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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깍발이] ‘무릎꿇어’와 불평등한 사회구조
[딸깍발이] ‘무릎꿇어’와 불평등한 사회구조
  • 김용규 편집기획위원/ 부산대·영어영문학과
  • 승인 2015.01.14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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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규 편집기획위원/ 부산대·영어영문학과
지난해에 있었던 불투명한 정치적 운영과 암울한 경제적 전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해가 바뀌었는데도 여전히 길게 드리워져 있다. 그 가운데 우리들을 더욱 우울하게 만들었던 것은 그 어느 때보다 심했던 갑의 횡포가 아닌가 한다. 땅콩 서비스를 빌미로 이미 활주로로 진입하는 비행기를 되돌려 책임사무장을 내리게 한 항공기 회항 사건은 재벌 2세의 무책임한 행동으로만 간주될 순 없다. 그것은 갑의 횡포의 한 대표적 사례일 뿐 우리의 일상 속에 만연된 갑들의 횡포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최근에 이런 사건들이 우리 사회에서 많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사회의 근대화 과정에서 제대로 해결되지 못한 우리의 전근대적이고 비합리적인 문제들이 이제야 곪아 터져 나오는 것 때문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의 존재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민주화 이후의 몰염치한 세계로 우리가 이미 진입하고 있기 때문인지 모른다. 오만한 갑의 횡포가 한둘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단순히 인간적 관용과 인내의 수위가 야박해져가는 우리의 뒤틀린 심성의 문제로 돌릴 순 없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세계가 우리 사회에 들어서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지 모른다.

전근대적 신분사회가 아닌데도 ‘무릎 꿇어’라는 명령이 횡행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어떤 사회구조에 의해 강제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타인의 위엄을 짓밟아도 된다고 생각할 정도로 부와 권력의 불평등이 심각한 수준에 도달해 있음을 나타낸다. 가진 갑은 영원히 갑이 되고 그렇지 못한 을은 영원히 을이 된다는, 즉 갑을의 역전이 불가능한 세계 말이다. 인간이 구조의 담지자라고 할 때, 타인에게 ‘무릎 꿇어’라는 명령을 하달하는 실체는 바로 이 불평등한 사회구조인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문제만은 아니다. 지난해 번역된 『차브』라는 책은 영국판 갑의 횡포가 어떻게 사회구조와 연결돼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이 책은 영국사회에서 갑의 횡포가 1980년대 대처 정권 이후 노골적인 계급사회로 변질되는 사회구조상에서 생겨난 문제임을 통렬히 고발한다. ‘차브’란 빈부격차와 사회 불평등이 고착화된 사회에서 멸시와 차별의 대상이 된 비정규직 노동자와 사회적 약자들을 가리킨다. 이 책에 따르면 영국사회에서 이런 약자들이 가난을 탈피하지 못하게 된 것은 1980년대 이후 구조조정으로 인해 약자들의 일자리가 사라진 사회구조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을 바로 약자들 자신의 가난과 우둔함, 그리고 게으름 탓으로 돌리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구조가 일상화되면서 사회적 약자들을 경멸하고 멸시하는 갑의 횡포가 극심해졌다고 한다.

우리 사회 역시 비슷한 전철을 밟아간다. ‘무릎 꿇어’의 명령 뒤에는 불평등 구조의 고착화와 그 원인을 사회적 약자들에게 전가하는 사회적 과정이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과정이 꾸준히 작동하다보면 인간적 본성까지 불평등한 것으로 인식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과거에 우리는 직업의 귀천과 부의 유무와는 상관없이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이런 생각은 옛날의 것이 되고 있다. 직업의 귀천과 부의 유무에 따라 인간의 본성이나 권리조차 근본적으로 불평등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계급과 직업의 차별과 인간 자체의 차별 사이에는 큰 간극이 존재한다. 전자에는 인간적 평등이라는 가능성이 여전히 전제돼 있지만, 후자 즉 인간적 본성의 차별에는 사회적 불평등을 극복할 가능성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새해가 밝았지만 여전히 마음이 어두운 것은 이런 불평등한 구조가 가까운 미래에 개선될 전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김용규 편집기획위원/ 부산대·영어영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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