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릴레이 에세이 : 현대인의 불치병, 외로움
릴레이 에세이 : 현대인의 불치병, 외로움
  • 교수신문
  • 승인 2002.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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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10-19 14:02:53
이동렬 / 이화여대·심리학

<사진1>내가 지금 몸담고 있는 대학으로 적을 옮긴 뒤로 3년 째 계속 맡고 있는 과목 하나는 ‘인간관계심리학’이라는 학부과목이다. 과목 이름이 말해 주듯이 인간 관계에 대한 거의 모든 것, 이를테면 가족관계, 우정, 애정, 행복, 결혼, 직장 등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루는 축소판 사회심리학 같기도 해서 어디서 어디까지가 그 과목의 테두리인지 분명치 않을 때가 많다. 나는 그 과목을 학문적 해물잡탕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어떻게 생각하면 가르치기가 쉽고, 또 어떻게 생각하면 가르치기가 무척 어려운 그런 과목이라고 할 수 있다.

유학을 떠나던 1960년대 중반에는 이런 이름을 가진 학과목은 들어보지 못한 것 같다. 사람과 사람 사이가 점점 메말라가는 현대사회에서 심리학적 원리를 적용하면 그 관계가 좀 더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하는 것이 이러한 과목을 교과과정에 넣은 사람들의 당초 의도였을 것이다. 물론 이 과목이 인간관계에서 얼마나 큰 윤활유 역할을 하는 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지만.

여느 해든 마찬가지지만 강의 첫 시간에는 등록을 한 학생들이 너무 많아서 20여명은 쫓아내야 하는 것이 큰 두통거리가 된다.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나는 결석을 한 번 하면 최종점수에서 2점을 빼겠다고 엄숙히 선포한다. 그러면 학생들은 썰물 빠지듯 나가고 90명 안팎의 결사대만 남는다. ‘인간관계심리학’은 첫날부터 이렇듯 교수의 일방적인 엄포 사격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강의 제목이 ‘인간관계심리학’이다 보니, 나는 첫 시간에 결석에 대해 엄포를 놓았던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그 많은 학생들의 이름을 일일이 다 부른다. 출·결석을 체크하는 또 다른 방법이 있긴 하지만 소위 인간관계심리학이라며 학생 이름도, 얼굴도 모른다면 해도 너무 할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학에서 아무리 인간관계심리학을 필수로 넣고 가르쳐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더 부드러워진다든지 외로움을 느끼는 정도가 이전에 비해서 줄어든다는 증거는 없는 것 같다. 오히려 그 반대가 맞지 않을까. 현대인의 생활방식이나 통신수단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표피적인 접촉을 증가시키지 그 접촉의 질은 올리지 못한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요새 사람들은 하루에 많은 사람을 만나기는 하나 함께 보내는 시간은 더 짧다는 사회심리학의 연구보고도 있지 않은가.

현대 통신의 발달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더 메마르게 만들고 형식적인 접촉을 권장하는 것 같다. 텔레비전도 그렇다. 텔레비전은 무더운 여름밤 이웃집 아저씨와 맥주잔을 기울이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안방극장으로 가두지 않는가. 이렇게 보면 텔레비전은 분명 반사회적 문명의 이기이다. 컴퓨터는 동네 아이들끼리 어울려 노는 풍습을 점차 찾아보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사람을 떠나 보내는 슬픔이나 맞는 기쁨도 이제는 옛 영화 속에서나 찾아볼 수밖에 없는 풍속이 됐다. 기차역이나 공항에 나가보라, 눈물 흘리며 작별을 아쉬워하거나, 서로 부둥켜안고 재회의 기쁨을 눈물로 맞이하는 사람을 찾아볼 수 있는가를. 하룻밤만 지나면 뉴욕에 가서 점심을 먹을 수 있고 장거리 전화로 파리에 있는 연인과 시내 전화하듯 정담을 나눌 수 있는 지금 이별의 슬픔도, 만남의 기쁨도 그 강도가 별로 대단치 않은 그저 그렇고 그런 밋밋한 세상이다. 일본에서는 돈을 주면 기차역에 나가서 잘 가라고 작별을 해주고, 돈을 좀더 주면 눈물까지 흘려준다고 한다. 이 모두가 “나도 누군가 나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있다”라는 처절한 몸부림이요, 고독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이다.

인간사회에서 외로움 같이 가혹한 형벌은 없다. 인간을 외롭게 만드는 것도 인간이요, 인간을 외로움에서 건지는 것도 인간이다. 흔히 인간의 많은 비극이 지나친 욕심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말을 하지만, 내 생각에는 지나친 외로움에서 벗어나려는 간절한 욕망 때문에 일어난다는 말도 전혀 무리가 없는 것 같다. ‘인간관계심리학’도 이 외로움에 대한 일종의 저항 아닐까.

이번호부터 가을을 맞아 릴레이에세이를 선보입니다. 독자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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