회담으로 분단시대가 종결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분단시대의 최종국면에 접어들었다고는 말할 수 있습니다. '통일시대'라는 말을 넓은 의미에서 통일작업이 본격화되는 시기로 규정한다면, '분단시대'와 '통일시대'는 어느 정도 겹치게 될 것입니다. 한반도의 통일은 베트남이나 독일처럼 한쪽의 일방적 승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점차적으로 진행되는 열린 과정이기 때문에, 통일의 진행과정과 분단체제가 허물어지는 과정이 겹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 시기는 분단시대의 최종국면인 동시에 통일시대의 초기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의 진전이라는 긍정적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 사회는 더 난맥상에 빠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이는 그 동안 안정상태로 유지되던 분단체제가 내부적 혼란에 빠졌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분단체제 아래에서 잠복되어 있던 온갖 모순들이 터져 나오는 것이죠.
박 = 분단체제가 부정적인 의미에서 안정된 체제였고, 새로운 체제로 전화되기 위해서는 '흔들려야' 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선생님께서 분단체제론을 제기하신 지 10여년이 지난 지금, 젊은 연구자들도 '분단체제'라는 개념을 널리 사용하고 있습니다. 분단체제론의 애초 취지는 무엇이었습니까?
백 = 분단체제라는 말이 자주 쓰이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엄밀한 개념으로 쓰는 예는 많지 않은 것 같아요. 분단체제론을 구상하게 된 것은 1987년경입니다. 당시 한국사회성격논쟁이 활발했는데, 저는 이 논쟁이 우리 사회의 현실에 대한 구체성이 부족했다고 느꼈습니다. 우리 사회는 분단된 사회입니다. 분단은 외세의 개입에 의해 시작되었지만, 오래 지속되면서 남북한 내에 분단을 재생산하는 내부적인 요인들이 축적되었던 거지요. 저는 당시의 논쟁이 이런 현실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하고 있다는 아쉬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분단체제론의 문제의식은 '분단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인식에 있었습니다.
박 = 분단체제론은 남북한 사회에 존재하는 지배구조의 본질과 재생산원리를 밝혀주는 이론이라고 판단됩니다. 자연히 남북한의 체제경쟁과 체제경쟁에 따른 시민사회의 억압과 말살이 강조될 것 같습니다.
백 = 분단체제는 남북한의 체제경쟁만이 아니라, 남북간 기득권세력들간의 적대와 공생이라는 복잡한 관계가 얽혀서 유지되고 있습니다. '분단체제론'의 기본적인 문제의식은 이 체제의 주요 갈등이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체제대립이 아니라, '남북한에 걸친 분단체제의 기득권세력과 남북한 대다수 주민과의 이해관계 대립'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한반도의 대다수 주민들에게 좀더 나은 체제를 가져올 것을 지향하는 논리인 셈이죠.
박 = 선생님 말씀은 민중을 중심에 놓고 세계와 민족을 바라보는 '민중적 민족주의'를 상기시켜줍니다. 하지만, 구조조정 이후의 상황은 민중적 민족주의를 되돌아보게 하는데요.
백 = 요새는 민족이나 민중이나 인기가 없는데 그 둘을 합치면 더 인기가 없을는지 몰라요. 두 개념은 동일시할 수 없지만, 상호보완하면서 또 상호해체하는 개념으로 결합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민중적 민족주의'라는 식으로 결합시키는 것은 또 하나의 구호를 만드는 것으로 끝나기 십상이지요. 세계화의 시대에 민족주의가 효과적인 담론이 못된다는 최근의 비판은 타당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변의 그런 비판들 자체가 세계화에 대한 적절한 비판기능을 하고 있는가 하면 그것도 의문이에요. 민족주의의 타당성을 원론적으로 따지기보다는 당면한 민족적인 과제와 관련하여 어떤 대응을 할 것인가가 중요하죠. 분단체제론에는 최대의 민족적 과제인 평화적이고 민주적인 통일작업이 단순한 민족주의로는 안된다는 생각이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 개념을 제쳐두고 민족적 과제를 풀어갈 수는 없는 일이고, 더욱이 민중의 개념을 도외시하는 이론은 분단체제의 실상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박 = 결국 분단체제론은 민족과 민중의 현실을 가장 구체적으로 끌어안으려는 노력이라고 판단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최근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구조조정기의 경쟁력 담론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백 = 통일을 단순히 민족주의적인 과제로만 본다면, 그것은 일종의 통일지상주의가 될 겁니다. 반면에 민중의 입장에서 본다면 목표는 민중의 한층 나은 삶을 보장하는 통일이라야만 되지요. 그런데 현실적으로 우리 한반도 주민들의 경우, 갈라진 민족끼리 화해하고 함께 사는 나라를 만들지 않고는 민중의 이익에 합치되는 더 나은 체제를 만들 수가 없게 되어 있어요. 분단체제극복이 단순한 민족주의적 과제는 아니지만 그 민족주의적 차원을 경시할 수 없는 까닭이 거기 있습니다. 구조조정에 대해서도 분단체제극복에 가장 효과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경제 사회정책이 무엇인가 하는 차원에서 접근해야 하리라 봅니다. 경쟁력이라는 개념도 마찬가지지요.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동력을 얻으려면 어느 정도의 국제경쟁력을 확보해야 합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우리도 구미나 일본만큼 잘살아보겠다는 발상은 곤란하지요. 분단체제를 그대로 둔 채 현실적으로 이루어질 일도 아니지만요. 설혹 얼마간 성공하더라도, 우리가 너무 잘살지도 않고 못살지도 않는 나라 특유의 이점을 살려서 새로운 세계역사를 창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거죠.
