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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 문학' 담론, 그 세련화를 지향하며
'환경과 문학' 담론, 그 세련화를 지향하며
  • 교수신문
  • 승인 2014.12.22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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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대회 참관기_문학과 환경학회 국제심포지엄을 다녀와서

▲ 해상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사람들이 헤노코 해변에 설치한 텐트. 문학과 환경학회 국제심포지엄이 열린 오키나와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조규익 교수는 바로 이곳에서 일본의 환경론이 보다 심도있게 융합 양상을 띄며 발전하고 있음을 목격했다고 말한다. 사진제공= 조규익
이 글은 조규익 숭실대 교수(국어국문학과)가 지난 10월 22일부터 이틀간 일본 오키나와나고 시의 메이오대에서 열린 2014년 동아시아 문학과 환경학회 국제 심포지엄[2014 The International Symposium on Literature and Environment in East Asia[ISLEEA]/Unsettling Boundaries: Nature, Technology, Art]을 다녀와서 학회 참관기로 보내온 글이다.

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오키나와 나고(名護) 시의 메이오(名櫻) 대학에서 열린‘2014년 동아시아 문학과 환경학회 국제 심포지엄’은 한국·일본·미국·타이완·중국·오스트레일리아·홍콩·캐나다 등 세계 각국에서 모여 든 100여명의 학자들과 수십 명의 대학원생들이 모여 벌인 학술의 난장이었다. ‘동요하는 경계들: 자연, 기술, 예술’이란 주제가 암시하듯 현격하게 다른 분야의 학문들이 환경이란 범주로 융합돼야 하는 당위를 모토로 내건 심포지엄이었다.

‘전날 밤의 다큐멘타리 상영/이틀에 걸친 논문 발표/환경 분쟁지역 헤노코(へのこ) 답사’등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 진행된 심포지엄의 메시지는 명확했다. 환경파괴가 단순히 물리적인 문제이거나 순간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한시적인 문제도 아니며, 세대를 넘어 영원히 지속되는 문제로서 인문학을 비롯한 모든 분야의 지혜를 융합해 미연에 방지하거나 해결해야 할‘절박한 삶의 문제’임을 천명하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심포지엄 전날 밤 참여자들을 위해 상영한 다큐멘타리「꽃의 정토로(花の億土へ)」는 이 심포지엄이 지향하는 결론을 미리 암시한 일종의 가설이자 話頭였다. 자신의 고향 구마모토 현(熊本縣)의 미나마타(水俣)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환경문제를 문학으로 고발해 전 세계에 알리고 환경 공해의 고발과 해결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이시무레 미치코(石牟괋道子). 그녀가 주연으로 출연해 미나마타병의 현상과 의미를 심도 있게 설파하고, 시라누이(不知火) 바다의 아름다운 사계를 통해 그 공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시간대의 희망을 그려낸, ‘한 편의 시’와 같은 기록 영화였다.

그 바다가 갖고 있던 본래의 환상적인 아름다움과 공해로 일그러진 현실의 참상이 대비되면서 자연환경의 파괴가 인류의 삶에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지 보여주고자 한 듯, 전편에 걸친‘환상과 리얼리즘’의 융합적 미학이 두드러진 작품이었다. 이시무레 미치코의 삼부작(『苦海淨土』, 『신들의 마을』, 『하늘의 물고기』)은 이미 환경 문제를 예술로 승화시킨 고전의 반열에 올라 있었으며, 일본 학자들은 물론 서양 학자들도 이시무레 미치코와 그녀의 문학을‘환경 혹은 환경문학’의 중심에 올려놓고 그들의 담론을 생산하거나 정제시키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아름다운 헤노코 해변을 누구로부터 지켜야 하는지,
난해한 의문이 떠올랐다. 누구의 말대로‘세계전략 차원의 폭거를 자행하고
있다’는 미국인가, 아니면 그 미국을 편드는 일본 정부인가, 아니면 일본의
가상적 적대국인 중국이나 북한인가. 그런 것들이 아니라면 개발이란 미명
아래 자연환경을 운명적으로 파괴할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들인가.

서구 사회나 일본이 일찍부터 산업화의 길을 걸어온 만큼 환경 파괴의 문제나 삶의 피폐화 등 인간 소외의 문제를 인식하고 자각해온 역사가 길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할만하다. 그런 비극적 현상들을 각종 예술의 소재로 그려내고자 한 것도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그러나 철학이나 종교학을 포함한 인문학적 사유를 통해 그런 것들을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활성화되면서 환경론이 보다 심도 있는 융합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음을 확인한 점은 충격이었고, 그것은 적어도 우리가 갖고 있는 환경인식의 낙후성이나 단편성과 대비되는 그들의 학문적 선진성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의 경우 이미 담론화된 철학 혹은 인문과학을 환경과 억지로 융합시키려 한다는 혐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아무리 환경이 물적인 객체라 해도 그것이 담론화의 대상으로 이미 편입돼 인식의 한 자리를 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과 대비되는 우리의 후진성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마지막 날 답사한 헤노코(へのこ) 해변을 바라보며, 군사기지 건설의 현실적 필요성과 자연보호의 명분은 양자택일의 문항이 아니라 그 역시 지혜로운 타협과 융합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는 나름의 판단을 내리게 됐다. 미 해군기지의 증설을 극력 저지하며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의 텐트 바깥엔‘투쟁 3871일째’라는 팻말이 작지만 완강한 모습으로 버티고 서 있었다. 그들을 보는 순간 아름다운 헤노코 해변을 누구로부터 지켜야 하는지, 난해한 의문이 떠올랐다. 누구의 말대로‘세계전략 차원의 폭거를 자행하고 있다’는 미국인가, 아니면 그 미국을 편드는 일본정부인가, 아니면 일본의 가상적 적대국인 중국이나 북한인가. 그런 것들이 아니라면 개발이란 미명 아래 자연환경을 운명적으로 파괴할 수밖에 없는 우리 자신들인가.

환경론의 인문학적·미학적 승화는 단발적 캠페인이나 저항운동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환경문제를‘대를 이어’지속적으로 전개함으로써 새로운 삶의 원리로 격상시키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환경 문제를 문학이나 예술로 고발하고 형상화 할 뿐 아니라 초기 단계부터 교육과 연계시킨다면‘미래의 개연적 환경파괴 문제’는 근원적으로 예방될 수 있을 것이며, 예기치 않은 환경문제들도 체계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고의 틀을 수월히 마련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역사 발전 원리의 두 축인 당위와 현실은 환경에도 적용돼야 하고, 그에 대한 새로운 비전을 갖춰야 할때임을 깨달은 기회였다.

조규익 숭실대·국어국문학과

해군사관학교, 경남대 교수를 거쳐 1987년 숭실대의 교수로 부임해 인문대학장을 역임했다. 한국문예연구소 소장을 겸하고 있다.『 조선조 악장연구』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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