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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걸’의 문학적 귀환이 아름다운 이유
‘올드 걸’의 문학적 귀환이 아름다운 이유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5.01.12 20: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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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末年의 양식’이 된 이순례의 장편소설 『오늘밤도 지났네』

 

 

한일장신대에서 문학을 가르쳤던 이순례는 1942년에 태어났다. 올해 우리나이로 74세가 된다. 그런 그녀가 장편소설 『오늘밤도 지났네』(교수신문사 刊)를 내놨다. 아마 예정대로였다면 그는 서영은 또래의 작가로 문단에서 잘 나갔을 것이다. 어느 잡지에선가 소설 최종심에 올랐을 때, 광화문 어귀에서 만난 그 치욕적인 제안이 그를 문단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일만 없었으면 말이다. 그렇게 문학과 담을 쌓고 살아온 ‘末年’의 그가 70에 붓을 들었고, 3년 만에 2백자 원고지 1천440매의 마지막 장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다. 도대체 그 창작의 욕망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이 질문은 어쩌면 한국문학에서 새로운 ‘말년의 양식’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질지도 모를 범주의 확장이자,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의 미적 확산일 수도 있다.


그는 6·25가 나던 해에 여덟 살이었다. 그러니까 60년대에 대학을 나오고, 산업화의 거대한 물결이 진행되기 시작할 무렵, 사회인으로 살았던 세대다. 5·18의 시절을 견뎌냈으며, 50년만의 정권 교체를 통해 탄생한 정부를 살면서 조금씩 늙어갔다. 소설 속에도 등장하지만, 그는 50대 후반에 평범하지 않은 삶의 배우자를 만나 11년 20일을 함께 살았다. 이 점에서 이 소설은 비록 허구의 등장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어디까지나 개인사적 삶의 흔적에 대한 완벽한 복기가 된다. 또 그것은 작가의 모든 감성과 기억의 구심점인 ‘가족’, 그 가운데서도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한 언니 ‘인서’, 가족의 비극을 모조리 겪어낼 수밖에 없었던 어머니, 그리고 인생의 반려자가 됐다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남편 ‘한인범’을 향한,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솟아나온 노래이기도 하다.


“그가 떠난 지 일 년이 지났다. 아니 두 해가 가까워오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현실 같지가 않다”로 시작해서 “그때에 당신은 당신이 있는 그곳에서, 저는 저 있는 자리에서, 날마다 한밤중에 중간에서 서로 만나기로 했던, 그 약속을 당신은 지키시겠지요?”로 끝나는 『오늘밤도 지났네』가 눈길을 끄는 것은 무엇보다 그 ‘末年의 양식성’ 때문이다.


문학평론을 하는 김승환 충북대 교수(국어교육과)는 일찍이 에드워드 사이드의 ‘말년의 양식’을 가져와 이렇게 지적한 바 있다. “사이드 자신이 보여준 것과 같이 예술가의 말년은 불화(intransigence), 난관, 풀리지 않는 모순이 있는 시기다. 따라서 평안하고 안락하게 말년을 보내는 예술가는 사이드가 말하는 말년이라는 개념으로 분석할 대상이 아니다. 사이드는 그런 말년이 아니라 불화하는 말년, 모순의 말년, 곤란에 처한 말년을 상정했다. 사이드가 창안한 말년의 담론은 모든 국가 모든 민족의 예술가에게 다 적용될 수 있다.”


이순례의 소설은 표면적으로 용서와 화해, 구원을 표 나게 그리고 있다. 삶의 전체, 특히 의식이 형성되는 시기를 점령한 인서 언니의 불행과 그에 대한 외면, 그리고 삶의 후반부를 차지하는 한인범 의원과의 결혼과, 가족 간의 불화가 이를 이끌어나간다. 대학생이 됐다가 어느날 눈이 풀린 채 집으로 돌아온 인서 언니의 추락은 김제에서 내로라하는 병원 집안을 어둡게 만든 제일 요인이 된다. 인서 언니의 추락은 기억 속 과거 저목이나 정순이와 같은 ‘비정상 인간’ 군상과 겹치면서 외부 세계의 시선을 부끄럽게 여기게 만든다. 정확히 말하면, 인서 언니가 아니라, 정신이 나간 인서 언니를 대하는 주인공 윤서를 포함한 ‘가족’ 모두의 외면이 담합한 결과다. 서울 S大 영문과를 나와 출판사를 운영하는 윤서의 의식은 이러한 인서 언니의 불행, 이 불행을 외면하고 그로부터 달아나려고만 했던 가족의 비윤리에 사로잡혀 있다. 그리고 이러한 외면과 불화는 그의 삶 후반에 다시 찾아와 그를 격정의 시간 속으로 빠뜨린다.