박 = 현실을 바꿀 수 없는 조건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또한 분단체제의 극복과정이 민족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세계체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는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백 = 현실을 주어진 조건으로만 바라보는 태도는 말단 정책담당자뿐 아니라 정치지도자나 대다수 사회과학자들에게도 공통된 것 같습니다. 특히 주류 사회과학자들은 현상을 지나치게 기정사실화하는 경향이 있지요. 그런데 급진적인 대안을 내놓는다는 사람들도 실제로는 우리 현실의 역동성에 눈감은 채 공허하거나 자기 의지에만 치우친 얘기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분단체제라는 가변적인 상황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주어진 현실이 항구적인 것이 아님을 하루하루 실감하면서 지냅니다. 우리가 이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고 대응한다면, 근본적이고 대폭적인 변화도 가능하다고 봐요. 그런 의미에서 사회과학자들에게도 한반도에 사는 것이 일종의 특권이지요. 물론 분단체제는 세계체제의 일개 하위체제에 불과하기 때문에 분단체제가 바뀐다고 해서 상위체제가 곧바로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반도에서 어느정도 민중의 이익을 반영한 통일이 이루어진다고 해서 세계체제가 하루아침에 바뀌지는 않을 것입니다. 세계시장의 제약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거지요. 하지만, 저는 한반도의 분단체제가 세계체제의 핵심적인 고리라고 믿기 때문에, 한반도 민중의 성공은 세계체제의 기득권세력 전체에 엄청난 타경을 주리라고 봅니다.
박 = 선생님께서 특별히 강조하시는 것 중의 하나는 분단체제와 세계체제의 연관성입니다. 분단체제가 세계체제의 산물이면서 동시에 세계체제를 존속시키는 역할을 하는 '체제속의 체제'라는 해석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백 = 분단체제라는 용어를 쓰는 사람들도 세계체제와의 연관을 곧잘 도외시합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가 한반도에서 구체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형태가 바로 분단체제입니다. 분단체제는 동서냉전의 산물만은 아닙니다. 분단체제 극복에 발목을 잡는 세력들을 보면, 결코 좁은 의미의 냉전세력만은 아닙니다. 분단체제로 인해 이득을 보는 사람들은 자신의 이해관계가 위협받을 경우, 때로는 냉전의식으로, 때로는 지역감정으로, 때로는 낯익은 권위주의로 그때그때 신축자재하게 대응합니다. 냉전의식만을 너무 부각시킬 때 이런 복합적인 측면을 간과하기 쉽지요. 원래 냉전구도의 핵심은 자본주의세계체제와 사회주의세계체제의 대립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세계체제는 몇백년에 걸쳐 지속하면서 한때 냉전체제라는 특수한 형태를 통해 자신을 지탱하고 세계민중을 관리했던 것이지요. 실제로 한반도의 분단은 동서냉전의 단순한 산물이라기보다 패권국가의 세계체제관리 방안으로 실현되어 냉전체제의 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동서냉전의 종식에도 불구하고 냉전에서 이득을 봤던 세력은 곳곳에 온존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도 한반도 분단체제가 일정한 기여를 하고 있는 거지요.
박 = 선생님과 '창작과 비평'은 오랫동안 지식인 문화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일부에서는 선생님의 작업이 '관조적 이론화'에 치우친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한편, 정상회담 이후, 분단의식의 극복이 중요하다는 주장과 함께 분단체제 극복을 위한 대중문화운동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백 = 분단체제는 복잡한 체제이기 때문에 그 극복과정도 여러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우선 직접적으로 대중 속에서 북과의 대결의식을 완화하는 작업이 필요하지요. 동시에 분단체제의 신축자재한 기득권구조를 인식하고 이에 적절히 대응하는 좀더 차원높은 지성과 감성의 연마도 필요합니다. 문학의 예를 보자면, 분단을 소재로 해야만 분단극복 문학이 아닙니다. 현실을 깊이 다루고, 삶의 문제에 예민하고 건전하게 반응하는 심성과 사고력을 키워주는 문학이라면 모두가 분단체제극복에 기여하는 문학이죠. '창비'는 독재정권과 반통일 이념에 맞서 대중을 직접 계몽하는 작업도 해왔지만, 한번도 선전일변도의 문학노선을 따르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젊은 비평가들의 비판도 받았죠. 최근 비활자매체가 부상하고 문화가 다양해지면서 '창비'의 직접적인 계몽작업의 비중은 줄었습니다. 하지만 관조적 이론화라는 비판에 대해서는, 글쎄요, 분단체제론만 해도 실용적 이론 아닌가요? 적어도 나 자신을 돌아보면, 이런저런 실무의 현장에 관여하느라 '관조적 이론화'를 못한 게 오히려 아쉬운 심경입니다.
