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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경제학은 인류 절반의 경제현실 결여했다”
“기존 경제학은 인류 절반의 경제현실 결여했다”
  • 홍태희 조선대·경제학과
  • 승인 2015.01.05 17: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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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여성주의 경제학: 젠더와 대안 경제』 홍태희 지음|한울|336쪽|29,000원

기존 경제학의 지나친 남성성이 부추긴 경쟁과 이윤 극대화로 범벅돼 결국 세상이 공멸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여성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균형을 잡아야 한다.


필자는 오랫동안 여성주의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자신이 어떤 성별보다 못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도, 주위 성가시게 하면서 괜한 주홍글씨를 달고 싶지도 않았다. 사실 여자중학교, 여자고등학교를 거치고 대학교까지 자의식 과잉 소녀의 행로는 세상의 기준과는 별개로 거침이 없었고, 사회가 요구하는 젠더와 갈등이 생길 기회는 눈치껏 피했다. 누가 여성주의를 떠들면 속으로 중얼거렸다. “왜 저렇게 징징거리는 거야. 저만 잘하면 되지.”


필자가 현실에 눈을 뜬 것은 결혼 후였다. 첫 추석 달이 뜨는데 오랜 나의 집이 아니라 낯선 그의 집에서 전을 부치는 놀라운(?) 경험을 하면서 사회가 정한 질서 안에서의 삶이 가늠되기 시작했다. 아이 엄마가 되자 현실은 그 무시무시한 위용을 제대로 드러냈다. 이렇게 만난 형이하학의 세상을 엄마, 아내, 며느리, 딸로 살면서 무능과 무력으로 바닥을 기다가 주위를 돌아보니 도처에 내가 있었다.
입직의 벽 앞에서 좌절하는, 육아와 직장 사이에 곡예를 하는, 유리 천장에 구멍 내느라 날밤을 새우는, 좀 더 예쁘게 보이려 별수를 다 쓰는, 각종 폭력 앞에 무참하게 무너지는, 비정규직, 단순노동, 저임금 노동, 가사 노동은 도맡아 하는, 가난과 비참에 쉽게 떨어지는, 어느 공동체든 가장 밑바닥에 있으면서도 사회와 가정을 유지시키는, 나 같은 그녀들을 확인하며 필자의 애환이 결코 개인적이지만 않다는 것을 확인하게 됐다. 그리고 필자의 현재조차 먼저 길을 열어 준 이들이 있어 가능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렇게 필자는 여성주의와 조우했고, 내 몫의 숙제를 하기 위해 경제학 앞에 붓을 꾹꾹 눌러 여성주의라는 형용사를 붙였다.

여성주의 경제학의 필요성
기존의 경제학이 여성의 문제를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다. 근대에 와서 누구나 돈벌이할 자유가 허락되자 더 복잡해진 경제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손’이 등장하고 근대 경제학이 태동했다. 이 근대의 공간 속으로 새롭게 등장한 인류가 여성이다. 이 시기에 와서 여성도 시장과 시청에 갈 권리가 생겼지만 별 준비 없이 나선 세상은 험했고, 곳곳에 쳐진 남성 기득권의 장벽을 넘기는 힘들었다. 전근대의 잔재가 여전히 남아있는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의 역할과 근대인으로의 역할을 이중으로 수행하면서 여성들의 불만은 커졌으나 경제학은 이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


근대 경제학의 녹록찮은 사정은 이러하다. 근대 경제학은 사실 실증주의를 기반으로 물리학 같은 엄밀한 학문을 만들려는 이상을 갖고 태동했다. 이를 위해 실증할 수 있는 영역, 돈의 단위로 인간의 행위를 셀 수 있는 ‘시장에서의 경제활동’의 해명에 집중했다. 따라서 대부분 여성들의 주된 활동 장소인 ‘비시장적 경제 활동’에는 관심을 접었다. 게다가 여성학자가 전무한 상황이라 연구가 남성연구자에 의해서 남성의 활동영역에 대해 남성적인 연구 방법으로 이뤄졌고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그 결과 경제학은 반쪽짜리 과학이 됐다. 이러한 사정은 근대 경제학의 적통인 신고전파 경제학은 물론 비주류 계열인 제도학파 경제학이나 마르크스 경제학에서도 확인된다.


