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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불평등 교정의 마지막 보루인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릴까?
무엇이 불평등 교정의 마지막 보루인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릴까?
  • 교수신문
  • 승인 2015.01.05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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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안과 밖 48회차 강연_고세훈 고려대 교수,‘ 평등과 복지’

▲ 자료·사진 제공=네이버문화재단
2014년 한해가 저무는 마지막 토요일인 12월 27일에 진행된‘문화의 안과 밖’48회차 강연은 고세훈 고려대 교수의‘평등과 복지’였다. 이제 남은 강연은‘통일과 평화’(박명림, 연세대)와‘동아시아의 질서와 평화’(이삼성, 한림대) 뿐이다. 이렇게 보면, 고세훈 교수의 강연은 이어지는 박명림 교수, 이삼성 교수의 강연 주제인‘평화’의 문제를 천착할 수 있는 전제라고도 할 수 있다.
이날 강연자로 나선 고세훈 교수는 학부에서는 경제학을, 석사과정에서는 정치학을, 그리고 미국 오하이오주립대에서 정치학을 두루 전공했으며, 한국정치학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현재는 고려대 공공행정학부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간 발표한 저서로는『조지 오웰: 지식인에 관한 한 보고서』, 『영국정치와 국가복지』,『 복지한국 미래는 있는가』,『 국가와 복지』,『 영국 노동당사』등이 있다.
지금 한국사회가‘반 복지의 덫’에 걸렸다고 진단하는 고 교수는“한국의 계급 권력적 불평등 현실에 비춰볼 때 일체의 유의미한 구조 개혁은 중장기적 전망일 수밖에 없다”고 읽어내면서, 복지 한국을 위한 개혁의 내용과 방향을 주의 깊게 분석했다. 특히 그는“불평등에 대한 대중적 인식의 형성, 그것을 불가피한 현실로 공고화하는데 기여한 몇몇 대표적인 반복지담론들을 비판적으로”들여다보며 논의를 전개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그의 이날 강연 주요 대목을 발췌했다.

정리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자유주의가 한 세대 넘게 위세를 떨치면서 불평등이 위험수위에 달했다는 학계보고뿐 아니라 현장의 증언 또한 만만치 않게 쏟아지고 있다. 최근에는 그간 불평등을 외면하거나 옹호하던 시장진영 쪽도 목소리를 보태는 실정이다. 불평등이 사회, 경제, 정치적으로 미치는 효과에 관한 실증적 분석들은 넘친다. 그러나 불평등의 가장 큰 해악은 그것이 시장을 넘어서 불평등 교정의 마지막 보루인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린다는 점이다. 복지국가란 시장의‘보이지 않는 손’이 체제적으로 양산한 빈곤과 불평등의 문제를‘보이는 정치’를 통해 완화/교정해 보려는 시도의 산물이다. 불평등(의 지속)이 권력적 편차와 맞물린 관계의 문제일 때, 전후 합의 정치를 지탱했던 복지체제가 신자유주의의 공세 앞에서 그리도 쉽게 방어적으로 돌아선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닐지 모른다.

한국의 소득불평등은 세계 최상위권 수준이거니와, 한국은 지니계수, 5분위, 10분위 등 어느 기준을 갖다 대더라도 불평등의 정도가 심각한 단계에 와있다. 불평등의 근원은 시장이지만 그것을 완화, 교정하는 일은 상당 정도 정치의 몫이며 그때‘조세와 지출(tax and expenditure)’은 재분배를 위한 국가정책의 일차적 수단이다. 한국은 시장소득의 불평등 정도가 심각한 상황에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세와 정부이전지출의 재분배 효과는 지극히 미미하다. 통상 국가복지의 수준이 저급한 경우를 잔여적 복지국가로 부르는 이유는 약자에 대한 복지의 일차적 책임을 국가 이전에 가족이나 시민사회가 떠안아야 하는 것으로 가정하기 때문이다(이른바‘하위성 원칙’). 그러나 우리는 복지‘국가’는 말할 것도 없고 그 이전에 복지‘사회’를 구축하는 데도 실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에는‘대안은 없다.’오랜 권위주의통치의 유산인 냉전 반공주의, 지역주의, 물질지상주의가 더해져서 한국사회는 본질적 갈등의 주 내용인 빈곤과 불평등 문제를 정치, 사회적 어젠다에서 체계적으로 몰아내고 있다.

특히 한국처럼 직업상실비용이 많이 들고 노동 유연화가 일상인 나라에서는, (고용)불안은 자유주의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그리하여 시장(재)편입 자체가 감지덕지한 목적이 될 때, 불평등은 기껏 부차적인 문제로서 체계적으로 주변화 되며, 오히려 그것을 사실상 옹호하는 담론들이 힘을 얻는다.