박 = 선생님께서는 '분단체제 변혁의 공부길'이라는 책을 펴내신 바 있습니다. 선생님께 공부는 변혁과 동일한 맥락에 놓여 있는 것 같습니다. 문학연구자에 그치지 않는, 현실연구자이자 미래연구자의 면모를 보이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수는 오랫동안 학인(學人)이자 지식인, 선비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최근 교수노조의 설립움직임에서 보듯이 이제 교수는 전통적 지식인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백 = '공부길'이란 말은 수도자의 세계에서 쓰이는 말인 만큼 스스로 공부길을 잡았다고 큰소리칠 일은 아니지요. 불교에서 많이 쓰는데, 우리나라 학인의 표준이 되어온 유교의 '선비'도 자기 몸과 마음을 닦는 것을 공부의 기본으로 삼는 수도자인 셈이지요. 반면에 현대학문은 주관적 요소의 개입을 배제하는 데서 과학성과 전문성을 찾는 경향입니다. 오로지 지식의 축적에만 몰두하는 것이 현대 학문의 대세지요. 이런 대세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지식경쟁에는 유리할지 모르지만, 이런 식의 학문생활도 말하자면 신자유주의적 논리에 순응하는 꼴입니다. 오늘을 사는 지식인이 '공부길'을 제대로 잡는다는 것은 전통적인 학인의 자세를 본받으면서도 현대인의 지식공부에서도 낙오하지 않는 어려운 과제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교수노조 문제는 좀 다른 차원이지요. 대학교수가 선비지 노동자냐 하는 식으로 대할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일률적으로 강요할 건 아니지만, 경영논리가 대학사회를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 교수의 몫을 다하기 위해서는 그 논리에 맞서 교수직의 안정과 독립성을 보장해줄 조직이 필요하다고 봐요. 교수협의회로는 그런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고 믿습니다.
박 = 인생은 시간과의 싸움이고, 역사는 시간의 기록이라고도 합니다. 인간이 주체적으로 시간을 이해하기 위해 시간에 경계선을 설정하기도 합니다. 해가 바뀌는 것도 그런 의미일텐데, 2001년이 우리에게 갖는 의미는 여느 해와는 다르다고 봅니다.
백 = 지난해는 남북정상회담으로 분단시대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뜻깊은 한해였습니다. 분단체제해소의 전망이 드디어 보이는 듯도 했고, 오히려 문제가 꼬이고 혼란이 심해지면서 분단체제라는 것이 결코 간단한 물건이 아님을 일깨워준 한해이기도 했습니다. 새해부터는 분단체제극복을 위한 실질적 작업을 해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흔히 한반도 통일의 세계사적 의미를 입에 올립니다만, 실제로 남과 북 어느 쪽의 현실보다 나은 체제를 통일과정에서 우리 힘으로 이루어낸다고 할 때 그것이 동아시아와 세계전체에 미칠 파장은 엄청나리라 봅니다. 당장에 인류문명의 신기원이 도래하지는 않는다 해도 한반도가 새로운 인류문명 건설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을 것은 분명합니다. 역사를 보더라도 작은 나라가 자기 살림을 제대로 챙기면서 새 문명의 선구자로 나섰을 때 그 파장은 뜻밖의 곳에까지 미치지요. 데카르트 철학의 배경에는 프랑스뿐 아니라 네델란드의 존재가 있고, 영국의 입헌정치가 가져온 혜택은 맑스의 사상적 작업을 가능케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요. 좀 다른 이야기지만 지금 유럽연합 본부도 독일이나 프랑스가 아닌 벨기에에 있는데, 한반도가 나라안팎 사람들에게 두루 편안한 장소가 되었을 때 주변의 강대국들이 협력하며 사는 데도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 봅니다. 물론 그런 한반도는 남에게 편의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스스로 창조적 지성의 중심지가 되겠지요. <진행, 정리 : 김재환 기자>□ 약력 1938년 대구 生. 브라운대 영문학 학사. 하버드대 영문학, 철학 박사.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역임. 현 서울대 영문학과 교수,『창작과 비평』편집인. 저서로 『민족문학과 세계문학』『민족문학의 새단계』『분단체제변혁의 공부길』『흔들리는 분단체제』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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