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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신체의 순수한 잠재성이 드러났을 때
인간 신체의 순수한 잠재성이 드러났을 때
  • 교수신문
  • 승인 2014.12.29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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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말하다_ 『벌거벗음』 조르조 아감벤 지음|김영훈 옮김|인간사랑|197쪽|15,000원

 

벌거벗음은 지식의 첫 번째 대상이고 내용이다. 그런데 인간이 알게 된 최초의 지식인 벌거벗음은 기본적으로 결핍이다. 아감벤은 벌거벗음이라는 최초의 지식에서 이러한 내용의 부재는 이 지식이순수한 지식 가능성에 대한 지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아감벤의 사유에서 벌거벗은 생명은 기본적으로 주권 권력에 전적으로 노출된 인간을 의미한다. 어떠한 법도 그들을 보호하지 않는다. 우리가 당연히 생각하는 모든 권리는 이미 박탈당했다. 나치 시대의 유태인, 관타나모나 아부 그라이브의 수용자들이 아감벤이 제시하는 벌거벗은 생명의 대표적 예다. 1995년에 그의 저서 『호모 사케르』가 처음 출간된 이후 벌거벗은 생명에 대해 지금까지 많은 논의가 있었다. 9·11 테러와의 전쟁을 경험한 많은 이들이 이 새로운 개념의 시의성과 계시성에 흥분했다. 그러나 정작 벌거벗음 그 자체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큰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도대체 벌거벗음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벌거벗음은 어떻게 작동하는가. 벌거벗음은 일반적으로 권력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벌거벗음을 둘러싼 권력의 외양이나 작동 방식은 다양할 수 있다. 그러나 원초적인 사드 마조히즘과 최첨단 전신 스캐너는 동일하게 벌거벗음이 인간 신체에 대한 권력 작동의 결과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일견 이와는 전혀 다른 맥락의 벌거벗음 또한 존재한다. 이는 바로 신학적 전통에서의 벌거벗음이다. 이 책 『벌거벗음』에서 아감벤은 우리가 벌거벗음이라는 문제를 진정으로 면밀히 검사하기 위해선 벌거벗음과 옷, 인간 본성과 은총이라는 신학적 대립의 근원을 탐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감벤은 “벌거벗음에 대한 문제는 인간 본성이 은총과 갖는 관계의 문제”라고 지적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과 달리 태초의 인간은 결코 벌거벗지 않았다. 분명 아담과 이브에게 인간의 옷은 부재했다. 그러나 그들은 신의 은총이라는 영광스런 옷을 입고 있었다. 신학적 전통에서 벌거벗음은 원죄 이후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벌거벗음은 결코 하나의 상태로 지속되지 않는다. 아감벤은 “완전한 벌거벗음은 아마도 지옥의 저주 받은 육체, 신의 정의의 심판에 의해 영원히 고통 받는 이들에게만 존재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벌거벗음은 은총의 부재, 혹은 영광스런 ‘옷의 결핍 상태’다. 그리고 이는 또한 부활한 자들이 “천국에서 받을 눈부시고 영광스런 옷의 전조다.” 신학적 전통에서 벌거벗음은 이처럼 그 자체로 정의되거나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결여와 전조로서만 의미를 가진다.


