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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방, 고요한 벽
텅 빈 방, 고요한 벽
  • 교수신문
  • 승인 2014.12.22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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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이연도 서평위원/중앙대 교양학부·철학

▲ 이연도 서평위원
“넓고 멀직하고 광선이 간접으로 어리는, 물 속처럼 고요한 벽면, 그런 벽면에 낡은 그림 한 폭 걸어놓고 혼자 바라보고 앉아 있는 맛, 더러는 좋은 친구와 함께 바라보며 화제 없는 이야기로 날 어둡는 줄 모르는 맛, 그리고 가끔 다른 그림으로 갈아 걸어보는 맛, 좋은 벽은 얼마나 생활이, 인생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일까.”

상허 이태준의『무서록』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세밑이라 그런가. 텅 빈 방, 하얀 벽이 생각난다.‘ 背光이 없는 생활일수록 벽이 그립다’더니, 하루하루 살얼음판이었던 올 한해의 끝은 조용한 산사라도 들어가 마감하고 싶다. 돌이켜 보면 혼자 보내는 시간, 고요와 적막의 기회가 점차 줄어든다.

요즘 강의실에서 부쩍 느끼는 일이지만, 학생들의 주의력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원인은 스마트폰이나 전자기기들 때문이다. 집중력이 약화된 것은 텍스트나 강의에 대한 이해도에도 문제가 있지만, 더 큰 문제는 다른 데 있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대로, 고요와 고독은 정치적 개인의 존립에 필수적인 조건이다. 그런 점에서 스마트 기기의 전면화는 사회의 정치적 관심을 약화시키고, 독립적 인격을 형성하는 데 있어 최악의 환경을 만든다. 이제 SNS는 우리 사회에서 일종의 훈육체계로 기능한다. 블로그 활동은 일상의 소소한 일에 사람을 파묻히게하고, 공동체의 담론을 외면하게 만든다. 책을 채 한 페이지도 나가기 전에, 스마트폰은 온갖 시시껄렁한 일로 읽는 사람을 호출한다.

신자유주의는 혼자만의 시간을 끊임없이 통제하고 빼앗으려 한다. 조너선 크레리의『24/7 잠의 종말』(문학동네, 2014)은 그동안 자본이 제거할 수 없었던 유일한‘자연조건’인‘잠’에 대해 얘기한다. 미 국방부는 잠자지 않은 북미멧새의 비밀을 풀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고 있다. 이 새는 알레스카와 멕시코를 오가며 7일 동안 잠자지 않고 비행한다. 이들이 목표로 하는 것은 잠들지 않는 병사이지만, 이것이 곧 잠자지 않는 노동자나 소비자로 확대될 것이라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잠자지 않는 사회는 인간의 정서나 휴식을 효율성을 저해하는 장애물 정도로 취급하는 자본주의의 최고 정점이 될 것이다. 대학 역시 오랫동안 이러한 방향으로 움직여 왔다.

학문간‘통합’을 주창한 에드워드 윌슨은 일찍이 대학 연구자에게 80시간의 노동을 요구한 바 있다. “일주일에 40시간은 가르치는 일과 행정적인 일에 쓰고, 나머지 20시간은 중요한 연구를 하는 일에, 그리고 또 나머지 20시간은 정말로 중요한 연구를 하는 데 써야 한다”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젊은 박사학위 소지자가 하루 8시간을 잔다면, 일주일에 그에게 남는 시간은 32시간 밖에 되지 않는다. 즉 하루 4시간 반 안의 시간 동안 그는 먹고 씻고 쇼핑하고 가사를 돌보고 출퇴근하고 (불행한) 자녀를 돌보야 한다(웬델 베리, 『삶은 기적이다』, 녹색평론사, 2006). 결국 대학의 연구자들이‘책을 내든지 아니면 사라지든지’라는 적자생존의 냉혹한 현실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잠을 줄이는 수밖에 없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정년트랙’의 교수라 하더라도, ‘연구실적’의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 그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다.

‘혁신’과‘독창성’을 강조하는 대학 시스템은 이러한 추세를 더욱 가속화시킨다. 상당수의 대학들이 ‘창조’를 내건 과목을 개설했고, 지금도 생겨나고 있다. 그렇지만, 막상‘창의성’의 바탕이 되는 인문학은 오히려 대학에서 자리가 더욱 줄어들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창의성’의 요체에 대한 상식적인 이해를 달리하기 때문이다. 정부의 관료나 대학 운영자들은 고전 읽기나 글쓰기, 사고 훈련 등은 이른 바‘혁신’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가 단기간에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고, 그 방법론 역시 분명치 않기 때문이다.‘ 몸에는 좋은데 뭐라 말할 수 없는’그 애매함을 우리 사회는 결코 용납치 않는다. 오늘날 대학은 최초이며 창조적인 것만을 인정한다. 거기에 소비자인 학생들의 비위에도 맞아야 한다. 대학의 연구자들이 끊임없는‘자기혁신’의 부담을 안고, 심오함인지 모호함인지 구분되기 어려운 논문 쓰기에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이유다. 학생 눈높이에 맞춘 교육은 교수들을 시류에 민감하고, 유행 따라 표류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만들었다.

고요와 고독을 잃은 대학의 앞날은 암담하다.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지, 학문의 본래 의미가 어떤 것인가에 대한 전면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한 해가 끝나는 시점,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차분하게 생각해 봐야겠다. 벽이 그립다.

이연도 서평위원/중앙대 교양학부·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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