이순례는 작가후기에서 “겉은 조용한 것 같았지만 속은 미쳐 있었던 세월이었다”라고 썼다. 그의 인생이 그랬다는 말이다. 그는 평온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속에 있는 미친 세월과 하루하루 긴장된 삶을 살아냈던 것이다. 그 흔적이 이 소설 『오늘밤도 지났네』에 깊이 새겨져 있다. 그 단적인 풍경이 바로 인서 언니가 즐겨 부르던 그 노래, 빌헬름 뮐러의 「겨울 나그네」 중 「보리수」의 한 구절이다. “오늘밤도 지났네, 보리수 곁으로./깜깜한 어둠속에 두 눈을 감았네./가지는 흔들려서 말하는 듯하네./친구여, 여기 와서 안식을 찾아라./안식을 찾아라.”
그렇다. 그는 결코 ‘안식’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다시 73세에 세월호 침몰을 목격했다. 팽목항에도 달려갔다. 광화문에서 그는 엉엉 울었다. 그를 가장 부끄럽게 만들었던, 비극에 대한 침묵과 외면은 인서 언니와 자신(가족)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깊은 깨달음을 만났던 것이다. 세상은, 苦海 속의 생명에 대해 외면하기 시작했고, 잊자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 소설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시대와의 불화’가 그의 내면에 젊은 모습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동력은 ‘말년의 양식’으로 돌아볼 수 있다.


또 하나. 『오늘밤도 지났네』에서 놓칠 수 없는 대목은 바로 虛飾이 완전 배제된, 국화꽃 같은 문장들이 만들어내는 미감이다. 이것은 이 작가가 비주류로 한국문단 저편에 존재했던 사실을 새롭게 환기하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예컨대 이런 문장들.
“김제 읍내 길은 갈치처럼 길기만 했다. 역에서 왼편으로는 경찰서, 조금 올라가서 소방서, 오른쪽으로 탱자나무 울타리를 끼고 걸어가면 자주색 세모 지붕의 강당을 지닌 여학교 …… 재래시장을 지나 골목으로 들어서면 김제제일교회, 그 골목을 지나오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향교를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군산, 지평선의 청보리밭이 가없이 펼쳐지는 진봉, 만경으로 가는 길, 왼편으로는 죽산, 심포, 광활의 끝이 보이지 않는 외에밋 들로 이어졌다. 우리 집은 그 삼거리에서 죽산으로 가는 첫 길목에 있었다.”

“고향 역을 나서자 명주 올처럼 부드러운 그러나 섬세한 날카로운 바람 한 점이 겨드랑이 밑으로 급히 파고들었다. 고향의 공기. 그리움과 불안의 공기. 아직까지도 가시지 않은 그 불안의 냄새로 어깨를 움츠렸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거리는 괴상한 적막 속에서도 신선했다. 흩어지지 않은 공기를 가르며, 불안을 가르며, 갈치처럼 길기만 한 읍내 길을 걸어가는 데 쓰레기통 옆에서 어떤 물체가 움직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저목이었다. 나를 보자 길쭉한 웃음을 날렸다.”


분명, 이러한 문장들은 작가의 원질이 돼 준 고향 김제가 그에게 허락한 감각들임에 틀림없다. 그의 ‘단 하나’의 장편소설이 가능했던 데는 이러한 외에밋 들의 ‘청보리밭’ 같은 풋풋한 미의식이 한몫 거들었으리라. 그는 일흔을 넘겼지만, 그의 의식과 시선, 부끄러움에 대한 성찰로 본다면, 그는 아직 젊다. 피천득 선생의 조언대로, 단 한 편의 글을 남기고 싶었다고 말하는 그는 한국문학의 말년의 양식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웠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올드 걸’의 문학적 귀환이리라.

글·사진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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