불평등에 대한 대중적 인식의 형성, 그것을 불가피한 현실로 공고화하는데 기여한 몇몇 대표적인 반복지담론들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보면 첫 번째는 복지국가 위기론이다. 복지국가는 구축 효과, 즉 이자율을 매개로 만성적 재정적자와 민간투자구축의 악순환을 만들고, 윤리적으로도 탈노동의 유인을 조장하여 고용과 성장의 위기를 가져온다는 것이 복지국가 위기론의 주된 내용이다. 한참을 양보하더라도 복지국가 위기론은 국가복지체제가 웬만큼 갖춰진 나라들에서나 거론될 수 있는 개념이다. 따라서 위기론은 물론이고, 어떤 점에서는, 동일한 역사적 지형 위에서 주창되는 신자유주의조차 우리에겐 사치일지 모른다.

두 번째는 성장결정론 혹은 적하이론이다. 분배도 성장이 있어야 가능하다. 성장과 분배는 경험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갈등적 개념이 아닌 것이다. 불평등 개선을 위해 성장 중심의 사회가 설득력을 확보하려면 재분배장치를 위해 최소한의 제도화가 선행돼야 하며, 성장전략에는 부자는 절대적 수준이, 빈자는 상대적 지위가 개선돼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어야 한다.

세 번째는 복지다원주의 혹은 복지민영화 대세론이다. 한국의 낙후된 국가복지, 시민사회의 척박한 복지전통과 만연한 반복지의식과 담론들, 그리고 다음에 보듯이, 소유자경영 중심의 비민주적 기업지배구조 등에 비춰 볼 때, 이 단계에서 복지를 민간에 맡기자는 것은, 취약한 공공부문을 더욱 취약하게 만드는, 따라서 복지를 아예 하지 말자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다.

네 번째는‘진보적 경쟁력’담론-생산적 복지 혹은 사회투자론이다. 생산적 복지는 고용이 최상의 복지이며 복지공여는 먼저 고용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사상에서 비롯됐으나 한국복지의 내용은 국가의 최소개입주의에 의존하는 배제의 기제라는 한계를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반정치 담론이다. 한국사회에서 반정치 의식과 담론이 각별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오늘날 특별히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국내외적으로 확산하는 신자유주의적 흐름을—때로 무비판적으로—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관료의 자의적 재량과 수혜자의 의존적 태도가 자율과 정면에서 상충한다는 점이야말로 필요의 집단적 공여에 대한 신자유주의적 비판의 핵심 중 하나이다.

우선 중요한 것은 대안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대안의 가능성을 낙관하도록 만드는 일일지 모른다. 우리의 관심은 완전한 평등(perfect equality)이라는 허수아비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덜한 불평등(less inequality)에 있다. 그러나 문제를 조급한 단기주의에 입각해 해결하려 할 때, 정치에 대한 기대와 실망이 반복되면서 사회적 불안정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노동 있는 민주주의’가 복지국가를 견인했다면, 한국의 계급 권력적 불평등 현실에 비춰볼 때, 일체의 유의미한 구조개혁은 어차피 중장기적 전망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복지한국을 위한 개혁의 내용과 방향이다. 무릇 한 사회의 진정한 복지는 모든 구성원, 이해관계자들의 복지이며, 당연히 그것은 시장 외부자 곧 실업자, 장애인, 노약자 등과 같은 시장탈락자들 뿐 아니라 시장내부자, 곧 종업원, 주주, 하청업체, 지역민, 소비자 등 이해관계자의 복지도 포괄해야 한다. 즉, 제도화의 부재 속에서 새 활로를 모색해야 하는 복지한국의 과제는 위계의 영역인 시장의 문제를 복지구상의 내부로 포괄해 냄으로써 국가와 시장 모두에서 권력의 행사 자체를 민주적으로 규율하는 제도적 틀을 정립하는 일에 닿는다.

중요한 점은 민주화의 이 두 범주-국가와 시장-가 긴밀하게 연계돼 있다는 것이다. 복지국가를 둘러싼 모든 중요한 개혁은 국가의 입법적 발의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시장 민주화를 포함한 구조개혁의 주체는 정치이며, 빈곤, 불평등, 불안이 만연하면서, 한국 정치가 동원할 수 있는, 잠재된 채 조직되지 않은, 방대한 계급적 자원이 존재한다는 점, 애초에 경로 의존성을 상정할 수 없는‘부재의 상황’이란 오히려 제도적 공백을 메우기 위한 정치적 이니셔티브가 작동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일 수도 있다는 점 등을 예민하게 포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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