이렇게 만들어진 근대 경제학의 문제는 단지 여성의 문제를 제대로 해명하지 못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객관, 실증, 합리, 이성 등으로 대표되는 남성성이 지나치게 강조하자 여성성과 남성성 사이에 균형이 무너지고 경제학 자체가 남성적인 학문이 됐다. 자연히 여성성과 남성성이 어우러져 있는 인간의 현실을 제대로 해석할 기반을 잃게 됐다. 경제학의 균형이 깨어지자 이를 바탕으로 한 경제의 균형도 파괴됐다.
20세기를 거치면서 양성평등이 시대의 당위가 되자 한편에서는 여성학이 분과과학으로 터를 잡았고, 다른 한편에서는 사회적 성 개념 젠더가 개발돼 성별의 사회적 관계가 사회과학 분석의 틀로 들어왔다. 경제학도 이러한 시대의 요청에 부응했고 1992년 국제여성주의 경제학회의 탄생과 더불어 분과 분야로 결실을 본다. 이처럼 여성주의 경제학은 여성주의의 관점에서 양성 사이의 경제적 긴장을 연구하는 경제학이다. 따라서 생물학적인 성(sex)과 사회적 역할인 젠더(gender) 및 젠더 사이의 관계인 ‘성별 관계(gender-relations)’가 경제에 특정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기존의 경제학의 분석대상, 분석모형, 연구방법, 연구결과, 연구주체 등을 재검토한다. 이를 통해 생산영역뿐 아니라 여성이 주로 활동하는 재생산영역 그리고 재생산영역과 생산영역의 관계에까지 연구 영역을 확장하여 경제학의 성 편향을 바로 잡고, 현실적으로는 경제 현상 속의 성차별을 해소하려는 시도다.


필자가 이해한 여성주의 경제학은 이처럼 기존의 경제학에 인류 절반의 경제 현실이 담겨 있지 않다고 보고 여성의 현실을 담은 경제학을 만들려는 노력을 총칭한다. 그러나 필자는 이 책에서 여성주의 경제학을 여성의 권익을 내세우는 경제학에 머물지 않고 병든 세상을 치유하는 대안경제학으로 제시한다. 기존 경제학의 지나친 남성성이 부추긴 경쟁과 이윤 극대화로 범벅돼 결국 세상이 공멸로 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경제운영 방식은 물론 학문 세계에서도 여성성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나에게 이 책을 집필하는 과정은 ‘반쪽짜리 경제학’을 ‘온전한 경제학’으로 되돌리기 위한 작업인 동시에 고장 난 경제학을 수선하는 작업이었다.

새롭지 않지만, 그러나 필요한
책은 다음과 같이 구성돼 있다. 먼저 기존의 경제학 이론의 성몰인지성을 지적하며 그 배경을 설명한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여성의 목소리를 담은 경제이론을 미시경제학, 거시경제학, 경제발전론, 경제성장론, 돌봄 경제학의 순서로 소개한다. 다음으로 필자는 현실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살아왔고, 살고 있는지를 경제적 측면에서 확인한다. 이를 위해 역사, 국가, 문화, 노동시장, 결혼과 출산 등의 키워드를 가지고 여성의 경제 현실을 설명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필자는 여성들이 시도한 대안 경제를 소개하며 그 가능성을 살펴본다. 먼저 무엇이 양성평등이며, 무엇이 여성주의 경제학의 이념이 돼야 하는지를 제시한다. 그리고 여성과 남성이 모두 잘살기 위한 여성주의 대안 경제의 경험을 소개한다.


물론 필자가 제시한 대안 경제는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연대, 공유, 수선, 보살핌, 협동, 자발적 가난, 헌신……. 이미 식상했을 수도 있고 이미 무력이 판정 났을 수도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둘러보면 다른 방법도 없다. 모두가 잘사는 세상으로 당장에 도달할 수는 없어도 더 나빠지는 것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한, 견고하고 거대한 자본 기계에 포섭은 되지 않기 위해서 남아있는 가능성은 이러한 운동이고 실천이기 때문이다.
2014년 12월 어느 설문 조사에서 한국 여대생 절반이 결혼에 대해 부정적이고, 16%는 자녀계획이 아예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는 한국의 성별격차지수가 세계 몇 등이라고 거론하지 않더라도 한국에서 아기 키우고 돈 벌면서 가정을 꾸리기 어렵다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인간 세상의 가장 자연스러운 일도 허용되지 않는 우리 사회의 기형적 상황 앞에서도 필자는 후배들에게 용기를 내어 엄마가 되라고, 이 놀랍고 멋진 일을 기꺼이 경험함으로써 자신의 젠더를 완성해가며, 세상을 지켜가고 변화시켜가라고, 기꺼이 아빠가 돼 더 좋은 세상을 만들라고 이 책에서 권하고 있다.


 

 

 


홍태희 조선대·경제학과
필자는 독일 베를린자유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관심 연구 영역은 경제변동론, 거시경제학, 여성주의 경제학, 경제철학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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