분명 성경에서 벌거벗음은 은총이라는 옷의 상실과 함께 처음 등장한다. 그러나 신학자들의 주장처럼 은총의 옷이 벌거벗음을 가리고 있었다면, 논리적으로 벌거벗음은 원죄 이전에도, 그리고 신의 은총 이전에도 존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닐까. 아감벤이 이 책에서 여러 번 인용하고 있는 나치 시대의 신학자 에릭 페터슨은 인간은 옷 없이 창조됐고, 옷 없이 창조된 인간의 벌거벗은 육체는 신의 영광, 즉 은총이라는 초자연적인 의복을 입기 위해서만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신의 은총이 옷이라면, 인간의 본성은 벌거벗음이다. 페터슨의 말처럼 “가톨릭 신학은 벌거벗은 육체를 덮기 위해 옷이 필요한 것처럼 우리에겐 은총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은총 혹은 은총이라는 옷은 인간에게는 필수적인 보충물이다. 은총을 필수적 보충물로 받아들이기 위해 인간 본성은 보충돼야 하는 결여, 은총을 받아야 하는 벌거벗은 육체로 가정돼야 한다. 즉 은총을 받기 위해 인간은 벌거벗은 본성을 가진다고 가정되고, 은총이 거둬진 순간 인간의 벌거벗은 본성은 다시 드러난다. 신비롭게도 이 다시 드러난 본성은 타락한 본성이다. 아담과 이브는 은총의 옷의 상실로 인해 자신들의 벌거벗음을 깨닫고 주요 부분을 무화과 잎으로 감춘다. 그들은 벌거벗음과 함께 처음으로 자신들이 소유한 육체의 본성과 성에 대해서 깨닫는다. 그들은 이제 스스로의 리비도를 제어하지 못하는 타락한 육체를 부끄러워한다.
아감벤이 지적하듯이 죄는 기본적으로 옷의 박탈이다. 원래부터 인간의 본성이 타락한 것도, 악으로 가득 차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은 본성과 은총을 분리시키는 옷을 벗기고, 옷으로 가리는 행위에 의해 구성된다. 그리고 이것이 은총과 원죄 그리고 인간의 본성을 결합시키는 신학적 장치가 작동하는 기본 원리이다.


주권권력이 호모 사케르-벌거벗은 생명을 전제하고 그로인해 이를 실질적으로 생산하는 것처럼, 신학에서는 벌거벗음과 타락한 인간 본성이 전제되고 생산된다. 그렇기에 신학에서 벌거벗음은 타락한 인간 본성과 신의 은총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다. 이 장치에 포섭되기 이전의 순수한 벌거벗음, 타락하지 않은 인간 본성, 혹은 “벌거벗음과 옷의 분리 이전의 기원적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는 없다. 실상 그러한 근원적 벌거벗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벌거벗기는 행위, 옷의 박탈과 결핍 그리고 그로인해 발생하는 벌거벗음이란 사건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과제는 벌거벗음을 생산하는 신학적 장치를 이해하고 이를 무화시키는 일이다.


신학적 장치로서의 벌거벗음을 무화시키는 방편으로 아감벤은 벌거벗음에 대한 다른 해석을 제시한다. 아담과 이브의 눈이 열리고 그들이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자신들의 벌거벗음이다. 벌거벗음은 지식의 첫 번째 대상이고 내용이다. 그런데 인간이 알게 된 최초의 지식인 벌거벗음은 기본적으로 결핍이다. 아감벤은 벌거벗음이라는 최초의 지식에서 이러한 내용의 부재는 이 지식이 어떤 대상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오히려 순수한 지식 가능성에 대한 지식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벌거벗음을 인식하는 베일의 부재와 지식의 가능성을 깨닫는 것이다.


은총의 옷이 벗겨짐으로 우리는 인간 신체에 진정으로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순수한 지식으로서의 벌거벗음은 인간 신체의 이미지이고, 여기에는 어떠한 물질적 감응도 없다. 더 이상 벌거벗음과 옷의 구분, 타락한 본성과 은총의 구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는 단순한 인간 신체의 이미지 그리고 외양만이 있을 뿐이다.
아감벤에 따르면 이렇게 신학적 장치에서 해방된 벌거벗음은 우리 신체의 잠재성, 아직 우리가 명확히 알지 못하고 있는 인간 신체의 순수한 잠재성의 드러남에 다름 아니다.

김영훈 서강대 대우교수·영어영문학과
필자는 캐나다 알버타대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미국 대중문화와 현대 소설이 주 연구 분야다. 최근에는 한국과 미국의 기업가 주체 담론에 대한 비교연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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